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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강도' 연기한 레드포드, 그가 하면 자뻑도 멋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246]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미스터 스마일>

19.01.15 16:30최종업데이트19.01.1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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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 스마일 포스터 ⓒ 티캐스트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의 일이다. 기마대가 원주민을 토벌하고 보안관이 불한당을 처단하는 정의롭기 짝이 없던 서부극의 시대가 저물었을 때,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70)를 통해 휘날리는 금발 머리와 '살인 미소'를 장착한 총잡이 한 명이 은막 위에 나타난 게 말이다.

극 중 '더 선댄스 키드'라 불린 사내는 당대 서부를 뒤흔든 은행털이 갱단 제일의 총잡이였다. 그는 내일에 대한 기약 없이 오늘만을 살았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마지막 장면을 남긴 채 사라졌다. 그리하여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할리우드의 길고 긴 역사에서 로버트 레드포드보다 낭만적인 배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선댄스 키드를 연기한 뒤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는 그대로 낭만의 상징이 되었다. 맞는 말이다. 끝없이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쏘지 않고 오늘만 살던 낙천적인 사내로부터 낭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대체 어디서 낭만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곳에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던 이름 모를 이처럼 선댄스 키드와 그의 친구들은 그곳에 은행이 있어 은행을 터는 것 같았다. 그들의 삶은 맹목적이었으나 열정적이었고, 무모했지만 낭만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지켜보던 많은 관객들이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쥔 채 이들의 범죄행각을 응원하게 됐다.

선댄스 키드와 같았던 레드포드의 삶
 

▲ 미스터 스마일 경찰과의 추격전 끝에 손으로 총모양을 만들어 겨누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장난스런 모습은 <그랜토리노>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비장함과 대비된다. 이 장면으로부터 영화를 바라보는 두 영화인의 태도가 엿보이는 듯도 하다. ⓒ 티캐스트

  
이후 반세기 동안 이어진 배우 레드포드의 삶은 꼭 선댄스 키드의 그것과 같았다. 맹목적인 열정에 끌려 위험을 감수하고 어떤 모양의 오늘이든 긍정해내는 낙천주의자, 레드포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 것에 가진 모두를 바쳤다.

영화 속 선댄스 키드가 위험을 사랑했듯 그는 영화를 사랑했다. 그래서 레드포드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캐릭터 선댄스 키드의 이름을 붙여 영화제를 세우고 후원해 세계에서 제일가는 독립영화제로 키워냈다. 레드포드 이전엔 누구도 쉽사리 가지 않던 길이었고, 그 길을 먼저 걷던 소수의 이들조차 그만큼 멀리 나아가진 못했다. 그러므로 그에겐 영화인으로서 최고의 찬사가 주어질 법한 일이다.

선댄스 영화제는 지금껏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작가를 여럿 배출했다. 그 중에는 스티븐 소더버그, 코엔 형제, 쿠엔틴 타란티노, 로베르토 로드리게즈, 데이미언 셔젤의 이름도 들어가 있다. 그러니 오늘날 영화팬이라 자부하는 사람 가운데 레드포드의 덕을 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는 없다고 해도 좋다. 요컨대 선댄스 영화제가 쓴 역사는 불안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낙천주의자의 낭만이 어떤 현실주의자의 셈법보다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으로 기록돼 마땅하다.

낭만을 사랑하는 사내 로버트 레드포드는 스스로의 연기 인생 마지막도 멋지게 끝맺고 싶었나 보다. 지난해 말 개봉한 <미스터 스마일>이 자신의 은퇴작이 될 거라고 일찌감치 공언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은행털이로 시작해 은행털이로 끝내는
 

