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한옥 앉힌 땅 파봤더니 별 게 다 나오네

[작은 한옥 수선기 24] 나무와 함께 새로운 땅에 뿌리내리다

등록 2019.01.28 21:18수정 2019.01.28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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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소박하게나마 하고 싶은 일을 꾸려가며 사는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년이 넘은 한옥과의 첫만남, 그곳을 고치고 수선하는 과정 등을 소개합니다. - 기자말

내가 살게 된 한옥은 무척 작다. 공간은 작지만 넣어야 할 요소가 많았다. 하나의 공간은 매우 다양한 용도를 고려해야 했다. 살림집과 출판사를 함께 꾸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청은 살림집일 때는 거실로 쓰지만 출판사일 때는 저자들과 회의를 해야 하고, 때로는 독자들을 초대하는 곳이기도 해야 했다. 부엌은 우리끼리 쓰기에 편하기만 해서는 안 됐다. 좁은 집에 벽을 세울 수 없어 대청 쪽에서 개폐가 가능하게 해둔 탓에 어수선해질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했다. 언제든 정리정돈이 쉽고, 보기에도 좋아야 했다. 화장실도 마찬가지.

그러자니 이 집을 꾸릴 때 가장 으뜸으로 둔 것은 편의성보다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래 봐야 워낙 작은 공간이라 뭘 더 어떻게 해볼 여지가 적기는 했다. 눈에 보이는 걸 최소화하고 집 그 자체가 잘 드러나게 해야 했다.
 

새 집에 새 식구가 들어왔다. 나무도, 나도 이 집에서 사는 건 처음이다. 낯선 곳에서 우리 서로 뿌리 내리며 잘 살아보자, 나무를 어루만지며 나는 그렇게 말을 건넸다. ⓒ 황우섭

 
집 안의 공간은 숱하게 도면으로 그리고 상의해 나가면서 서로의 취향과 기호를 충실히 반영해 나갔다. 공간이 완성될 즈음 나의 관심사는 마당으로 흘렀다. 이 집의 첫 시작에는 퇴계 선생의 '도산서당'이 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도산서당 같은 집을 나는 마음에 품었다. 소박하지만 정갈한, 일체의 군더더기없이 아름다운 집. 도산서당이 아름다운 건 집이 들어앉은 산세 덕분인지도 모르지만, 내게 그 집의 화룡점정은 마당이었다.

나는 내 집의 마당 역시 그런 느낌이길 바랐다. 어떤 집을 지을까라는 나의 고민의 실마리를 찾는 데 길잡이가 된 김동욱 선생의 책 <도산서당,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퇴계 선생이 생각한 집은 벽으로 감싸고 지붕을 덮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연못을 둔 마당과 샘과 화단과 울타리가 다 갖추어진 곳이었다. 퇴계 선생은 집이 완성되자 주변에 연못을 만들고 화단을 가꾸었다."

이 책을 만들 때 나는 일부러 도산서당에 가서 촬영해온 사진을 배치하고, 위의 문장을 본문에서 뽑아 사진 설명으로 넣었다.

나 역시 일단 이사를 했으니 이제 화단을 가꿀 차례였다. 마당이 넓으면 연못을 파고 사립문도 만들었겠지만 나의 마당은, 화단을 만드는 것조차 내가 고집을 피워 가까스로 마련할 정도로 공간이 넉넉하지 않았다.

도면을 그릴 때도 좁은 건 알았지만, 막상 이사를 하고 대강의 짐을 정리하고 나니 마당의 좁은 실상이 한눈에 보였다. 집 전체 크기에 비해 마당의 비중이 꽤 넓은 집임에도 그랬다.


그래도 나는 꼭 여기에 화단을 꾸리고 싶었다. 텃밭으로 두어 뭔가를 키워 보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나무와 꽃의 달라지는 잎색을 보며 이 마당에서 누리고 싶었다. 여기에 더해 나는 집 안만이 아니라 골목길 한쪽 귀퉁이를 화단으로 꾸려 집 앞을 오가는 이들에게도 그 즐거움을 나눠주고 싶었다. 그러자니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무엇을 어떻게 심을 것인가.
 

배롱나무와 사과대추나무, 야광나무는 물론 키 작은 친구들이 작은 한옥 좁은 화단에 옹기종기 모였다. ⓒ 황우섭

 
마당을 가꾼다고 하니 가족들은 물론 주위에서도 이것 저것 의견들을 냈다. 다들 어릴 때 마당에 있던 나무와 꽃들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마음속 일순위는 매화였다. 퇴계 선생이 무척 아꼈던 나무이기도 했고, 아버지가 소일 삼아 가꿔오신 과수원의 나무도 매화였다.

