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혜나 말고 감수성을 집에 들이십시오

[프로딴짓러의 일기] 아이도 어른도 성장하는 'SKY 캐슬'... 공감 능력이 필수인 사회 꿈꾸며

등록 2019.01.25 15:57수정 2019.01.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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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위한 의미있는 '무엇'이 필요한가요? 계간지 <딴짓>의 발행인인 프로딴짓러가 소소하고 쓸데없는 딴짓의 세계를 보여드립니다. "쫄지 말고 딴짓해!" 밥벌이에 지친 당신을 응원합니다.[편집자말]

극중에서 '김주영 스앵님'을 연기하는 배우 김서형(사진은 JTBC 드라마 'SKY 캐슬' 스틸컷) ⓒ JTBC


JTBC 드라마 < SKY 캐슬 >(이하 <스카이 캐슬>)이 하도 재밌다고 해서 넷플릭스로 보기 시작했다가 밤새 정주행하고 말았다(오랜만에 느끼는 영상의 단맛! 짜릿해! 늘 새로워!). 영상을 하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꿈에서도 '김주영 스앵님'이 나왔다. "어머님, 혜나를 집에 들이십시오."
      
케이블 드라마 중 역대급 시청률이라고 하니 <스카이 캐슬>에 대한 리뷰와 해석이 쏟아질 만했다. 대한민국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 계급사회에 대한 일침!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요즘 '공감'의 키워드에 관심이 있는 내겐,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성이 아니라 공감'이라는 메시지가 읽혔다. 지성의 가치에 함몰된 캐슬 사람들이 공감의 세계로 발전해 나가는 성장 스토리랄까.  

'지성'은 '돈'이나 '권력'과 마찬가지로 추앙받는 가치다. 심지어 돈이나 권력보다 우아한 것처럼 보인다. '돈 많이 벌고 싶다'라는 문장을 입밖에 내지 않는 교양 있는 사장님이라도 '아는 것이 힘이다'라며 프랜시스 베이컨을 들먹거리는 건 자랑스러워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잘 측정된 지성(그러니까 수능)은 돈과 권력을 위한 필수 코스가 아닌가. 지성을 '측정'하려는 게 문제인지, 측정을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하려고 해서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학생이나 어른이나 '지성'을 숭배한다. 나도 그렇다. 각 분야에 대한 박학다식함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그런 지성에 대한 갈증 때문이 아닐까.  

지성이 아니라 공감

극중에서 강준상(정준호)이 이십 년도 더 됐을 '학력고사 만점' 타이틀로 아직도 어깨를 으쓱거릴 수 있다는 점, 차민혁(김병철)이 리처드 도킨슨이나 마키아밸리의 저서를 독서 토론의 주제로 잡으며 잘난 척 할 수 있다는 것도 지성이 가진 사회적 힘을 대변한다. 그 옛날, 학력고사 만점을 받았다고 아직도 자랑하는 대학병원 의사라니. 웃픈 이야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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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염정아)은 둘째 딸 강예빈의 도둑질의 원인을 물어보지 않는다. (사진은 JTBC 드라마 'SKY 캐슬' 스틸컷) ⓒ JTBC


그러나 돈과 권력뿐 아니라 '지성'마저 갖춘 캐슬 사람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 공감 능력이다. 같은 반 친구(혜나)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예서는 별로 공감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서진(염정아)은 둘째 딸 강예빈의 도둑질의 원인을 물어보지 않는다. 죄 없는 이웃(우주)의 누명을 벗게 도와줘야 하는 때에도 한서진은 자기 딸 대학 진학이 먼저다.  

공감 능력은 지성과는 다르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타인의 기쁨에 함께 공명하고, 모르는 사람의 비극에 함께 슬퍼하는 것도 훈련을 통해 배우는 일이다. 공감 능력은 사회화의 기본이다. 무식하다는 말에는 발끈 화를 내면서, 감수성이 떨어진다는 말에는 타격을 받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야만성을 세상에 전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백하건대 나는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스스로 의심한 적이 많았다. 남들이 다 슬프다는 이야기에 눈물이 안 났고, 열정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화를 내는 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드는 일인데, 왜 저렇게 화를 낼까'라며 팔짱 끼고 지켜볼 때도 있었다.

서른이 넘은 지금, 나는 십 대나 이십 대의 나보다 감수성을 갖춘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다). 혐오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혐오를 전시하는 사람들을 혐오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비극적 사건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지난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날, 손석희 JTBC 대표이사는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 코너에서 "기억은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자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라고 말했다. 수전 손택이 쓴 <타인의 고통>의 한 구절이다.

공감 능력이 존중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혐오'가 판을 친다. '자식들 교통사고 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 난리야.' '외국인들이 자꾸 들어오니까 강간 사건이 생기지.' '페미니즘은 못생기고 뚱뚱한 애들이 남자 못 사귀어봐서 하는 거 아냐?'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타인의 슬픔에 공명하지 못한다. 비극은 유리벽 너머 벌어지는 나와 상관없는 무엇이다.

<스카이 캐슬>은 성장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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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간 예서가 <이기적 유전자>와 <군주론> 같은 책 대신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끼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진은 JTBC 드라마 'SKY 캐슬' 스틸컷) ⓒ JTBC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미성숙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감수성'이나 '인권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나와 다른 사람과 한 사회에서 섞여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처 주지 않을 만큼 조심해야 한다.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가 들어올 때마다 서로의 거리를 조금씩 조정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까? 이 말에는 편협한 나의 시각이 담겨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이 행동에 깔린 특권의식은 무엇일까? 캐슬 사람들의 대화에서 특권의식이 담긴 말을 찾으라고 한다면, 일 분에 한 번씩 영상을 멈춰야 할 것이다.

나 자신을 감시하는 과정이 결코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거리에서 쏟아내는 말들, 인터넷 기사에 다는 댓글, 누군가에 대한 시선과 나도 모르는 감탄사까지. 스스로를 치열하게 감시한다고 해도 어디선가 미끄러질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게 아닐까. '공감 능력 결여'는 '지성의 부족'만큼이나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에 대한 보편적 인정. 서울대에 가는 건 대단한 일이고, 서울대에 가기 위해 억울한 친구의 누명을 벗기지 않는 일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 되는 사회에서 벗어나는 것. '감수성'이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갖추어야 할 덕목이 되는 것.  

<스카이 캐슬> 정주행 후 퀭해진 눈으로 19화(1월 26일 방영 예정)를 기다린다. 캐슬 사람들은 지성에서 발전해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한서진은 우주의 누명을 밝히는 데 동의하게 될까? 아이와 어른이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스카이 캐슬>은 진정 성장드라마다. 대학에 간 예서가 <이기적 유전자>와 <군주론> 같은 책 대신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끼고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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