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아버지의 생애가 아프다

[서평] 특별하지 않은 삶들의 역사를 찾아서... <시시한 역사, 아버지>

등록 2019.01.22 12:03수정 2019.01.2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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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50대 중년 세대는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 모르거나 혹은 알더라도 아버지와 공유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불러온 한국전쟁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구호 속에서 조국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뤄낸 일꾼으로 치켜세워졌다. 그러나 전쟁 중에 국가의 잘못으로 억압당했던 개인의 억울함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비극은 한국전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북한이 어린 소년을 인민의용군으로 강제 차출하지 않았다면, 남한이 꿈꾸던 청춘을 가혹하게 멸시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전쟁이 발발했을 때 경기상업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가족을 대신해 인민의용군으로 강제 차출 당한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총 한 번 쥐어보지 못한 채 미군 포로가 됐고, 조사를 통해 민간인 억류자로 분류됐다. 그러나 한국군은 그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1년이 넘게 감금해둔 채 강제노역을 시켰고, '부역자' 꼬리표를 붙여서 석방했다.


'부역자' 꼬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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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한 역사, 아버지> 표지 ⓒ 유리창

 
전쟁 중에 석방된 아버지는 한동안 숨어 지내야 했으며, 휴전이 된 후에 우여곡절을 거쳐 학교에 복학하고 졸업을 했다. 당연히 은행원이 될 줄 알았지만 국가가 낙인찍은 '부역자' 주홍글씨는 회사원도 공무원도 될 수 없도록 젊은 청춘의 꿈을 막았다.

결혼 후에도 사실을 말할 수 없었던 그는 군대에 다녀오면 해결될 수 있다는 주변의 권유로 일말의 희망을 품고 국군에 자원입대를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삶은 고향에서 농사꾼으로 머물러야 했다.
 
"내가 태어날 때 서른한 살이던 아버지는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늘 화가 나 있었다.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농사꾼답지 않게 늘 뉴스를 듣고 신문을 정독했으며 틈나는 대로 붓글씨를 썼다."

"사법고시 봐서 판검사 되면 좋겠지." 아버지에게 고향 사람들은 똑똑한 아들에 대한 칭찬과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당한 모멸의 한(恨)을 자식을 통해서 보상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떠난 저자는 중학생 때부터 도시에서 자취를 하느라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신문을 제작하고 운동권 언저리에 머물던 1980년대 무렵, 저자는 아버지의 위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됐고, 완치 판정을 받았다.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후, 이번에는 아버지의 몸에서 담낭암이 발병했다. 수술을 했지만, 1년 뒤 복막 전체로 암이 전이돼 회복 불가라는 판정을 받는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 저자는 한 사람의 생애 행적을 기록하는 '행장(行狀)'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행적을 찾아가기로 한다. 세상이 기억할 만한 업적을 남긴 아버지가 아닐지라도.
 
"눈을 감고 가만 생각해보니 아득해졌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왔다는 것 말고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나. 내 '아버지'라는 세 글자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마음이 급해져 시골집으로 달려갔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애

한국전쟁이 관통한 비극적인 시대에 남과 북의 국가폭력으로 부역자가 된 청춘의 아버지들은 자신의 삶을 꿈꿀 수 없었다. 국가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도 침묵했는데, 포악한 국가폭력은 그 자식들까지 '연좌제'의 사슬로 묶어놓지 않았던가.


전쟁 중에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치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권력자는 하야로 쫓겨났다. 반공을 국시로 공포정치를 한 독재자는 부하의 총탄으로 삶을 마감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외친 광주 민중들은 국가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 격동의 현대사를 겪은 아버지들은 자신이 당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나서지 마라, 가만히 있어라'라고 말한다. 한국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상흔은 지금까지 우리사회 곳곳에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비극의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를 둔 자식들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만한 아픈 가족사를 가슴에 묻으며 살아가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아버지도 비슷한 생애를 살아 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저자는 이 책이 평범한 사람들의 생애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애가 모여 역사가 된다. 그러나 역사에서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생애는 지워진다. 국민을 돌봐야 할 국가의 의무도 방기된다. 시시한 삶이어서 그렇다. 시시한 아버지 생애가 아프다."

시시한 역사, 아버지

우일문 지음,
유리창, 2019


#행장 #아버지 #한국전쟁 #거제도 #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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