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정치멘토' 김현장은 왜 한국당을 지지하게 됐을까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사회고발 르포작가 → 부미방 배후 → 박근혜·황교안 지지선언

등록 2019.01.28 15:55수정 2019.01.2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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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 '자신이 사형 구형했던 반미 좌파 김현장을 정치 멘토로'. ⓒ 중앙일보PDF


황교안 전 국무총리에게 당권 및 대권 도전을 권유했다는 인물이 지난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의 배후 조종자로 알려진 김현장씨가 그 주인공. 김씨가 황 전 총리의 정치 멘토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를 지원 혹은 묵인한 것을 계기로 반미 감정이 확산되면서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1980년 12월 9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1982년 3월 13일), 서울 미문화원 방화사건(1985년 5월 23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미국 정부가 한국민의 저력을 재평가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1987년 6월항쟁 때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군대 동원을 저지하는 원인 중 하나로도 작용했다.

1950년 전남 강진에서 출생한 김현장씨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때 문부식·김은숙·이미옥·최인순·김지희·류승렬·최충언·박원식을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1983년 3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확정받았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당시 선고에 참여했던 판사 중 하나가 이회창 대법관이었다. 7일 뒤 무기징역으로 특별감형된 김현장씨는 6월항쟁 이듬해인 1988년 12월 21일 가석방됐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을 구형받을 당시의 김현장씨(위). 아래쪽은 문부식씨. 1982년 8월 2일치 '경향신문'. ⓒ 경향신문

  
그 뒤 김현장씨는 1989년 1월 21일 출범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의장 이부영)에 합류해 국제협력국장 직을 맡았다. 하지만 해외 운동권과 연락을 주고받은 사실이 드러나 출소 9개월 만인 198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때 만난 검사가 바로 황교안 전 총리다.

"황교안, 깨끗한 검사란 느낌이 들었다"
 
지난 23일 <중앙일보>가 게재한 기사 '황교안 정치멘토는 자신이 사형 외쳤던 반미좌파 김현장'에 따르면, 김현장씨는 강찬호 <중앙일보> 논설위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황교안을 처음 만난 건 내가 1989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출소 6개월 만에 재구속됐을 때였다. 남산 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에서 20일 넘게 고문받다가 검찰로 넘겨졌는데, 담당 검사가 황교안이었다.

분위기가 안기부 요원들과는 확 달랐다. 존댓말을 쓰며 사람으로 대해줬다. 내게 사형을 구형할 때도 부끄러워하며 낯을 붉히는 모습을 보였다. 깨끗한 검사란 느낌이 들었다."
 
국제협력'위원장'이라는 표현과 '6개월 만에 재구속'이라는 표현은 기억의 오류로 보인다. 황교안 검사가 사형을 구형했다는 회고도 당시 언론보도와는 다르다. 일례로 1990년 2월 8일 자 <한겨레신문>은 "서울지검 공안2부 황교안 검사는 7일 한통련·유럽민협 등 해외 단체와 범민족대회 관련 자료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된 전민련 국제협력국장 김현장씨(40)에게 국가보안법의 국가기밀누설·회합통신·금품수수죄 등을 적용,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다"라고 보도했다.
 
김현장씨는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형기를 다 채우지 않았다. 1993년 3월 석방됐다. 미문화원 사건으로 6년 살고 나온 뒤 얼마 안 있어 재수감돼 4년을 더 살았으니, 운동권 경력을 감안해도 인생역정이 꽤 파란만장했다. 
 
성장 환경 역시 그랬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휘발유통을 들고 건물에 뛰어든 김은숙씨의 저서 <불타는 미국>에 따르면, 김현장씨 집안은 학교 설립에 7만 평을 희사할 정도로 강진군 제일의 유지 가문이었다고 한다. 김현장씨의 언급을 기초로 서술됐을 이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출생한 1950년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원인이 돼 자신의 출생 이후로는 집안이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그래서 스물세살 때 입대하기 전까지 그는 한편으로는 학업을 하고, 한편으로는 생계 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연탄 장사, 술집 직원 겸 색소폰 연주자, 건축 노동자, 탄광 노동자 생활도 했다고 한다. 배가 고파 강도 행위를 했다가 집행유예로 석방된 적도 있다고 한다.

'박흥숙 사건' 알린 르포작가에서 부미방 배후로

그 뒤 그는 르포작가로 변신해 사회문제 고발에 나섰다. 조선대학교 금속공학과 재학 중에 병행한 일이다. 27세 때 그가 터트린 특종은 광주 무등산에서 강제철거에 맞서다가 철거반원들을 죽인 박흥숙 사건(1977)이다. 집에 불을 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철거반원들과 싸우다가 21세 된 박흥숙씨가 저지른 사건이다.
 