여기에 꽃이 오래가는 배롱나무도 심고 싶었다. 한지로 마감한 창문에 비치는 대나무 그림자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대나무도 후보에 올렸다. 꽃나무 후보로는 수국, 철쭉, 장미, 라일락 등등이 올랐다. 키 낮은 꽃으로 수선화와 국화, 패랭이도 심고 싶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화단에 심고 싶은 나무와 꽃이 너무 많아 집 전체를 화단으로 꾸며도 모자랄 판이었다. 그래도 비어 있는 저 좁은 땅에 뭘 심으면 어떤 풍경일까를 떠올리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10여 년 전 만든 책으로 맺은 인연, 전용성 선생님. 아티스트여서 그런 건지, 삽질도 예술이다. ⓒ 황우섭


사실 뭘 심을까 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심느냐였다. 동네 꽃집에서 화분을 사서 들이는 것과 마당에 나무를 심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화분은 동네 꽃집에서 맘에 드는 걸 골라 값을 치르고 집에 가지고 오면 끝나지만, 나무는 사는 것도 일이고 가져오는 것도 일이며 와서 심는 것도 일이다. 나무를 심고 싶다는 마음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나무가 많다는 양재동 화훼단지에 뚜벅뚜벅 찾아가서 골라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SOS를 쳤다. 10년쯤 전에 책을 만든 인연으로 여전히 소식을 주고받고 있는 전용성 선생님이다. 무엇을 보든 본질을 날카롭게 포착해 선택과 집중을 통해 기발하게 한 장의 그림으로 그려내는 이 분의 재치와 감각은 독보적이다. 그 대상이 풍경이든 건물이든 미술작품이든 뭐든 가리지 않는다. 그런 이분이 언젠가부터 나무와 꽃에 심취하시고 정원을 꾸리고 가꾸는 일에 매진하사 스스로 '일흔 넘어 삶의 방향을 다시 찾았노라' 말씀하곤 하셨다.

선생님은 SOS를 받으신 뒤 나의 미완성 한옥을 찾아주셨고, 마당 한쪽 화단의 자리를 가늠해 보셨다. 빛의 방향과 머무는 시간의 양을 살펴보시더니, 옆집에서 마당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져야 한다면 몇 년 정도는 자란 나무여야 한다고 의견을 주시기도 했다.

나무는 묘목일수록 싸고 오래 자란 것일수록 비싸다고 하셨다. 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말이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새로 심은 나무들이 자리를 잘 잡고 겨울을 잘 보내려면 봄에 심는 게 좋겠지만 내년 봄까지 기다리기 싫다면 늦어도 10월 말은 넘기지 않는 게 좋겠다고도 하셨다.

선생님은 내가 심고 싶어 하는 매화나무와 배롱나무는 좋겠다고, 바깥쪽 화단은 관리도 쉽고 일 년 내내 보기가 좋은 거로 황금조팝나무를 권하셨다. 말씀을 듣는 내내 끝없이 고개를 끄덕이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집 안은 물론 집 밖에도 화단을 꾸렸다. 잎이 피고 지고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일 년 사계절의 변화를 만끽할 것이다. ⓒ 황우섭

   

이 꽃나무들이 나와 더불어 부디 새로 자리 잡은 곳에서 뿌리를 잘 내려 잘 살아내길 바란다. ⓒ 이현화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른 아침 꽃시장에 가신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배롱나무는 괜찮은데 오늘따라 쓸만한 매화가 없다고, 대신 사과대추 나무가 괜찮은 게 있노라고, 예산에 맞춰 다른 것들을 좀 더 가져가겠노라고 하셨다.

인생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탓인지, 놀랍게도 그다지 서운하지 않았다. 매화나무가 아니어도 이 집에 들어오는 어떤 나무라도 그냥 다 좋겠거니, 싶었다.

이런 나를 보고 나도 놀랐다. 뭔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지기 일쑤인데 이게 좋은 징조인지 아닌지, 여유로워진 건지, 느슨해진 건지 판단이 잘 안 되긴 했는데 일단 속을 덜 끓이게 되니 마음은 한결 평화로웠다. 나무가 들어오는 날 아침의 평화로운 마음. 일단 시작이 좋았다.
 

