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걷어 올리는 그녀들을 예술로 남긴 한 남자

[그림의 말들] 물랭루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등록 2019.02.19 15:05수정 2019.02.1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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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물랭루즈의 춤(툴르즈 로트레크,1889~1890, 필라델피아 미술관) ⓒ 필라델피아 미술관

 
빨간 스타킹을 신은 여인이 왼쪽 다리와 레이스가 달린 치맛단을 동시에 들어 올리며 캉캉 춤을 추고 있다. 질끈 묶은 머리에 수수한 드레스. 자세히 보면 어딘가 모르게 촌스러운 듯한 이 여인은 남들이야 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댄스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 앞에서 스텝을 맞추고 있는 중절모 쓴 남자는 이 카바레의 댄스스타 발랑탱이다. 어찌나 유연하고 춤 솜씨가 좋았던지 '뼈 없는 발랑탱씨'라고 불리던 남자다. 그림 맨 앞쪽으로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보인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는 이 여인은 이곳이 어색하고 부끄러운 모양이다. 단정한 머리, 고급스러운 모자, 하얀 밍크 목도리까지 포인트가 완벽한 이 여인은 자태로 보아 귀족임이 틀림없다.

이 그림은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가 그린 '물랭루주에서의 춤'이다. 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주는 에펠탑이 세워지던 해에 개장한 카바레다. 이브 몽탕과 에디트 피아프가 처음 만난 곳 물랭루주. 훗날 파리 사교계의 정점을 찍으며 돈과 권력이 모여들던 곳.

로트레크는 물랭루주 지배인과 거래를 했다. 매일 이곳에서 그림을 그릴 테니 매일 술을 마시게 해달라고. 그는 정말로 매일 그곳에 앉아 날마다 본 것을 드로잉했고, 때로는 작업실로 돌아와 그 드로잉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이 그림의 오른쪽 끝에 있는 네 명의 남자들은 그의 친구들이고, 망토를 걸친 여인은 물랭루주의 메인 댄서인 잔 아브릴이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로트레크는 '뼈가 없는 듯 유연한 발랑탱이 한 여자에게 춤 교습을 하고 있다'라는 메모만 남겼다.

푸른색과 붉은색 물감의 의미

이 그림을 반긴 사람은 다름 아닌 물랭루주의 주인 '조셉 올레르'였다. 그는 이곳을 서민들만을 위한 카바레가 아닌 귀족 남녀 모두 즐기는 명소로 만들고 싶은 야망이 있었다. 당시 그가 물랭루주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문구는 '사모님과 함께 즐기는 파리의 구경거리'였는데, 그 문구와 이 그림은 잘 맞아떨어졌다. 올레르는 이 그림을 사들여 입구에 걸었고 그의 바람대로 물랭루주는 사교계의 성지가 된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아버지는 '알퐁스 샤를 마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 백작'이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친 사촌 간인 '아델 조에 마리 마르게티 파티에 드 셀레랑'이다.

유복한 귀족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로트레크는 축복 속에서 태어나 작은 보석으로 불리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불행히도 그는 부모의 근친혼 때문에 '농축 이골증'에 걸렸다. 농축 이골증은 극히 드문 유전병으로, 다발성 기형과 함께 뼈가 잘 부스러지고 키가 자라지 않는 상염색체 열성 질환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이 아이가 그런 병에 걸렸으리라고 짐작하지 못했다.

1867년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아기는 1년도 살지 못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떠났고 부부는 이혼한다. 당시 로트레크의 나이는 4세였다. 부모의 이혼 후, 로트레크는 엄마와 살았지만 아버지와도 왕래하며 승마와 매 사냥 등을 즐겼다. 여전히 가족 소유의 저택과 성에 거주하며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란 로트레크는 이후 점점 병이 발현돼 14세에는 지팡이 없이 걷기 힘든 몸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거실에서 일어나려다 미끄러져 넘어진 로트레크는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만다. 채 회복이 되기도 전인 다음 해, 또다시 낙상사고를 입는다.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다. 이후 그는 키가 152cm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았으며 격한 야외활동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됐다. 

아버지는 이런 그를 수치스럽게 생각해 만나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병 치료를 위해 그를 데리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이런 과정은 그와 어머니 사이의 유대감을 더욱 단단하게 키웠다. 그는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어머니에게 의지했고, 어머니는 그의 곁을 지켰다.

이런 그에게 그림은 인생의 돌파구였다.
 
"산다는 것은 충분히 슬픕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랑스럽고 즐겁게 나타내야 하지요. 그것을 그리기 위해서 푸른색과 붉은색 물감이 있는 것입니다." - 툴루즈 로트레크

포스터, 예술이 되다

로트레크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프랭스토를 거쳐 제3공화정의 공식 초상화가인 레옹 보나의 제자가 된다. 이후, 코르몽의 화실을 다니며 에밀 베르나르와 빈센트 반 고흐도 만나게 된다. 그는 드가, 마네를 존경했고 반 고흐와 일본 판화에 관심이 있었다.

