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박물관'에는 히틀러가 없다

[독일에서 숨은그림찾기 4] 베를린 여행의 시작점, 토포그라피 데스 테러

등록 2019.02.25 12:07수정 2019.02.2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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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포그라피 데스 테러의 전경 베를린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곳으로, 나치의 만행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 단체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 서부원

 
베를린 도심 한복판에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힘든 박물관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의 여행 안내서도 독일어 이름을 그대로 쓰거나, 영어로 번역한 걸 대신 적고 있다. 사전 정보가 없고 일정마저 빠듯한 여행자라면 우리나라 서울보다 더 넓고 볼거리 많은 베를린에서 이곳을 굳이 찾아가진 않을 성싶다.

'토포그라피 데스 테러(Topographie Des Terrors).' 굳이 해석하자면, '테러의 지형학'쯤 될 것 같다. 이름만 들어서는 도무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지만, 베를린을 찾은 여행자라면 관광안내소처럼 가장 먼저 들러야 할 여행의 시작점이다. 나치의 만행을 교육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여행자들은 이곳을 발음하기 힘든 이름 대신 그냥 '나치 박물관'이라 부른다.


주지하다시피, 베를린은 '성찰과 기억'의 도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만행과 장벽으로 상징되는 동서 분단을 빼놓고는 베를린을 설명할 수 없다. 시내 곳곳에 산재한 관광지의 태반이 이 둘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이고, 사실상 도시의 랜드마크 구실을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나치의 만행은 남김없이 공개하고 철저히 교육시키는 모든 독일인의 '필수적인 교양'이다. 그들에겐 감추고 싶은 치욕적인 역사이지만, 건물과 터는 말할 것도 없고 관련된 문서나 사진 한 장도 그대로 보존하고 개방하며 찾아오도록 한다. 당시 독일 전역에서 운영되었던 아우슈비츠나 다하우 등 강제수용소가 지금 독일 학생들의 필수 수학여행 코스라는 건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나치 박물관은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당이 권력을 잡은 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패망할 때까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기록 사진에 담아 전시하고 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만 12년 동안 독일의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당시 촬영한 흑백영상까지 볼 수 있어 사진 아래 덧붙인 설명이 군더더기처럼 느껴질 정도다.

본디 이곳은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와 히틀러의 친위대인 SS(Schutzstaffel)의 본부가 있던 자리다. 나치의 심장부인 이곳을 빈 터로 남긴 채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로 된 단층짜리 박물관 하나만 덩그러니 세워놓았다.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 도심 한복판 사통팔달의 넓은 터를 그대로 '방치한' 독일인들의 마음 씀씀이가 놀랍다.

박물관 옆에는 울타리처럼 베를린 장벽이 남아있다. 녹슨 철근이 얇은 콘크리트 밖으로 삐져나와있어 몇 사람이 힘 모아 밀면 당장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무너진 지 30년이 지난 베를린 장벽의 잔해는 박물관에 전시된 나치의 만행에 대한 예고편 역할을 하며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박물관
 

토포그라피 데스 테러 입구의 외부 전시 공간 외부 전시 공간과 나란히 옛 베를린 장벽이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다. 아무런 보수도 없이, 철골이 드러난 채 앙상하기만 하다. ⓒ 서부원

 
찾아간 날이 평일 오후였는데도, 박물관은 수많은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대부분은 단체로 온 학생들이었는데, 동선을 따라 줄지어 관람하기도 하고 특정 사진 앞에 멈춰 서서 인솔 교사의 강의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앳된 초등학생들도 적지 않았지만 소란스럽기는커녕 하나같이 숙연해하는 모습이었다.

이곳에선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독일 학생들이 직접 와서 보고 깨달아야 하는 '학교'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이방인들 역시 독일을 여행하기에 앞서 찾아야 한다고 손짓하는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베를린의 수많은 박물관과 기념관, 유적, 심지어 일부 교회당까지 입장료를 받는데다 금액도 만만치 않아 호주머니가 얇은 여행자들에게는 꽤나 부담이 된다.
 

토포그라피 데스 테러 내부의 전시물 국가사회주의당(나치당)의 조직과 주요 인물의 행적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정작 히틀러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다. ⓒ 서부원

 
전시된 것들은 하나같이 흐릿한 흑백사진과 영상이지만, 담겨있는 내용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노골적이다. 어린 아이들에게 관람을 시켜도 되나 괜스레 걱정될 만큼 잔인한 장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흐느끼는 관람객들이 적잖이 눈에 띄는 이유다. 

