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때 '북한 위협' 강조한 미국의 속내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광주와 북한 연결시킨 집단들

등록 2019.02.14 07:41수정 2019.02.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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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4일 오전 9시 23분]

전두환 집단은 신속했다. 5·18 항쟁이 벌어지자마자 광주와 북한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그들의 단독 작품은 아니었다. 미국도 상당 정도 조력을 제공했다.

1980년 5월 18일 전남대에서 학생들과 계엄군의 첫 충돌이 발생했다. 3일 뒤인 21일 오후 6시경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하고 계엄군을 퇴각시켰다. 이로부터 6일간 시민군이 광주 시내를 장악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미국 정부는 한국인들의 관심을 북한으로 돌리는 일을 진행했다. 미국 시각으로 22일,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이 북한을 상대로 경고 성명을 발표했다. 계엄군의 학살로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엉뚱하게 대북 성명을 내놓은 것이다. 5월 23일자 <경향신문> '미 정부 강력 경고, 광주사태 악용 어떤 기도도 불용'은 이렇게 보도했다.
 
"미 정부는 22일 현 한국 사태를 악용하려는 어떠한 외부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 안보조약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국무성은 호딩 카터 대변인을 통해 발표한 '한국 사태에 대한 공식 성명'에서 미국은 한국의 불안 사태에 깊이 우려하고 있으며 폭력 사태의 확대는 위험한 오판을 야기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고 모든 관련 당사자들의 자제와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를 촉구했다."
  

본문에 인용된 언론보도. ⓒ 경향신문


상황이 확대되면 '외부세력'이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국무부가 지칭한 '외부세력'은 '북한'과 동의어로 인식됐다. 위 기사는 말한다.
 
"성명은 직접 북괴를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외부세력'이 북괴를 의미하고 있음을 명백히 했다. (중략) 카터 대변인은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현재 북괴 측의 이례적인 군대 이동 조짐은 없으며 주한미군도 특별경계태세에 돌입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국무부 대변인은 기자회견을 통해 '외부세력'이 북한임을 명백히 했다. 북한군의 군대 이동에 관한 언급을 함으로써, 상황 여하에 따라 북한군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미국의 아리송한 행보와 그 결과

국무부에 이어 주한미국대사관도 나섰다. 23일, 미국대사관 고위 관계자가 서울 롯데호텔에서 여야 의원들과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북한을 거론했다. 발언 요지가 5월 24일자 <동아일보> '미 결의 이미 전달, 주한 미 관리'에 소개됐다.
 
"미국은 아무런 유보 없이, 북괴가 오판하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 있으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이러한 우리(미국)의 준비 태세의 발표를 삼가고 있다."
 
광주 상황이 북한에 이롭게 작용할 가능성을 상기시킨 것이다.

훗날 미국은 이런 조치들이 전두환 측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외교정책을 홍보하는 미국 해외공보처(USIA) 산하인 주한미국공보원이 1998년 발표한 '5·18 및 12·12 당시의 주한미군의 입장 - 1980년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 일어난 제반 사건에 대한 미국 정부의 성명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5월 21일 특전사 부대들이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을 때쯤에 미국 정부는 사태가 극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에 대해, 북한이 한국에서의 불안한 상황을 군사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게 억지하는 일에 조력해 달라고 요청해왔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5월 21일 북한의 활동이 있는가를 감시하기 위해 2대의 E-3B 조기경보기를 극동으로 파견했다. 주요 미국 해군 함정들도 한반도 근해에 파견되었다." - 한국군사학회가 발행한 <군사논단> 제13호에 수록.
 
미국은 광주 상황이 북한의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한의 위협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머릿속에서 광주와 북한이 연결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북한이 광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일례로, 5월 24일자 <매일경제> '북괴 긴장 조성 혈안, 광주 데모 사태 관련'은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당시엔 전두환 집단이 언론을 장악했으므로, 이런 기사들이 기자나 언론사 사주의 실제 입장을 반영하지는 않았다.
 
"북괴는 광주 데모 사태와 관련하여 지난 18일 이후 23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문·방송 등 그들의 선전 기관을 총동원, 이 사태의 확산을 줄기차게 선동하는 한편, 이를 계기로 이른바 한반도 적화혁명의 호기라도 다가오고 있는 양 현지 상황을 시시각각으로 과장, 왜곡 보도하는 등 긴박감 조성에 혈안이 되고 있어 관측통들의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본문에 인용된 언론보도. ⓒ 매일경제

북한이 선동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보도다. 명백한 허위 보도였다. 광주항쟁이 개시되고 며칠이 지날 때까지도 북한 정부는 사건의 성격과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5·18 이전부터 서울에서 전개되던 반정부 시위, 즉 '서울의 봄'의 일환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북한 언론의 보도를 분석한 김희송 전남대 연구교수의 논문 '1980년 5월 광주 그리고 북한- 북한 개입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이렇게 말한다.
 
"5·18 민주화운동의 초기인 5월 18일부터 21일까지의 로동신문의 보도 내용을 종합하면, 항쟁으로 격화된 5·18 민주화운동보다는 이른바 '서울의 봄' 민주화 시위가 더 비중 있게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중략) 로동신문에서는 기존의 남한 시위의 보도 양상과 크게 다르지 않는 수준에서 광주 지역의 시위를 보도했다."
 
"북한 언론이 선동전 전개" 허위 보도까지

남한 신문들은 북한 언론이 선동전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실제의 북한 언론은 사실관계를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관계 전달을 넘어선 보도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보도도 아래와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 아래 내용은 5월 23일자 <조선통신사> 성명 '최근 남조선 사태에 대하여'의 일부다.
 
