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점심-회사... 그 사이에 '미술관'을 넣었더니

[시가 끓는 시간 06] 아득해지는 순간

등록 2019.02.07 17:44수정 2019.02.1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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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와 나는 몇 년 전 피렌체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도시에 도착한 뒤 여장을 풀고 가장 먼저 우피치 미술관(Uffizi Museum)으로 향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나이 서른에 유럽 땅을 밟았다. 밀라노, 피렌체, 아씨시, 로마의 미술관과 성당에 들려 책 속에서만 보던 작품을 직접 둘러 보는 여행이었다.

밀라노를 거쳐 피렌체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상징은 우피치 미술관. 시내 한 가운데에 있는 이 미술관은 피렌체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작품들이 집결돼 있다 했다. 숙소도 시내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P와 나는 피렌체를 관통하는 햇살을 손으로 막으며 미술관까지 걸어갔다.

여름이 시작된 유월의 햇살이 뜨거웠다. 미술관엔 아름다운 작품으로 가득했다. 조토의 <마에스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수태고지>, 라파엘로의 <자화상>,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 실로 황홀했다. 같은 눈으로 보는 것인데, 책을 통해 보는 것과 직접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작품의 질감, 미술관의 공기, 주변의 소음이 합쳐지며 그림은 나에게 총체적으로 다가와 쏟아졌다.​

1층을 함께 돌아보다가 P와 나는 잠시 헤어져 각자의 속도와 취향대로 작품을 감상하기로 했다. 시야에서 P가 사라지고 혼자 미술관을 거닐고 있었는데, 어느 작품 하나가 나의 온 시선을 사로잡은 건 2층에 올라간 뒤였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프리마베라>. 가로 3미터, 세로 2미터 크기의 커다라 그림이다. 오렌지가 열린 과수원에 8명의 인물이 서 있다. 바람의 신 제피로스, 전령의 신, 헤르메스, 요정 클로리스가 등장하고 작품 가운데에는 비너스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해 무심한 표정으로 관객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갤러리에서 서서 비너스를 바라보았다. 비너스는 정지된 화면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보티첼리 작품이 놓인 공간은 조명이 밝지 않아 어둑했고 몇 명의 사람들만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이야기를 하며 걸어 다녔는데 그 작은 웅성거림도 그림의 일부였다.

순간, <프리마베라>를 감상하고 주위를 돌아보던 단 몇 초간 모든 것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삶 속에 잠시 정지된 시간이 문을 비집고 자리잡았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오래지 않아 정지된 것이 풀려 다시 제각기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시간은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미끄러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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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다시 오후에 일을 해야 하기 직전, 점심시간을 이용해 미술관에 다녀오는 건 생각지도 못한 마음의 안식을 주었다. ⓒ unsplash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에는 서울 시내 곳곳의 미술관을 부지런히 다녔다. 회사가 광화문 근처에 있어 다행히 걸어서 다닐 만한 거리에 미술관이 많았다. 서울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성곡미술관, 일민미술관 등. 

오전에 회사에서 일을 하고 다시 오후에 일을 해야 하기 직전, 점심시간을 이용해 미술관에 다녀오는 건 생각지도 못한 마음의 안식을 주었다. 자료, 숫자, 미팅, 또 다시 자료...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다가오는 직장인의 일상 한 가운데에, 일상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와 공간을 고요하게 만들고 시간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면, 멈추었던 시간은 다시 빠르게 미끄러져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근처의 미술관에 대략 익숙해질 무렵, 여의도에 외근을 나갔다가 생각보다 일정이 빠르게 끝나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이 비던 날이 있었다. 회사에 한 시간 일찍 돌아가도 되었지만 다른 곳을 갔다가 제 시간에 맞춰 회사로 돌아가기로 했다. 여의도에서 택시를 잡았다. 종로 부암동으로 가달라고 했다. 그렇게 '땡땡이'를 쳤다.

나의 모든 것이 당신에 의해 좌우됐다

부암동은 P와 함께 종종 거닐던 곳이라, 특별한 아이디어 없이 부암동 초입 '클럽에스프레스'에서 커피 한 잔이나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부암동에도 미술관이 있을까' 하며 택시 안에서 검색해보니, 언뜻 봐도 서너 개의 미술관이 나왔다. 부암동은 언덕 위에 서 있는 곳이니 미술관은 대개 규모가 크지 않을 테고, 그러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보고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가려고 했던 카페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미술관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미술관 이름은 '환기 미술관'이라고 했다. 수화 김환기 선생의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미술관이었다. 김환기 선생이 한국 서양 미술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것, 그의 작품이 경매에 출품되면 수십 억 원에 거래될 정도로 큰 인기와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환기미술관에 처음 갔던 날은 눈이 많이 내렸던 2월이었다. 입구에서 티켓을 사고 미술관 1층으로 들어갔다. 데스크 직원 외에 방문객은 나 혼자였다. 데스크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림 하나에 압도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 눈 가득히 우주의 점이 빛나고 있었다. 미술관 1층 정면 높이 걸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건, 김환기 선생의 만년인 1970년 탄생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짙푸른 청색으로 가득 칠해진 캔버스 위에 그보다 더 검고 푸른 점이 수없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우주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이 그림 자체가 우주였다.

주변에 방문객이 없이 고요했던 그 순간, 갑자기 시간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김환기 선생의 그림은 온몸으로 나를 흡수하고 빨아들이고 있었다. 몇 초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미술관 곳곳을 둘러봤다. 점, 선, 면으로 구성된 그의 모든 그림이 신비로웠고 아름다웠다.

하나의 그림에 잠시 감탄하고 다시 미끄러지듯 옆으로 걸어가 다음 작품에 또 감탄하고, 이어 다음 작품으로 또 흘러 가고, 그렇게 미술관에서의 한 시간은 움직였다가 정지됐다가 다시 움직이는 것의 연속이었다.

미술관에서 나오는 길, 처음 보았던 문제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앞에 다시 섰다. 다시 전율이 일었다. 나의 몸 전부의 촉수를 뻗어 이 거대한 우주에 흡수되고 싶었다. 여기에는 당신과 나만이 존재했다. 정지된 순간 속에서 당신과 나만이 서로를 감각하고 함께 아득해졌다. 몇 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나의 모든 것이 당신에 의해 좌우됐음을 고백한다.

환기미술관에 가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 당신과 함께 아득해졌던 순간 역시, 오래됐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지 못하겠지만, 같은 시간을 겪지도 못하겠지만
새들이 날아간 허공 어디쯤 우리의 눈빛이 잠시 겹쳐지는 일도 없겠지만

그저 감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곳의 멈추었다 미끄러지는 모든 시간들을
순간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순간이 아무것도 아닌, 기이하고 아름답고 무서운 그런 풍경을

- 조용미 시인 '풍경의 귀환' 중에서(시집 <나의 다른 이름들> 수록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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