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전, 황해도 해주에서 남북경협 이루어졌다면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992년 1월 15일 김우중의 방북

등록 2019.01.15 11:43수정 2019.01.1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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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방북을 보도하는 1992년 1월 15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으로도 유명한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넓은 세계를 향해, 할 일을 찾아 떠나는 일이 있었다. 27년 전인 1992년 1월 15일의 일이다. 독일 통일과 구소련 해체로 냉전 질서가 붕괴하던 중에,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이룬 직후였다. 다음은 그 날짜 <동아일보> 보도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남북 합작공장 설립 등 경제협력 추진을 위해 15일 중국 북경을 거쳐 입북했다. 대우그룹에 따르면, 김 회장은 지난 10일 출국, 파키스탄 국영 고속도로 공사 기공식에 참석한 후 15일 수행원 8명과 함께 북한 항공기 편으로 평양에 도착했다. 김 회장은 오는 31일까지로 예정된 방북 기간 중 북한의 주요 공업시설을 둘러보고 특히 의류·신발 등 경공업 분야의 합작공장 설립을 중점 협의할 계획이다."
 
김우중 회장은 방북 5일 뒤 김일성 주석도 면담했다. 북한 전문 보도기관 <내외통신>에 따르면, 북한 방송들은 두 사람이 "동포의 정 넘치는 담화를 했다"고 전했다. 2014년에 발행된 경제학자 신장섭과의 대담록 <김우중과의 대화: 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김우중은 "김 주석이 우리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어요, 우리가 초대소에 묵는데 초대소 책임자에게 매일 전화 걸어서 '잘 잤느냐, 식사는 잘했느냐'고 물어봐요"라면서 "김 주석은 (남북관계를) 어떻게든 잘하려고 했어요"라고 회고했다.

김우중의 성과는 김일성 면담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개성시에서 서쪽 약 100km 거리인 황해도 해주에 경공업 단지 200만 평을 조성하기로 하는 합의도 체결했다. 850만 평인 개성공단의 24% 정도 되는 공업단지를 만들기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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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26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공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우중이 남북경협을 최초로 추진한 기업인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북한 진출을 시도한 쪽이 있었다. 1987년 2월부터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활동한 정주영이었다.

정주영이 명예회장으로 있은 기간(1987~1991년)은 현대그룹이 대북 및 북방 사업을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기존 주력 업종인 건설·중공업에 대해서는 구조조정을, 고선박 해체나 컨테이너 생산에 대해서는 퇴출을 준비하는 한편, 자동차·전자·석유화학 분야 등을 주력 업종으로 내세우려던 때였다. 남북경협과 북방 경제권을 연동하는 방법으로 현대그룹의 재도약을 이뤄내는 게 그의 포부였다.

정주영은 1987년경부터 일본 재계 등을 통해 대북 접촉을 모색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등장 이래로 냉전 구도가 급격히 약해지는 틈을 활용해 북한 진출을 꾀했던 것이다. 그 결과,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초청장을 두 번이나 받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의 전신)의 제지로 물러서야 했다.

1989년 9박 10일 일정으로 북한 방문한 정주영

계속 실패하자, 정주영은 노태우 정권 실세인 박철언 의원을 만났다. 1988년 10월 4일이었다. 이 만남에서 수확을 거둔 정주영은 1989년 1월 23일 9박 10일 일정으로 북한 방문에 나섰다. 그는 금강산 관광사업을 공동 추진하는 방안, 철도 차량 및 선박을 합작 생산해서 소련에 수출하는 방안, 시베리아 석탄이나 암염(천연 염화나트륨)을 공동 채취해서 중국에 수출하는 방안들을 합의하고 돌아왔다.

세계질서가 탈냉전에 본격 진입하기 직전에, 정주영은 정부가 승인하는 남북경협 창구가 되어 북한에 들어간 뒤 그처럼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9박 10일 방북은 결과적으로 비즈니스 방문이 아니라 단순 관광이 되고 말았다. 남한으로 돌아오자마자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노재봉 대통령 정치특보는 "적성국가와의 외교 과정에서 불법성을 노출"했다고 비판했고, 야당인 통일민주당 출신의 김재광 국회부의장은 북한과의 경협 합의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비난했다. 권력 실세인 박철언이 정주영의 남북경협을 지렛대로 삼아 무언가 도모하지 않을까 하는 시선이 정주영에 대한 파상공세로 이어졌던 것이다.