박흥숙씨는 1980년 12월 24일 사형집행을 당했지만,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동정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 작가가 바로 김현장씨다. 그는 월간 <대화> 1977년 8월 호에 박흥숙씨에 대한 기사를 써, 기존 언론과 정반대 시각으로 사건의 진실을 알렸다. 이때 관심을 보이며 구명운동에 나선 인물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다.
 
김현장씨는 5.18 당시에는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작성, 문정현 신부 등의 도움으로 1만 장을 배포했다. 이로 인해 수배를 당하고 강원도 원주에 피신했다. 이때 벌어진 사건이 바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다.
 

지금은 부산근대역사관이 된 부산 미국문화원. ⓒ 위키백과

   
김현장씨는 1981년 12월 28일 기생 관광 실태를 조사할 목적으로 부산에 방문했다. <불타는 미국>에 따르면, 이때 문부식씨 자취방에 짐을 푼 게 계기가 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이 될 대학생들과 인연을 맺게 됐다.

김현장씨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무관했다는 관련자들의 주장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가 미문화원에 대한 궐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 역시 자신의 가담 정도를 제한적으로 설명한다. 1994년 1월호 <사회평론 길>에 실린 '김현장 선배가 증언하는 광주와 부미방 사건'에 따르면, 그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에서 저는 원칙만 제시하고 방법에 대해서는 함구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또 "저는 사실 문화원을 사전 답사하며 옆에 놓인 프로판가스나 좀 이용해볼까 했었는데, 역시 후배들의 머리가 진보적이고 발전적이더군요"라고 언급했다. 후배들이 휘발유통을 들고 뛰어드는 방안을 실행한 것에 대한 감탄의 표시였다.

1997년 이회창 지지선언... 그의 인생역정에 변화가 시작됐다
 
1982년, 1989년에 수감되는 등 민족주의 운동으로 고난을 치른 것과 상반되는 일들이 1990년대 후반부터 그의 인생궤적에서 나타났다. 1997년 대통령선거 때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지지한 게 그 시작이다.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그 대법관을 지지한 것. 2005년 4월 6일 치 <신동아> 인터넷판에는 이런 글이 있다.
 
"지난 1997년 12월 중순, 대통령선거를 1주일 앞둔 어느 날 김현장씨가 돌연 시사 주간지 인터뷰 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의 제목은 '그분만이 지역감정 극복할 대안.' 인터뷰에서 김씨는 '지금은 지역감정으로 선거를 치를 때가 아니다. 완벽한 카드는 아니지만 세 분(이회창·김대중·이인제 세 후보) 가운데서는 이회창 후보가 차선으로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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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김현장씨 박근혜 지지선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사형집행을 기다리다 특별사면된 김현장씨가 2007년 8월 16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대선예비후보인 박근혜 전 대표 선거사무실에서 박 전 대표 지지선언을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10년 뒤, 그의 정치 행보는 한 발 더 나아갔다. 2007년 8월 16일, 김현장씨는 박근혜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 천명했다. 그것도 박 후보 사무실에서. 그 날짜 YTN 인터넷판은 당시를 이렇게 보도했다.
 
"김현장씨는 오늘 서울 여의도 박근혜 후보 선거사무소에서 '국가가 혼란에 빠질수록 상대적으로 정직한 지도자를 뽑지 않으면 안 된다'며 박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습니다."
 
김현장씨가 보수 후보를 지지하는 데 명분을 제공한 것이 있다.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 평화민주당(평민당) 후보 대신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사실이다. 김대중·김영삼이 단일화해서 노태우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에 맞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을 당시, 김현장씨는 수감 중이었는데도 김영삼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 2005년 <신동아>에는 이런 사연이 소개돼 있다.
 
"지난 1987년 대선 때 지역 유세를 하던 YS(김영삼)는 청주에 들러서 당시 청주교도소에 있던 김현장씨를 거론하며 '청주교도소에 수감된 민주투사 김현장씨도 나를 지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김영삼을 지지한 이유에 대해 김현장씨는 1994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사회평론 길>에 실린 대목이다.
 
"27년의 군부 통치를 종식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과도기에 적합한 인물은 사실 김영삼씨라고 생각합니다. 만만하거든요. 또 한 가지, 김대중은 당에 대한 경험이 부재합니다. 군부를 다스린 경험도 없어요. (중략) 김대중씨는 사상가입니다. 그의 사상은 고난의 산물임도 인정합니다. 고난을 받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기다릴 줄 알았어야 합니다."
 
