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엿에다 돌담, 고택까지... 멋짐이 꽉 찬 담양 창평

월봉산 상월정과 고광순 기념관을 찾아서

등록 2019.01.29 14:52수정 2019.01.2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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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방식대로 만든 창평 쌀엿. 설날을 앞두고 창평에서 쌀엿 만들기가 한창이다. ⓒ 이돈삼

 
'슬로시티' 담양 창평에 갔다. 돌담길을 따라 슬렁슬렁 걷다가 쌀엿을 만드는 집에 들렀다. 모처럼 쌀엿 만드는 모습을 보고, 엿도 얻어먹었다. 엿을 먹고 나오면서, 문득 '엿 먹어라'는 말이 떠올랐다.

1964년, 서울의 중학교 입시의 자연 과목 시험이었다. 엿을 만드는 데 엿기름 대신 쓸 수 있는 것을 묻는 문제가 나왔다. 답이 두 개였다. 그런데 교육당국이 하나를 오답처리하면서 학생과 학부모의 반발을 샀다.


학부모들이 오답 처리된 무즙으로 엿을 만들어 학교에 붙이고 시위를 했다. '엿이나 먹어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당시 신문에도 보도가 됐다. 문제는 결국 소송으로 이어졌고, 두 개의 정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1점 차이로 불합격된 학생들이 구제됐다.
  

창평의 한 민가에서 쌀엿을 만들고 있다. 창평쌀엿은 한과, 장류 등과 함께 슬로시티 창평을 대표하는 슬로푸드다. ⓒ 이돈삼

   

창평쌀엿. 엿 속에 송송 뚫린 구멍이 쌀엿을 바삭바삭 더욱 맛있게 해준다. ⓒ 이돈삼

 
엿이 '여시' 같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엿을 만들 때,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아서 갱엿을 밀고 당기면서 늘인다. 이때 잠깐의 찬바람에도 엿이 금세 알아차리고, 늘었다 줄었다 한다는 것이다. 찬바람이 들어오는 걸 여시처럼 알아챈다고, '엿'이라 했다는 얘기다.

엿치기도 추억 속의 놀이였다. 기다란 엿을 서로 부딪쳐서, 그 안에 난 구멍의 크기를 비교하는 놀이다. 구멍이 큰 엿을 가진 사람이 이겼다. 엿의 생명은 구멍이란 말이 나왔다. 사실 엿은 속에 구멍이 있어야 보기 좋고, 바삭바삭 맛도 좋다. 입안에도 잘 달라붙지 않는다.

쌀엿은 식혜로 만든다. 먼저 겉보리로 엿기름을 만들고, 햅쌀로 고두밥을 지어 섞어서 식혜 밥을 만든다. 식혜 밥을 숙성시켜 즙을 짜내고, 이것을 가마솥에 달이면 조청이 된다. 조청을 밤새 달이면, 짙은 주황색의 갱엿이 된다. 이것을 두 사람이 맞잡고 밀고 당기며 늘여서 하얀 엿을 만든다.
  

담양 창평에 있는 춘강 고정주 고택. 을사조약 이후 월봉산 자락 상월정에 학당을 개설한 인물의 옛집이다. ⓒ 이돈삼

   

담양 창평 용운마을의 돌담. 상월정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마을이다. ⓒ 이돈삼

 
담양 창평은 쌀엿만 유명한 게 아니다. 마을의 돌담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돌담의 길이가 모두 10리 남짓 된다. 오래 된 기와집과 조화를 이뤄 전통마을의 가치를 높여주는 돌담이다.

고택도 멋스럽다. 전형적인 일자형의 고재선가옥, 전통 사대부의 집인 고재환가옥, 솟을대문이 압권인 고정주가옥도 다 아름답다. 개방되지 않아 들어가 볼 수 없는 게 흠이다. 한때 독일인 베르너 삿세와 빈도림이 살았던 고재욱가옥도 방치돼 있다.