나치의 만행이야 독일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인의 공통된 상식에 가깝다. 모르긴 해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으리라 본다. 하지만 교과서로 공부한 것과 실제로 현장에 와서 보고 느끼는 바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저 '남 이야기'가 내 가족과 가까운 이웃의 사연인 양 가슴에 와서 박히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70여 년 전 촬영된 야만스러운 영상을 접하면서 대학에 갓 입학한 뒤 선배들이 손에 이끌려 처음 보았던 이른바 '광주 비디오'가 떠올랐다. 폭력에 뭉개져 훼손된 시신과 그를 지켜보며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때리는 자와 맞는 자의 표정조차 그대로 닮았다. 번역된 자막도 없고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가 입혀졌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다만 '광주 비디오'가 부당한 권력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 모습을 영상에 주로 담고 있다면, 이곳의 영상은 전범들의 극악무도한 행태를 보여주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마치 반복된 영상인 양 집단학살 후 시신을 땅에 파묻는 장면과 교수형 당한 시신들의 모습이 유난히 자주 등장한다. 죽임을 당한 그들이 누구인지는 '파르티잔(Partisan)'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해놓고 있을 뿐이다.

국가 주도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 기념관이 세워지고 '광주 비디오'가 1년 365일 상영된다는 건 우리에게 아직 상상 너머의 일이다. 더욱이 전국의 초·중·고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와 수업을 듣는 모습은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40년이 다 되도록 진상규명은커녕 진상조사단을 꾸리는 것조차 온갖 방해에 시달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백년하청일지도 모른다.

이곳을 찾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파렴치한 일본을 떠올릴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국가로서 독일과 '달라도 너무나 다른' 일본에 대한 분노가 치미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에 앞서 '광주'가 떠오르는 건, 일본에 응분의 책임을 묻고 진정한 사죄를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치부를 성찰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개인보다 사건을 기억하는 독일

당황스럽게도 나치 박물관에는 히틀러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정작 '주연'은 없고, '조연'들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히틀러 대신 SS의 책임자였던 힘러와 게슈타포의 창설자 괴링, 유대인 학살의 주역인 아이히만, 선전장관 괴벨스 등 그의 측근들과, 그들에게 선동 당한 대중들의 모습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물론, 히틀러의 반인륜적 범죄를 '세탁하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를 앞세우게 되면, 모든 책임은 그에게 있고 나머지는 그저 그의 명령을 따르는 수족에 불과해 죄를 묻기 어렵다는 '단순명료한' 논리가 횡행할 수 있음을 우려한 듯하다. 패전 후 해외로 도피했다가 1962년 붙잡혀 처형당한 아이히만의 행적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유대인 박물관 내 '기억의 길' 토포그라피 데스 테러 인근에 자리한 유대인 박물관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학살된 수많은 유대인을 상징하는 '기억의 길'이 만들어져 있다. 얼굴 모양의 둥근 상징물을 밟고 지나도록 동선이 설계되어 있다. ⓒ 서부원

 
이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친일 민족반역자라고 하면 누구라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이완용'을 떠올리듯이 사실상 그가 친일파의 상징이자 전부다. 그야말로 '악질' 친일파의 이름과 행적을 간략하게 기록한 엄청난 두께의 <친일인명사전>만도 세 권인데, 우리의 기억 속에 그들의 이름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에게 이완용은 모든 친일파의 '속죄양'이다.

사진과 영상에는 마치 광신도처럼 히틀러의 말 한 마디에 열광하고 있는 당시 대중들의 모습도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들을 향한 조롱과 날선 비판은 기실 현재를 사는 독일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욕보이는, 누구 말마따나 '자학 행위'이지만, 누구 하나 시선을 회피하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 뜬다'는 교훈만 되새겨 갈 뿐이다.

나치 박물관의 기록 사진 전시는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관한 것과, 몇 해 전 93세의 나이로 붙잡힌 나치 전범에 대한 소개로 마무리된다.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추상과 같은 독일 검찰의 선언이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과거를 묻어둘 수도 있고, 공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규명이 없는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전 독일 문서사용부장의 일갈이 겹쳐진다.

그제야 이곳 나치 박물관을 왜 '테러의 지형학'으로 명명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반인륜적 범죄가 잉태된 게슈타포와 SS의 땅에서 그들이 저지른 학살, 곧 테러 행위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후세에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에둘러 학문적으로 표현한 건 아닐는지. 이곳에서 독일의 수도 베를린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토포그라피 데스 테러 #히틀러 #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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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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