▲ 미스터 스마일 평생 은행만 털어온 노년의 신사 포레스트 터커(로버트 레드포드 분)는 범행순간조차 친절하고 여유있다. ⓒ 티캐스트

  
2018년 12월 27일 개봉한 영화 <미스터 스마일>은 포레스트 터커라는 은행털이범의 실화를 다뤘다. 포레스트는 일흔여덟의 나이로 체포되기까지 무려 60년 동안 은행털이범으로 살았고, 붙잡혀 들어간 교도소에서 열여덟 차례나 탈옥한 전대미문의 인물이다. 그는 범행횟수뿐 아니라 범행을 저지르는 방식으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은행을 털면서도 폭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언제나 여유롭고 친절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은 포레스트가 전성기를 보내던 1980년대 미국이다. 어느 날 포레스트는 은행을 털고 고속도로를 달리다 제 차 색깔을 알고 추적하는 경찰의 무전을 도청하고 차를 갓길에 댄다. 포레스트는 마침 차가 길에서 멈춰 어쩔 줄 모르던 여자 쥬얼(씨씨 스페이식 분)을 발견하고 그를 이용해 위기를 모면한다. 그리고 포레스트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쥬얼과의 관계를 이어간다.

감독 데이빗 라워리가 원작을 로버트 레드포드를 염두에 두고 고쳐 썼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영화 속 포레스트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키드가 그렇듯 멋지게 은행을 털고 삶을 긍정하며 위험을 즐기는 인물이다. 다른 누구를 위험에 몰아넣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멋스럽게 범행을 이어가는 그를 보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영화 속 은행털이를 영화 자체와 대치시키고 레드포드의 삶에 빗대어 포레스트란 인물을 바라보게 된다. 말하자면 <미스터 스마일>이라는 영화는 곧 예술을 대하는 레드포드의 자세가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인 셈이다.

반 세기쯤 계속하면 허세와 자뻑도 멋이 된다고
 

▲ 미스터 스마일 쥬얼(씨씨 스페이식)과 데이트하는 포레스트(로버트 레드포드 분).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배우인생을 정리하려는 레드포드에게 극장 신은 여러모로 의미 깊어 보인다. ⓒ 티캐스트

  
영화가 포레스트의 삶을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명확하다. 비록 그것이 대단히 위험하며 세상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것일지라도, 자신의 일에 대한 맹목적인 열정으로 끝내 밀어붙이고 마는 한 사내의 삶 자체이다.

영화 속 포레스트는 맹목적이란 말 외에는 설명할 수 없이 은행털이에 끌린다. 행위의 결과로 주어지는 돈보다 그 과정에서의 위험을 즐기는 듯이 보일 정도다. 영화 중반의 자동차 추격 장면에서 엿보이는 배우 레드포드의 태도 역시 그렇다. 이 장면에서 레드포드는 자신을 겨냥한 경찰을 향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드는데, 그의 표정은 오직 즐거움을 좇는 소년스러운 사내의 모습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닌 듯하다.

영화는 거듭 극 중 인물과 레드포드의 삶을 오가며 이 영화가 단순한 은행털이범의 전기영화가 아니란 사실을 내비친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키드이자 레드포드의 삶 자체, 그리고 사랑하는 무엇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누군가의 이야기 위에 어쩌면 그저 매료된 대상이 달랐을 뿐인 포레스트의 한 시절을 덧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금지된 것을 향한 맹목적 열정이란 될 수 있으면 만나지 않는 편이 이롭겠다'는 현실적 교훈과 함께, 그런 열정 가운데 일생을 살아간 누군가의 삶에 약간의 경외심을 품게 된다. 레드포드, 혹은 포레스트의 삶과 같은 것에 말이다.

<미스터 스마일>은 영화 안과 밖을 넘나들며, 극 중 인물과 주연 배우의 삶을 오가면서 의미를 찾게 만드는 작품이다. 영화를 그저 영화로만 놔두지 않는 선택에서 레드포드 특유의 허세와 겉멋이 묻어나는 듯도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무엇이든 반 세기쯤 계속했다면 허세와 자뻑도 멋이 된다는 걸, 그도 알고 나도 아는데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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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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