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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청운문학도서관 ② 그의 망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등록 2019.02.24 16:45수정 2019.05.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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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이전 기사] 독립운동에 뛰어든 유일한 대한제국 대신 

상하이에서 동농은 임시정부와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활동했다. 동농과 대동단은 1919년 11월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의 상하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 10월 21일 청산리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며 만주 독립군 활동이 활발해졌다. 만주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의 초대에 응해 김가진은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려 했으나 1922년 7월 4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령의 나이로 이국 땅에서 분투했던 노대신은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 그의 장례식은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1926년 2월 이완용이 죽었을 때 동아일보는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사설에서 "그도 갔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제는 천벌을 받아야지"라고 그의 길을 '저주'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을사오적(乙巳五賊), 1907년 정미7조약을 체결한 정미칠적(丁未七賊),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한 경술국적(庚戌國賊)은 모두 대한제국의 대신들이다. 이들은 팔지 못할 나라를 판 매국노였지만 온갖 호사와 천수를 누리다가 작위와 재산을 자손에게 세습했다. 대한제국의 대신이지만 이들과 김가진이 걸어간 길은 많이 달랐다. 

독립을 향한 3대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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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난징에서 김의한과 정정화, 김자동 동농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는 중국에서 임시정부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사진 속 아이는 김의한과 정정화의 아들 김자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가진뿐 아니라 그의 아들 성엄 김의한, 며느리 수당(修堂) 정정화(鄭靖和)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은 아버지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김의한은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31년 김구,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한인애국단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8일 도쿄 경시청 정문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흥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 모두 한인애국단원이다.

김의한 일가는 상하이(1919),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둥(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충칭(1940)으로 임시정부가 옮길 때 늘 함께 했다. 임시정부의 피난길은 4000km에 이른다. 김의한은 1936년 장시성 우닝현 쑨원기념 중산도서관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도서관장'을 지낸 집안 내력이 이채롭다.


해방 전 김의한은 광복군 창립과 훈련에 관여했다. 해방 후 한국독립당 활동에 참여했고, 1948년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구와 함께 삼팔선을 넘어 남북 협상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 9월 28일 납북돼 1964년 10월 9일 사망했고 평양 재북인사묘역에 묻혔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을 추서 받았다.

동농의 며느리 정정화는 시아버지와 남편이 상하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 안살림을 도맡았다. 이 과정에서 10년 동안 여섯 차례나 상하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했다.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다. 1946년 귀국할 때까지 임시정부 뒷바라지에 모든 걸 바쳤다.

김구, 이동녕, 이시영 같은 임시정부 인사 중 그녀가 지은 밥을 먹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임시정부 가재도구 중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고 남편 김의한과 함께 광복군 창립에 기여했다. 한국전쟁 때 노모를 모시기 위해 서울에 남았던 그녀는 부역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일본 경찰 출신에게 모욕을 당한 후 풀려나기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1991년 사망 후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혔다. 

독립운동에 대한 동농 집안의 헌신은 2대에 그치지 않는다. 김가진의 둘째 아들 김용한은 의열단 김상옥 의사 사건에 연루돼 일제 경찰에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로 인해 김용한은 정신이상을 앓다가 한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용한의 아들이자 김가진의 손자 김석동은 광복군 최연소 대원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고 국립 대전현충원에 묻혔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만 독립운동을 해도 3대가 망한다는 이 나라에서 동농의 가문은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한 집안이다. 이 정도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로도 설명이 부족하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은 이 집안에 큰 빚을 졌다.

청운문학도서관과 동농 김가진
 

청운문학도서관 2014년 11월 19일 백운동에 들어선 문학 전문 도서관. 지상은 한옥으로, 지하는 문학 전문 자료실로 꾸몄다. ⓒ 백창민

 
김가진 일가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백운장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로 넘어가 일부 공간에 고급 요릿집이 들어서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김가진 일가에게 반환되지 않고 호텔, 요정으로 쓰였다. 

해방 후 귀국한 동농의 아들 김의한은 백운장을 돌려 받으려 했다.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해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이승만은 백운장을 끝내 김가진 가문에 돌려주지 않았다. 남북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의한이 남북 협상에 참여하며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했기 때문일까. 미국 유학을 떠날 때 동농이 이승만에게 상당한 금액의 유학 자금까지 건넨 걸 생각하면 이승만의 처사는 지나쳤다.

1960년대 초까지 잘 보존되던 백운장은 5.16 쿠데타 후 군부가 미국인 교회에게 불하해 버렸다. 1964년 이 땅을 불하받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몰몬교회)가 교회 건물을 지으면서 백운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백운장이 있던 백운동 자락에 2014년 11월 19일 청운문학도서관이 들어섰다. 지상 1층, 지하 1층 규모로 그리 크지 않은 청운문학도서관이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청운문학도서관은 지상과 지하 공간이 나뉘어 있는데, 지상 1층 공간은 한옥으로 지었다. 한옥채와 연못가 누정은 각종 문학 행사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지하 1층은 문학 전문 자료실로 꾸몄다. 자료실 외에 강연이 가능한 다목적실이 있고, 한켠에는 어린이열람실이 있다. 

소장하고 있는 책은 1만 7천여 권. 종합도서관으로 문을 열었으면 장서 부족이 눈에 띄었을 텐데, '문학 전문 도서관'을 지향하면서 아담하고 내실 있는 도서관이 되었다. 서촌을 누빈 이상, 윤동주, 현진건 같은 문인을 생각하면, 늦게나마 백운동에 어여쁜 문학도서관이 들어선 건 다행이다. 

조국은 그를 잊었나,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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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천’ 각자 청운문학도서관 아래 바위 절벽에 새겨진 ‘백운동천’ 글씨. 동농 김가진이 새긴 글씨로 그의 집 백운장이 이곳에 있었다. ⓒ 백창민

 
동농 김가진이 바위에 새긴 '백운동천' 글씨는 청운문학도서관 아래 바위 절벽에 새겨져 있다. 아름다운 청운문학도서관을 찾게 되면 '백운동천' 글씨를 함께 찾으시라. 그리고 사라진 백운장과 이국 땅에 묻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동농을 기억하시라. 

독립한 나라에서 우리가 누리는 이 풍광을 그의 집안은 왜 누리지 못할까. 그가 이완용처럼 친일을 했으면 백운장 일대는 그의 집안 소유로 대대손손 이어졌을지 모른다. 때론 현실이 문학보다 더 극적일 수 있다지만, 백운장 동농 일가의 이야기는 언제까지 비극으로 방치될까. 정의롭지 않은 역사 속에 우리는 후손에게 나라를 찾고 지키는 데 '헌신'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동농과 그의 아들, 며느리는 죽어서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상하이, 평양, 대전에 각각 묻혔다. 심지어 동농은 일제가 조작한 걸로 알려진 의병장 체포 혐의로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받지 못했다. 

2019년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동농이 상하이로 망명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는 언제쯤 '독립유공자'로 조국에 돌아올 수 있을까. 장유승이 지적한 것처럼, 동농의 '망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독립하기를 소망했던 조국은 그를 잊은 건가, 버린 건가. 

[청운문학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36길 40
- 이용시간 : 평일 10:00 - 19:00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 연휴, 추석 연휴.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시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외국인등록증 및 거소증 소지자, 무료
- 홈페이지 : https://www.jfac.or.kr/site/main/content/chungwoon01
- 전화 : 070-4680-4032-3
- 운영기관 : 종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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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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