바깥에 심은 황금조팝나무를 집 안에도 들였다. 깊어가는 가을의 분위기가 국화 덕분에 집 안에 충만하다. ⓒ 이현화


양재동에서 나무를 심은 트럭이 곧 출발한다는 소식에 내 마음도 바빠졌다. 선생님은 따로 인부를 부르면 배보다 배꼽이 클 테니 이 정도 화단은 그냥 우리끼리 심어보자고 하셨다. 과연 될까, 싶었지만 내 손으로 직접 나무를 심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나무는 심기도 전에 뜻밖의 복병을 만났다. 나무가 도착하기 전에 바닥을 좀 파두면 일이 수월할 것 같다는 나름 기특한 생각으로 삽질을 시작했다. 미리 빌려둔 삽과 호미를 꺼내놓고 목장갑을 끼긴 했으나 평생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작업이 손에 익을 리 만무. 그야말로 한두 시간 동안 '어설픈 삽질'을 해댔다.

그런데 삽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공사 끝난 집 마당 밑에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고. 남의 일이 아니었다. 삽질을 하며 땅을 파내려가다보니 별별 게 다 나오기 시작했다. 검정 폐비닐, 비닐봉투, 전선 자투리, 시멘트와 기와 조각, 잡석, 음료수 캔 뚜껑 등.

잡석은 돌멩이 크기에서부터 혼자서는 들 수 없을 만큼 큰 것들도 툭툭 박혀 있었다. 파내려갈 때마다 단단한 게 나오니 삽질을 할 수도 없었다. 문화재 발굴 현장처럼 무릎을 꿇고 호미로 살살 흙을 퍼내며 안에 파묻힌 것들을 꺼내야 했다. 안 쓰던 몸을 쓰니 힘들었다. 화단이 들어설 자리를 정리하고 나니 저절로 기진맥진해졌다.

어느새 도착하신 선생님은 이런 일이 이미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뭘 이 정도 크기의 화단 가지고 용을 쓰냐며 혀를 차시며 내 손에 든 삽을 쥐셨다. 선생님의 삽질은 역시 남달랐다. 순식간에 화단 자리가 만들어졌다. 때맞춰 나무를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배롱나무와 사과대추나무, 빨간 열매가 예쁜 야광나무가 차례차례 마당으로 들어왔다. 여기에 더해 바깥 화단에 심을 황금조팝나무 화분과 키 낮은 산수국이며 용담 등이 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나무를 직접 심은 건 잘한 일이었다. 내 손으로 흙을 만지고 나무가 들어갈 자리를 만들고 행여 잔뿌리가 상할까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아주는 그 과정이 참 좋았다. 나도 이 집에 사는 건 처음이고, 나무도 이 집에 사는 건 처음이다. 나도 나무도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잘 내리고 살아내야 한다. 지금은 나의 힘으로 나무들이 자리를 잡겠지만 이 땅에, 이 집에 함께 살면서 언젠가는 이 나무들의 생기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날이 있을 것이다.

나무를 심고 그 잎을 즐긴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 어느덧 겨울이 시작됐고, 아파트를 벗어나 한옥에서 보내는 겨울은 생각보다 훨씬 추웠다. 대문에서 중문을 지나 마당을 통과해야만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얼마나 낯선 일인지 말도 못 한다. 그때마다 화단에서 잎을 떨구고 어느새 빈 가지만 늘어뜨린 나무들이 눈에 밟힌다. 조금이라도 한기를 덜어주고 싶어 방풍 비닐을 둘러씌우며 너만 추운 게 아니라고, 우리 함께 이 곳의 첫 겨울을 잘 보내보자고 말을 건넨다.

내가 내 손으로 심은 나무들과 더불어 가을을 지나 어느덧 겨울이다. 집은 그사이에 조금씩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사진을 찍은 황우섭은 주로 인물과 건축물을 찍는다. 사람도 건물도 기교와 치장 대신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는 걸 좋아한다. 오래된 것에 집착하고, 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것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산티아고 순례와 나오시마 여행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긴 단행본이 국내에 출간됐고, '조병수 건축사무소'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찍은 사진이 영국 'Thames&Hudson'에서 펴낸 조병수 건축가의 작품집 의 표지 및 본문에 실렸다. 이 글은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hyehwa11-17)에도 게재됐다.
#작은한옥수선기 #혜화1117 #황우섭 #작은집고치기 #도시형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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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을 오래 했다. 지금은 혜화동 인근 낡고 오래된 한옥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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