이렇게 만난 고흐와의 일화가 있다. 1887년 고흐와 같이 전시회를 열었던 로트레크는 1890년 브뤼셀에서 열린 '20인전'에 초대받아 출품을 하게 됐다. 당시 그는 친구인 고흐를 추천했는데 앙리 드 그루가 반대한다. 이에 격분한 로트레크는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결국 다른 이들의 중재로 결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가 고흐의 작품에 얼마나 애정이 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885년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에 거처를 마련한다. 몽마르트르는 그에게 혼란과 매혹이라는 두 가지를 동시에 던져준 곳이다.
 
"사람들의 동정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을 때 더욱 불쾌합니다. 작은 결실이라도 얻고자 한다면 그런 동정을 피해야겠지요." - 할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

1889년 마침내 물랭루주가 몽마르트르에 문을 열었고, 그렇게 그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그는 '물랭루주의 화가'라 불리며 유명해진다. 그리고 이때 그려진 명작이 바로 '물랭루주에서의 춤'이다.
 

물랭루즈의 라 굴뤼 포스터(1891, 툴루즈 로트레크) ⓒ 툴루즈 로트레크

 
이때까지 카바레 홍보를 위한 포스터라는 것은 색채만 현란하고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조잡한 것이었다. 로트레크는 물랭루주를 위한 포스터를 제작하게 되는데, 이 역사적인 포스터는 상업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밑바탕이 됐다.

포스터 맨 위에는 물랭루주라는 글씨가 세 번 연속 나온다. 치마 속이 다 보이게 다리를 들고 있는 여인은 물랭루주의 메인 댄서인 라 굴뤼, 그리고 어두운 실루엣의 남자는 그 뼈 없다는 발라탱이다. 노란 덩어리는 가스등을 표현한 것이다. 종합하면 물랭루주에서는 라 굴뤼와 발라탱의 춤을 매일 볼 수 있고 가스등이 있으니 밤새워 놀 수 있다는 뜻이다.

그가 기록한 그녀들

당시만 해도 보통의 여자들은 발목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치마를 번쩍 들어 올리는 캉캉 춤을 춘다는 물랭루주는 파리의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유혹적이었다. 이 포스터로 로트레크는 유명해지고 물랭루주도 대박이 났다.

이 포스터에 등장한 라 굴뤼는 '먹보'라는 뜻이다. 손님들의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이곳에서 댄서로 몇 년의 전성기를 보낸 그녀는 카지노에서 꽃을 팔았고, 레슬링 선수로, 조련사로 일하다가 말년에는 사창가의 청소부로 전락해 외롭게 죽었다. 로트레크는 포스터 속 라 굴뤼와 '물랭루주에서의 춤'에서 망토를 두르고 있는 잔 아브릴과 같은 무명의 댄서들을 그림에 담음으로써 쉽게 잊힐 그녀들을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물랭가의 살롱에서(툴루즈 로트레크,1894, 알비 로트레크 미술관) ⓒ 알비 로트레크 미술관

 
로트레크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주제는 성매매 업소다. 여인의 누드와 여자 동성애를 다룬 석판화 작품들을 모아 '그녀들'이라는 작품집을 냈는데, 이 주제를 대하는 방식 때문에 비평가와 대중들의 비난을 샀다. 그는 성매매라는 주제에 대한 환상을 깨고, 도덕적 판단도 하지 않고, 어떤 장식도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물랭가의 살롱에서'다. 성매매 업소의 대기실 같은 곳이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주인 여자를 제외하곤 아무도 화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해답은 가장 오른쪽 끝에 잘린 여인의 자세에 있다. 그녀는 치마를 걷어 올리고 서 있다. 성병 검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백신이나 치료 약이 없었던 당시에는 매독과 같은 성병이 확인되면 여지없이 거리로 쫓겨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니 그녀들의 표정이 어두울 수밖에. 그는 이러한 장면을 그림에 담았고 사람들은 불편했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과 매독에 걸린 그는 35세의 나이에 심한 섬망 증상에 시달려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내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거라던 로트레크. 그는 마지막 순간 어머니에게 "죽는 것도 굉장히 힘들군요"라는 말을 남기고 말로에 성에서 눈을 감는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는 생전에 1300여 점의 유화, 수채화, 드로잉, 일러스트, 그리고 5천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작품들을 모아 고향인 알비시에 기증했다. 1922년, 그곳에 로트레크 미술관이 개관했다.

[참고자료]

앙리 풰리쇼, <몽마르트의 빨간 풍차>, 다빈치, 강경 역 
엔리카 크리스피노, <로트레크, 몽마르트르의 밤을 사랑한 화가>, 마로니에북스, 김효정 역
EBS <서양미술기행>(다큐멘터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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