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물건 계속 쓰기, 돈 말고도 얻은 것들

[최소한의 소비 13] 절약은 포기가 아니라 다른 욕망을 채우는 일

등록 2019.01.26 14:17수정 2019.01.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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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나도 버리지 않습니다


아이의 잠옷 지퍼가 고장 났습니다. 한 번 아귀가 틀어지니, 지퍼가 제 할 일을 못 하게 돼 버렸어요. 더 이상 곤히 잠든 아이의 배를 제대로 덮어주지 못하는 잠옷. 이 녀석을 어찌하면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단추를 달아야겠다 마음 먹었습니다.

고장 난 지퍼에 박음질 된 실을 칼로 살살 긁은 후, 우두둑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퍼를 뜯어냈습니다. 그 자리에 똑딱이 단추를 달고, 풀린 솔기를 홈질로 메웠습니다. 누가 봐도 정성만 잔뜩 느껴지는 어설픈 잠옷이 탄생했지요.

고장 난 물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발목 부러진 빨래 건조대입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음새는 5년이 지나니 제 구실을 못 하게 됐습니다. 그 탓에 건조대 양쪽 축이 중심을 잃었습니다. 다 된 빨래를 널기 위해 급한 대로 베란다 창문에 살짝 기대 썼습니다. 그러기를 한 달. 불편하지 않더군요. 건조대는 여전히 어른 둘, 아이 둘 빨래를 건사하고 있지요.

저희 부부는 새로 사기보다, 저 녀석이 제 몫을 다 해낼 때까지 써 보자 다짐했습니다. 빨래를 널 수 있다는 건조대의 본질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죠. 동시에 큰 짐을 버리면 환경에 부담을 줄 테니까요. 정근수당에 명절 보너스까지 두둑한 1월이지만, 2만 3천 원짜리 6단 빨래 건조대를 새로 들이지 않았습니다.
 

고장나면 고쳐씁니다. ⓒ 최다혜

  
포기하지 않고 채우는 절약

1시간 동안 실과 바늘로 아이 잠옷을 수선하면 무척 수고롭습니다. 빨래 건조대를 창문에 기대어 중심을 잡는 일거리도 늘었지요. 고장난 물건을 버리고 새 물건을 산다면 노동력을 줄일 수 있습니다. 돈은 편리함을 갈망하는 우리의 욕망을 쉽게 채워줍니다.


반대로 최소한의 소비를 실천하는 삶은 언뜻 욕망을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절약은 사고 싶은 물건을 참는 대신 돈을 모을 수 있는 일로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 좀 덜 모으더라도 편하게 쓰며 살자는 의식이 팽배한 듯합니다.

고백하자면, 저 또한 돈을 좀 더 모으고 싶어 절약을 시작했습니다. 낡은 운동화를 감추고 싶은 날에는 '이렇게까지 해서 돈을 모아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헤집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덜 쓰는 삶을 살면서 경제적으로만 숨통 트인 건 아니었습니다. 물건에서 얻던 욕망을 다른 방향으로 다시 채울 수 있었습니다.

먼저 시간을 얻었습니다. 2년 약정이 지난 스마트폰이 여전히 잘 작동하기에 요금 할인받으며 썼더니, 외식 줄이고 집밥 먹었더니, 키즈카페 대신 도서관에 갔더니, 한 달 유지비가 적게 들었습니다. 일상에 큰돈 들지 않는 덕에 1년 더 일을 쉬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휴직 연장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건 한 달 생활비 220만 원으로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과하지 않은 생활비로도 삶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후회하지 않습니다.
 

키즈카페 대신 근처 시립 미술관으로 갑니다. 덜 쓰는 여가 생활도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 최다혜

 
다음으로 할 줄 아는 일이 늘었습니다. 돈으로 바꾸던 일을 스스로 해 보자 마음먹었지요. 카페에 가지 않는 대신, 남편에게 핸드 드립을 배웠습니다. 집 근처 로스팅 카페에서 원두를 사서 직접 내려 마시기 시작했어요. 얼린 딸기 방치하기 아까워 잼 만드는 법을 인터넷으로 배워 만들었습니다.

5살 딸을 위해 이른 사교육 대신 홈스쿨링을 시작했습니다. 찬물에 커피 알갱이를 녹여 '가나다'를 붓질하고, 장미 꽃잎 짓이겨 말간 꽃물로 '라마바'를 썼습니다. 수족구 걸려 입안이 헐어버린 아이들에게 죽을 사주지 않고 직접 쑤어 먹였습니다. 전복죽, 닭죽, 팥죽. 죽집 아니면 죽 못 쑬 줄 알았는데, 드디어 저도 웬만한 죽을 척척 만들 수 있게 됐지요.

전문가만큼 훌륭하진 않겠지만, 커피와 잼, 집밥 그리고 아이 교육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전문가 의존도를 낮추고 자존감을 높였습니다. 할 줄 아는 일이 늘어가니까, '나도 어쩌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라는 수줍은 기쁨이 솟았습니다.

자립의 낭만을 배우다
 

커피 알갱이 녹여 한글 공부를 합니다. ⓒ 최다혜

  
마지막으로 지구에 부담을 주지 않으며 산다는 위안을 얻었습니다. 쉽게 사고 버리는 편리한 일상은 지구에 흔적을 남깁니다. 기후변화와 미세먼지로 지구가 홍역을 치를 때마다 화석연료 사용과 쓰레기를 줄여야겠다며 다짐했습니다. 결국 '절약'과 일맥 상통하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덜 쓴다는 건, 탄소 배출 절감을 의미했습니다.

발목 부러진 빨래 건조대를 쓰고, 여유 있는 날에 청소기 대신 비질을 했습니다. 최선의 환경 보호는 못 되지만, 차선은 된다는 마음으로 따뜻한 절약을 실천 중입니다.
 

묵혀둔 빗자루를 꺼내 씻었습니다. 청소기 대신 비질을 시작했습니다. ⓒ 최다혜

  
절약 노력가로 입문한 지 3년째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얄팍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절약은 욕망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란 겁니다.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TV를 안 사는 대신 두 딸과 장미 꽃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유를 얻은 것처럼 말입니다.

기술은 발전하고 먹거리는 풍요로워졌지만, 우리가 잃고 있는 무언가는 없는지 돌아볼 시점입니다. 잃어버린 시간, 전문가 의존을 줄여도 살아낼 수 있는 능력, 지구 환경. 이것들은 절약으로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채우는 절약, 꽤 매력적이지 않으신가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un0421)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최소한의소비 #절약 #자발적불편함 #간소한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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