김영삼 역시 군부를 이끈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군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김대중을 지지할 수 없다는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보다는 '김영삼은 군부 통치를 종식시킬 만한 강력한 인물인 데 반해, 김대중은 상대적으로 연약한 이미지를 풍기는 사상가'라는 판단이 김영삼을 지지하고 김대중을 비토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김현장씨 입장에서는, 자신이 지지했던 김영삼이 노태우·김종필과 함께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을 결성했으니, 민자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선 이회창·박근혜를 지지하는 것은 명분상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뒤 그는 훗날 박근혜 정권 아래서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촉위원과 한국광물자원공사 상임감사를 지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황교안 전 총리를 지지하고 나섰다. 단순한 지지에 그치지 않고 '정치 멘토'까지 자처하고 있다.

사드 정국 때는 "민주당 철부지들에게 안보를 맡겨야 한다니"
 
김현장씨 인생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는 미국에 대한 태도 변화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 그는 찬성 쪽에 섰다. 반대론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싣기도 했다. 2016년 8월 30일 자 <국제뉴스>에 실린 '반대에도 국적이 있다'라는 기고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사드에 대한 의견 청취 목적으로 8일경 중국을 방문한다고 한다. 초선 의원들이 주도적으로 방중을 기획했다니 가관이다. 이런 철부지들에게 우리 목숨이 달린 안보를 맡겨야 한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고위직 인사들의 이런 행동은 매국과 같다."
 
반미를 매국과 연결했다. 보수 정치인에 대한 지지나 미국에 대한 태도 변화를 보면서 그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정치학자 한스 위르겐 아이젠크(Hans Jürgen Eysenck, 1916~1997)의 시각에서는 이해될 만한 여지도 없지 않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영향을 미친 것도 그렇고, 보수 후보들을 지지한 것도 그렇고, 김현장씨한테서는 '강성'이라는 이미지가 일관되게 드러난다. 김영삼을 지지한 이유도 강력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회창한테서도 비슷한 이미지가 드러난다. 박근혜의 경우에는, 아버지 박정희한테서 그런 이미지가 드러난다. 황교안 역시 강경 이미지를 갖고 있다.
 
아이젠크는 1954년에 펴낸 <정치심리학>(The Psychology of Politics)에서 정치 성향의 변화를 좌우하는 것은 '개인의 성격'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론을 도식화한 게 아래 표인데, 표에서 위로 가면 갈수록 강경한 성격의 보유자이고(A 및 A1), 아래로 가면 갈수록 유순한 성격의 보유자다(B 및 B1). A와 A1의 차이는 진보냐 보수냐에 있다. B와 B1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김현장의 극적 변화? 아닐 수 있다
 
 

아이젠크의 이론. ⓒ 김종성

 
 
아이젠크에 따르면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는 모두 다 강경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유순한 성격이다.

공산주의자가 파시스트로 전향하는 것은 외형상으로는 극좌에서 극우로의 변신이라고 이해하기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아이젠크에 따르면, 양자 모두 강경한 성격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므로 이런 변신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념적으로 보면 극좌에서 극우로의 변신이지만, 성격적으로 보면 동일한 강성 내에서의 이동일 뿐이라는 것. 그 때문에 이런 변신이 행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반면, 공산주의자가 자유주의자로 전향하는 것은 힘들다고 분석한다. 강경한 성격이 유순한 성격으로 바뀌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B와 B1 사이에서는 전환이 이뤄질 수 있어도 A 구역과 B 구역 간 변화는 이뤄지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정리하면, 한 개인의 일생에서 이념이 바뀌는 일은 일어날 수 있어도 성격이 바뀌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 진보와 보수 사이에는 전향이 이뤄질 수 있지만,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는 전향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젠크 이론에 따르면, 김현장씨의 극적인 변화는 사실 극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 강경한 성격의 보유자인 그의 입장에서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영향을 미친 것과 황교안 후보를 지지하는 건 별 차이가 없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미운동가가 친미 성향으로 돌아서고, 보수 정치인의 멘토가 됐으니 상당한 부담감을 떨치기는 힘들어 보인다.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김현장씨는 "수시로 그(황교안)에게 전화해 옆구리를 쑤셨다"라면서 "당신이 검사할 때 사형(실은 10년 구형) 때린 사람이 대통령을 하라면 이유가 있는 거다라고 설득을 거듭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황교안 전 총리가) 용기가 생겼는지 (정치) 준비를 하더라"라고 언급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제휴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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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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