삼지내마을에서 발걸음을 용운리와 유천리로 돌린다. 목적지는 상월정과 고광순 기념관이다. 상월정은 산속의 공부방이자 고시원이다. 용운마을에서 2㎞ 가량 떨어져 있다. 월봉산 자락 암자 터에 1457년 김자수가 지은 정자다.
  

월봉산 자락 상월정. 1900년대에 개설된 산속 공부방이자 고시원이다. ⓒ 이돈삼

   

정면 4칸, 측면 2칸의 상월정. 가운데 방은 공부하는 교실로, 양쪽의 방은 잠을 자는 공간으로 쓰였다. ⓒ 이돈삼

 
당시 규장각 직각(국립중앙도서관장)으로 있던 춘강 고정주가 인재를 키우려고 여기에 학당을 개설했다.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1905년 을사조약 직후였다. 영어를 가르쳤다고 '영학숙', 이듬해에 창평을 흥하고 의롭게 할 곳이라고 '창흥의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 창평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당시 영어와 국사, 한문, 산술 등을 가르친, 시대를 앞선 공부방이다. 1906년 개교한 광주 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인 광주보통학교와 시기를 같이 한다. 중학 교과과정에서 처음 영어를 가르친 숭일학교가 문을 연 게 1907년이다. 여기보다도 먼저 영어를 가르쳤다.
 

용운저수지 제방에서 내려다 본 창평면 전경. 상월정으로 가는 길목에서다. ⓒ 이돈삼

   

상월정으로 가는 숲길. 소나무와 편백이 우거진 숲 사이로 임도가 다소곳이 나 있다. ⓒ 이돈삼

 
영학숙에서 고하 송진우, 가인 김병로, 인촌 김성수, 심강 고재욱이 공부했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기, 국회의원을 지낸 고재청·고재일도 여기서 공부를 했다. 창평을 '인물의 고장'이라 하는데, 상월정이 그 산실이었다.

상월정으로 가는 길도 잘 닦여 있다. 구두를 신고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숲길이 좋다. 험하지도 않다. 당시 산속으로 공부하러 오가던 학동들의 마음가짐으로 찾아가면 더 흥미롭다. 
 

임진왜란 때 의병 참여를 호소하는 제봉 고경명. 광주 포충사에 그림으로 걸려 있다. ⓒ 이돈삼

   

광주 포충사의 충노비. 제봉 고경명을 따라 의병에 참가한 하인을 기리는 비석이다. ⓒ 이돈삼

 
고광순 기념관은 유천리에 있다. 녹천 고광순은 광주 포충사에 모셔진 제봉 고경명의 12대 후손이다.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금산전투에 참가했다가 차남 고인후와 함께 순절했다.

창평에 살고 있던 장인 이경이 고인후의 시신을 거둬 묻어줬다. 고인후의 네 아들(외손자)도 데려다 키웠다. 지금 창평에 살고 있는 장흥고씨의 시조다. 임진왜란 때부터 한말까지 제봉 고경명 집안에서 9명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직했다. 남다른 충성심과 의협심을 지닌 가문이다.
  

담양군 창평면에 있는 녹천 고광순 기념관. 한말 의병장인 고광순을 기리는 공간이다. ⓒ 이돈삼

   

녹천 고광순이 혈서로 쓴 불원복(不遠復)기의 모사본. 머지않아 광복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이돈삼

 
고광순은 장흥고씨 의열공파 출신의 의병장이다. 민비 시해사건 때, 또 을사조약 이후에 의병으로 나섰다. 장기전을 준비하려고 지리산 피아골로 옮겨 의병활동을 하다가 순절했다. 일본군이 고광순 의병장의 집도 불태워 버렸다.

고광순기념관에서는 고광순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다. 태극기에 혈서로 불원복(不遠復), 머지않아 광복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불원복기를 모사본으로 만난다. 원본은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기념관에서 가까운 데에 호남의병 기념탑도 있다.
 

호남의병 기념탑. 고광순 기념관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덧붙이는 글 지난 19일과 25일 다녀왔습니다.
#창평쌀엿 #상월정 #고광순기념관 #엿치기 #슬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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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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