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자 집터에 세운 도서관, 이보다 상징적일 순 없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4.19혁명기념도서관

등록 2019.02.11 14:54수정 2019.05.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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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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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선거 벽보 포스터(대통령후보 이승만, 조병옥, 부통령후보 장면, 이기붕, 김준연 등) ⓒ 자료사진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1959년 이승만의 정적(政敵) 조봉암을 사형으로 제거하고, 선거 직전 경쟁자 조병옥 박사가 급사(急死)한 상황에서 자유당은 왜 부정선거를 저질렀을까?

이승만의 네 번째 대통령 당선에는 차질이 없었으나 당시 85세였던 이승만의 건강이 문제였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만들어진 헌법에는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 기간 중 재임한다"는 조항(헌법 제55조 2항)이 있었다. 자유당은 고령인 이승만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뒤를 이을 부통령을 차지하지 않으면 정권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자유당의 선거 부정은 1956년 대선에서 조봉암이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고"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유명(?)했지만 3.15 부정선거는 도가 지나쳤다. 유권자 매수, 깡패 동원, 대리 투표와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부정선거로 득표율이 지나치게 높을 것을 우려한 경찰은 이승만 80%, 이기붕 70~75%로 득표율을 낮추라는 지령을 전국 개표소에 전달하기도 했다.

개표 결과 일부 지역에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얻은 표가 지역 유권자 수보다 더 많았다. 유시민이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지적한 것처럼 "단순한 '부정선거'가 아니라 완전한 '조작선거'"였다.

마산에서는 3월 15일 투표 당일부터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마산에 있던 47개 투표소 중 야당 참관인이 참석한 투표소는 세 곳뿐이었고, 곳곳에서 투표용지조차 받지 못한 시민의 항의가 들끓었다.

투표소에서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한 민주당은 곧바로 선거 포기를 선언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정부 수립 이후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이자, 4.19 혁명의 발화점이 된 '3.15 의거'의 시작이었다. 마산에서 일어난 시위 과정에서 8명이 죽고 70명 넘는 사람이 다쳤으며 200여 명이 연행됐다. 이 과정에서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 예정이던 김주열군이 실종됐다.  

3.15 의거가 4.19 혁명이 되기까지


실종됐던 김주열군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면서 마산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김주열군은 3월 1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 27일 만에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시위대는 관공서와 파출소를 공격했고, 경찰이 발포하면서 2명이 사망했다. 4월 11일 밤부터 마산에서 시작한 시위는 12일과 13일에도 이어졌고 마산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확산됐다. 4월 11일부터 마산과 주변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지만 서울은 일부 고등학생 시위를 제외하고 4월 18일까지 잠잠한 상황이 이어졌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 3천여 명이 교내에 모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교문을 나섰다. 학교를 나선 고대생은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 앞에 모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저녁 무렵 시위를 마친 학생 시위대가 청계천 4가에 도착했을 때 100여 명의 깡패가 나타나 학생을 집단 구타했다. 이 사건이 다음날 신문에 크게 보도되면서 운명의 날인 4월 19일이 밝았다.

서울의 각 대학 학생은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고, 점심 무렵에는 중앙청과 경무대 방향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경무대 앞 최후 저지선까지 진출하자 경찰은 발포했다. 이 총격으로 21명이 죽고 172명이 다쳤다. 경무대뿐 아니라 4월 19일 오후 이기붕 집 앞에 몰려든 시위대 2명이 경찰 발포로 숨지기도 했다. 

오후에 중·고등학생이 합류하면서 서울의 시위대는 20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승만 정권은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령에 이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속되는 시위와 경찰의 발포 과정에서 사상자가 크게 늘었다. 4월 19일 하루 동안 서울에서만 104명(경찰 3명 포함)이 시위 과정에서 사망했다. 이날 시위는 서울뿐 아니라 부산, 광주, 대구에서도 이어졌는데, 경찰 발포로 부산에서 13명, 광주에서 6명이 사망했다. 역사학자인 서중석의 표현대로 '피의 화요일'이었다.

시위는 4월 20일 이후 전국으로 확산됐다. 4월 25일에는 27개 대학 약 300명의 교수가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참여했다. 4월 26일, 시위대가 탑골공원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쓰러뜨리고 이기붕 집까지 끌고 갔다.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성명이 발표됐다. '승리의 화요일'인 이날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로 24명이 숨지고 113명이 부상을 입었다. 4월 28일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사저인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5월 29일 이승만은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향한다. 1965년 7월 19일 90세로 사망할 때까지 이승만은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서중석은 대규모 시위가 4월 19일 하루가 아닌 4월 내내 이어졌다는 점에서 '4.19 혁명'이 아닌 '4월 혁명'으로 불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처럼 1960년 4월은 '혁명의 달'이었고 '제2의 해방'이었다.  

혁명을 혁명이라 부르지 못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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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을 계기로 출범한 제2공화국은 이듬해 일어난 5.16 쿠데타에 의해 1년도 되지 않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자료사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고 6월 15일 내각제 개헌을 통해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4.19 혁명을 통해 탄생한 제2공화국은 1961년 5.16 쿠데타로 불과 8개월 만에 좌초하고 만다. 시인 신동엽이 노래한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만 남는" 시대, 시인 김수영이 부르짖은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는 시대를 우리는 맞지 못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 정부가 수십 년 동안 이어지는 사이, 5.16은 '쿠데타'가 아닌 '혁명'으로 불렸다. 박정희 군부는 1962년 12월 26일 공포된 제3공화국 헌법 전문에 5.16을 '혁명'으로 명시했다. 

