막장 시리즈 '지하 묘지 여정'

[김유경의 책씻이] 기울기의 예각이 도드라진 <죽은 자들의 포도주>(로맹 가리, 마음산책, 2018)

등록 2019.01.15 16:19수정 2019.01.1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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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다. 두 이름은 로맹 카체프의 필명이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생전에 두 필명을 쓰지 못한 로맹 카체프의 육필 원고다. 제목처럼 "죽은 자들"이 등장해 기상천외하게 역한 풍경을 독자에게 들이댄다. 그러니까 주인공 튤립의 지하 묘지 여정 자체가 막장 드라마 시리즈 시청 같다. 왜 한창 풋풋한 열아홉 살 로맹 카체프는 죽어서도 제 버릇 개 못 준 막된 언행들에 꽂힌 걸까.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1933년에 시작돼 4년 후인 1937년에 첫 탈고된다.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물밑에서 태동되던 시기다. 애송이 작가 로맹 카체프가 당시 사회 현상을 눈여겨보다 경각심을 일깨우려 자극 수위가 높은 비현실적・비교육적・비윤리적・반사회적 묘사를 꾀한 걸까. <죽은 자들의 포도주> 입구에 문패처럼 놓인 한 문장, "삶은 죽음의 패러디에 불과하다."가 그런 생각을 부추긴다.


주인공 튤립은 술 취해 객기를 부리다 지하 묘지에 갇힌 꼴이 된다. 맞닥뜨린 귀신들은 튤립에게 실재처럼 보이고 들리고 움직인다. 산 자인 튤립과 말을 주고받고, 서로 몸을 더듬기도 한다. 죽이 맞는 건 아니지만, 죽은 자와 산 자 간의 간극이 소통 측면에서는 없다. 그로테스크한 언행을 통해 죄명이 드러나는 죽은 자들은 현실 세계의 모든 계급을 총망라한다.

경찰, 독일 육군 중위, 창녀, 애들만 바글바글한 가난뱅이 가족, 수도사, 수녀, 사령관, "전쟁이란 전쟁을 다 치른" 얼굴도 잘려나간 늙은이, 전사한 아들의 엄마, 세상이 허락하지 않아 동반 자살한 연인, 레지옹도뇌르 훈장 받은 전직 대법관, 병든 "아이 울음소리를 더는 듣지 않기 위해" 목 맨 남자 등등이다. 심지어 얕은 수의 기적을 보이는 그리스도까지 등장한다.

그들 군상이 펼치는 아수라장은 튤립의 단골대사, "내 마누라가 예전에 방을 세줬던"의 후렴이 되는 사건사고들과 닮아 있다. 로맹 카체프가 생생하게 경험한 '메르몽 하숙집의 세계'를 패러디한 것이다. 그것은 지하 묘지의 지옥상이 1930년대의 타락상을 대변한다는 암시다. 지하의 죽음과 지상의 삶을 동급으로 매겨 인간적 가치가 실종된 삶은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역설이다.

지하 묘지 세계는 "악취"로써 존재를 과시한다. 그것은 "부패한 땅이 스스로를 갈아엎으면서 모든 땀구멍으로 자신의 죽음을 외치는 것 같은 냄새"여서 숨 쉬는 일체에게 불가항력적이다. 동시에 그 진원지가 지하 세계 구성원인 죽은 자의 썩은 육신이 아닌 "그 빌어먹을" 인간 영혼이라는 게 문제적이다. 종교계도 한몫한 바를 두 수도사의 예로 에둘러 꼬집은 게 "신이 직접 중재한 두 사내 간의 협약의 증거"다.

지하 묘지 군상 중 많은 수가 경찰과 창녀, 그리고 자살자다. 특히 쾌락에 취해 질주하며 분비물을 쏟아내는 경찰들 탓에 악취가 사방팔방으로 퍼져 진동한다. 집행기관인 경찰들이 마셔대는 포도주는 "빨갛고 뜨거운, 서민들의 좋은 피"다. 경찰을 민중의 지팡이는커녕 건강한 민중의 피를 빨아 민중을 오염시키는 전염성의 좀비 부류로 암시한 셈이다.


튤립의 물음 "출구가 어디요?"에 대해 "무덤을 옮기기는 해도 출구는 없어요."란 경찰의 대답이 그걸 지지한다. 놀라 딸꾹질만 하는 튤립에게 경찰청장은 한술 더 뜬 충고를 한다. "바깥세상에 나가면" 구린 구석이 들통 나 몰매 맞지 않도록 "여전히 무덤 속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살았지만 죽은 듯 지내야 별 탈 없을 거라는 협박성이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인간 정신을 마비시키는 그 획일화 정책이 2차 세계대전의 낚싯밥이 될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시사한다. 눈 떠 구덩이에서 놓여난 튤립의 시선을 통해서다.

"묘지의 철책 너머로 불꺼진 가스 가로등과 진흙 바닥 그리고 저 멀리 집들과 마을이 보였다. 지붕들 위로 유백색 안개가 떠다녔다.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하늘로 곧게 뻗어 오르다가 사방으로 번졌다. 새들이 안개 속에서 버둥거렸다. 안개가 거대한 거미줄인 양."

<죽은 자들의 포도주>가 가리키듯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지만 한편 수많은 신비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살만한 세상을 원한다면, 인생에서 고통과 신비를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기울기의 예각이 도드라진 <죽은 자들의 포도주>는 아쉽다. 그렇잖아도 저항의 목소리들이 세를 이루기 힘들었을 당시에 뭇 출판사가 로맹 카체프의 노크를 거절한 게 이해된다.
#죽은 자들의 포도주 #로맹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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