"오늘 남조선에서는 유신체제의 청산과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청년학생 등과 각계각층 인민들의 대중적인 민주항쟁이 두달나마 계속되고 있다. (중략) 광주의 사태는 그 어떤 무력탄압으로써도 정의의 항쟁에 일떠선 인민대중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북한 언론이 광주 시민들을 선동했다는 보도는 사실 무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정부가 광주와 북한을 연결시켜주는 상황에서, 북한이 광주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허위 보도와 더불어 광주에 남파된 북한 간첩들이 체포됐다는 허위 보도들도 나왔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간첩 이창용 사건'이다. 5월 24일자 <경향신문> '북괴 간첩 1명 검거'는 이렇게 보도했다.
 
"24일 서울시 경찰국은 최근 학생 및 시민 시위가 극렬한 광주시에 잠입, 이들의 시위를 무장 폭동으로 유도하고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려는 목적으로 남파된 북괴 간첩 이창용(46·평양시 중구역 경림동 36)을 5월 23일 서울에서 검거하고 통신 장비, 난수표, 공작금 1백 93만 5천원 등 20여 점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본문에 인용된 언론보도. ⓒ 경향신문


이창용은 진짜 간첩이었다. 하지만 광주에 남파된 간첩은 아니었다. 남파됐다가 하필이면 5·18 기간에 붙들렸을 뿐이다.

전에도 4차례 남파된 적이 있었던 그는 1980년에 남파됐을 때는 무척 당황했다. 남한이 너무나 확연히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모의 남한 체험을 하고 왔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완벽한 남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지만, 북에서 받은 교육이 현실과 너무 판이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인파가 많은 서울역에서 특히 당황했다. 5월 23일, 그는 결정적 실수를 했다. 할머니로 보이는 여성한테 인천 가는 방법을 물었다가 의심을 산 것이다. 2017년 11월 11일자 <오마이뉴스> 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이창용은 그 여성이 길을 가르쳐주면서 자신을 위아래로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그 뒤 이창용은 자기 길을 갔고, 그 여성도 자기 길을 갔다. 여성이 간 곳은 파출소다. (관련 기사 : 그 '북괴 간첩'은 왜 감자탕집을 찾아 헤맸을까)

여성의 의심을 느꼈다면 곧바로 서울역을 떠났어야 했는데도, 이창용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인터뷰에 따르면, 발을 떼려다가 순간적으로 감자탕 생각이 났다고 한다. 서울 출신인 그는 한국전쟁 전에 부모님과 함께 종로의 뼈다귀탕(감자탕) 집에 자주 갔었다고 한다. 그 추억이 생각나, 감자탕이나 먹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서울역 주변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경찰에 붙들렸던 것이다.

경찰을 보는 순간 혀를 깨물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깨어 보니 병원이었다. 병상 옆에 신문이 있었다. 누군가 읽고 놔둔 듯한 신문이었다. 들여다 보니, 간첩 검거 뉴스와 함께 자기 사진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기사 내용을 보니, 북에서 받은 지령과 달리 자기 임무가 '광주 잠입'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광주에 파견됐다는 '북한 간첩들' 알고보니...

<오마이뉴스> 인터뷰에서 이창용은 자기를 신고한 사람을 '노파'라고 말했지만, 나이를 잘못 봤던 모양이다. 이창용 검거 뉴스 왼쪽에 실린 또 다른 기사에 따르면, 신고한 여성들은 40대 후반이었다.

두 여성은 다음 날 5050만 원을 상금으로 받았다. 서울에서 소규모 공장의 비숙련 노동자 초임이 15만 원을 넘지 않던 시기였으니, 상당한 거액을 받은 셈이다. 두 여성의 상금 수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광주에 파견되는 간첩은 아니었지만 진짜 간첩을 신고한 것은 맞기 때문이다.

이창용이 붙잡히기 전날인 22일에는 광주 현지에서 '북한 간첩들'이 집단으로 생포됐다. 위의 <경향신문>에 실린 '간첩 용의자 5명 계엄 당국에 인계, 학생·시민이 잡아'는 이렇게 보도했다.
 
"시위를 벌이던 시민과 학생들은 지난 22일 하오 3시께 군중 사이에서 간첩 용의자 5명(여자 2명 포함)을 잡아 계엄 당국에 신병을 인도했다. 시민·학생들은 시위 군중 틈에 끼어들어 '불태워라' '죽여라'고 외치는 등 과격한 언동으로 선동하던 자들을 수상히 여겨 이들을 붙잡아 자체 조사를 한 결과 북괴 간첩의 용의점이 짙어 계엄당국에 신병을 넘긴 것이다."
 
광주와 북한을 연계하는 선전 활동의 위력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다 보니, 광주 시위에 참여한 일부 시민들까지도 북한 개입설을 믿게 됐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붙잡힌 사람들은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5·18 가두방송으로 유명한 전옥주다. 도청 앞에서 시민군에게 물을 떠다주다가 확성기를 잡게 된 평범한 시민이다. 붙잡힌 뒤 남파 간첩으로 몰린 그는 징역 15년형을 받았다가 이듬해 대통령 특사로 풀려났다.

이렇게 미국이 공식 성명을 통해 광주와 북한의 연결 가능성을 암시하고 전두환 집단의 강압을 받은 언론들이 광주와 북한을 연결해 보도하는 속에서, 광주에 파견됐다는 '북한 간첩들'이 체포되는 일들이 일어났다. 5·18 항쟁 중에 일어난 이런 일들은, 전두환 집단이 광주 학살 초기부터 북한 개입설 조작을 신속히 추진했음을 보여주는 증표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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