'쿠데타'가 '혁명'으로 둔갑한 사이 4.19는 오랫동안 '혁명'이 아닌 '의거'로 불렸다. 박정희 군사 정부가 불법적인 권력 탈취를 '혁명'으로 미화하는 사이 진짜 혁명은 '의거'로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 말처럼 "혁명을 혁명한 셈"이다.

다시 4.19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부정선거의 주역이던 이기붕은 어떻게 됐을까?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발표 후 4월 28일,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 관사 36호실에서 큰아들 이강석의 권총에 일가족이 자살하는 최후를 맞는다.

이승만에 이어 이인자로 군림했던 이기붕 일가가 살던 곳은 종로구 평동 116번지로,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라고 불렸다. 김동리, 박종화, 모윤숙 같은 어용 지식인과 문화예술인 무리는 만송(晩松) 이기붕을 제2의 이승만으로 떠받들었다. '만송족'(晩松族)이라 불린 이들이 활개를 칠 정도였으니 당시 이기붕의 권세를 짐작할 만하다. 

혁명을 기념하는 유일한 도서관
   

4.19혁명기념도서관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 백창민


이기붕 일가가 집단 자살한 후 부정축재로 쌓아 올린 이기붕 일가의 재산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4.19 혁명 3개월 후인 1960년 7월, 허정 과도 내각은 국민의 과거 청산 요구에 따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국내외 재산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산은 5억 환, 이기붕 일가의 재산은 15억 환으로 밝혀졌다. 이중 이기붕 일가 재산 15억 환은 2001년 기준으로 약 696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다.

안타깝게도 이기붕 일가 재산은 대부분 상속인이나 연고자에게 양도됐고, 이기붕 일가 저택과 일부 재산만 국가에 귀속됐다. 1960년대 초반 양화대교부터 김포공항을 잇는 김포가도(지금의 공항대로)는 이기붕 일가 부정축재 환수금으로 확장했다.

이기붕 저택은 4.19혁명희생자유족회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됐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부정선거의 주역 이기붕의 집터가 혁명기념도서관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이 자리하기에 이보다 더 상징적인 곳은 없으리라.  

이기붕 집터에 자리 잡은 도서관이 처음부터 '4.19혁명기념도서관'으로 불린 건 아니다. 4.19가 '혁명'으로 불리지 못하는 동안 도서관도 제 이름을 찾기 어려웠다. 

이기붕 저택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27일부터 '4.19혁명희생자유족회'가 사무실로 사용했다. 1963년 3월 8일 이기붕 일가가 유일하게 남긴 재산을 국가가 환수한 뒤, 4.19 혁명 관련 단체에 무상 대여함으로써 1964년 9월 1일 '4.19기념사설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이후 1966년 공공도서관으로 전환, 1971년 새로운 건물을 지어 '4.19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1990년대 들어 김영삼 대통령이 4.19 묘지 성역화 사업 일환으로 현대식 도서관 건립을 추진했고, 2000년 지금의 이름인 '4.19혁명기념도서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도서관 시설과 장서만 놓고 보면 4.19혁명기념도서관은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4.19 혁명에 서린 의미를 생각해보면, 이곳이 지닌 의미를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서울시가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한 까닭도 이 때문일 것이다.

4.19혁명기념도서관은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은 흔치 않다. 혁명 자체가 흔한 사건이 아닌 만큼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이 흔치 않은 것은 당연하다. 

미완의 혁명, 4∙19가 주는 의미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기념도서관이 세워진 '서대문 경무대' 이기붕 집터. 이곳은 4.19 혁명의 또다른 현장이다. ⓒ 백창민


4.19는 '미완의 혁명'이라고 불린다. 4.19 혁명이 '미완'인 이유는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켰지만, 기나긴 군사 정부가 이어지면서 민주화 시대로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군대와 경찰 같은 강력한 물리력을 지닌 국가다. 유시민은 이런 한국에서 민중이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 봉기'뿐이라고 지적했다. 4.19는 연속적,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 봉기로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사례다.  3.1 운동을 기준으로는 두 번째, 해방 이후로는 첫 번째다.

조선 개국 과정에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있었지만, 시민이 정치권력을 교체하는 근대적 의미의 시민혁명 과정을 우리는 갖지 못했다. '미완'의 혁명이기에 역설적으로 4.19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더욱 클지 모른다. 민주주의가 절차와 제도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세상이 올 때 4.19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지도자가 군림하던 곳에 자리한 4.19혁명기념도서관은, 지금도 우리 민주주의와 혁명이 '완성'되기를 지켜보고 있다. 

[4.19혁명기념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평동 166 
- 이용시간 : 평일 09:00~17:00(일반열람실 08:00~22:00), 토요일 09:00~12:30
- 휴관일 : 매주 일요일, 법정공휴일
- 이용자격 : 자격 제한 없음, 무료
- 홈페이지 : http://library.419revolution.org
- 전화 : 02-737-9556
- 운영기관 : 4.19민주혁명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 #도서관 #민주주의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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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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