방북이 무위로 돌아가고 경협이 불투명해지자, 정주영은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몸은 점점 더 정계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노태우 정권이 내린 결정이 있다. 이 결정이 1992년 1월 15일의 김우중 방북으로 이어졌다. <역사비평> 2015년 8월호에 실린 정태헌의 '1998년 소떼 방북, 21세기 한반도 대전환의 문을 연 메가 이벤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정주영은 급기야 1990년 11월 관훈토론회에서 '미래를 맡길 정치지도자가 없'다는 강타를 던졌다. 1991년 들어 잦은 강연과 방송 출연 등으로 그의 정치 참여가 기정사실이 되자, 정부는 남북경협 창구를 김우중으로 바꿨다."
 

6남 정몽준(오른쪽 끝)과 함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부부를 만난 정주영 현대(왼쪽 끝). 서울시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의 ‘아산 기념 전시실’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 정부들이 상업을 지식산업·농업·공업 다음에 배치한 것은 어느 정도는 상인들을 통제할 목적에서였다. 토지에 얽매이지 않고 곳곳을 이동하는 상인이 많아지면 농업생산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보 수집능력이 탁월한 그들이 많아지면 국가가 백성을 통제하기 힘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상인이나 기업인은 어떻게 보면 보수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진보적이다. 경영 활동을 위해 권력의 눈치를 보고 현존 정치체제의 수호에 협력하기도 하지만, 정보 전달이나 기술혁신을 통해 새로운 공기를 사회에 불어넣기도 하고 결정적 순간에는 개혁적이거나 혁명적인 정치집단에 자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다시 도래한 남북경협 기회 꼭 붙들고 놓치지 않아야

세계사가 요동치던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정주영과 김우중 같은 기업인들은 남들보다 앞선 시야로 남북경협 무대에 뛰어들었다. 남북경협이 갖는 의미를 감안하면, 그들의 모험은 역사적으로 볼 때 진보적인 일이었다. 물론 정부의 승인을 받고 하는 일이었다. 또 김우중의 경우에는, 노태우 정권이 정주영을 견제하고자 그를 지원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열정과 조직과 자금과 인적 네트워크를 동원해 남북경협에 뛰어든 것은 거기서 이윤 창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윤이 생길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도 정부가 등을 떠밀었다면, 차라리 뇌물을 주고서라도 빠지려 했을 것이다. 노태우 정권이 김우중을 대타로 선택한 것은, 그 역시 정주영처럼 경협에 대한 의지와 역량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들이 정치권의 견제나 반발을 무릅쓰고 그런 모험에 뛰어든 것은 한국 경제의 미래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성장 동력이 한계에 다다른 한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 길은 북한과 시베리아 벌판에 선제적으로 뛰어드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경협이 퍼주기가 아니라 퍼오기라는 사실을 일찍 간파하지 못했다면, 이윤을 따지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가 곧 경제이고, 평화가 곧 안보라는 것을 남보다 먼저 파악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상인이나 기업인들이 평소에는 보수적이다가도 결정적 순간에는 진보적이 되기도 하는 역사 속의 무수한 사례들을 연상케 하는 일이다.

만약 1993년에 제1차 북핵위기가 발생하지 않고 1991년의 남북 화해 무드가 그대로 이어졌다면, 개성공단 사업이 합의된 2000년보다 훨씬 먼저 해주공단 같은 데서 남북경협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일찍부터 경협이 든든하게 자리를 잡았다면, 2016년 2월 개성공단 가동 중단 때처럼 경제 외적 요인으로 인해 경협이 중단되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남북경협은 한국 경제가 북한뿐 아니라 시베리아로도 뻗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유럽으로까지 직행하게 만들 수 있는 꿈의 무대다. 이제까지 태평양·인도양 등을 무대로 전개되던 한국 기업들의 수출이 새로운 루트를 갖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반에 해주공단 가동 같은 것을 통해 이미 이뤄질 수도 있었을 그런 일이, 2019년 현재까지도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한국 경제가 그간 얼마나 시간을 허비했는지 느낄 수 있다. 이제라도 만회하는 길은 딱 하나, 지금 다시 도래한 남북경협 기회를 꼭 붙들고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 것뿐이다.
#김우중 #남북경협 #정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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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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