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부가..." '냉골 도서관'이 들춰낸 그들의 민낯

[주장] 그 중요하다는 '미래 인재'의 교육과 연구는 누구의 땀방울을 밟고 서 있나

등록 2019.02.15 15:00수정 2019.02.15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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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오후 시설관리직 파업에 따른 난방공급 중단된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앙난방 시스템이 아닌 개별난방으로 운영되는 난방 장치는 계속 가동되고 있다. 2019.2.8 ⓒ 연합뉴스


연휴 직후인 7일 시작됐던 서울대학교 시설관리직 노동자들의 파업이 12일 끝났다. 그런데 6일간 이어진 그들의 파업에는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그들의 파업이 벌어졌던 장소는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의 관심사가 집중되는 서울대학교였고, 그들이 근무하던 곳은 추운 한겨울에 없어서는 안 될 난방을 책임지는 기계실이었으며, 그들의 파업이 영향을 미치는 곳에 학생들이 공부하는 중앙도서관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들로 '최저임금 받고는 못 살겠다'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투쟁은 청년들의 미래를 볼모 삼아 자신들의 이익을 얻으려는 이기적인 투쟁이 되었다.

쏟아진 관심은 언제나처럼 노동조합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파업으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상황만을 입맞추어 보도했다.

- 패딩에 핫팩… 민노총이 난방 끊자 '냉골 서울대'(조선일보, 2/9),
- "냉골 도서관, 애꿎은 학생들만 피해(동아일보, 2/11)


이들은 학생과 노조를 노골적으로 대립시키면서 정작 핵심인 파업의 요구와 원인은 '임금 인상'이라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자유한국당 또한 "민주노총은 학생을 볼모로 잡은 억지파업을 당장 중단하라"며 논평을 냈다.

다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보수언론·정당의 이런 반응은 사실 노동 문제가 터질 때마다 수없이 반복되어온 클리셰에 가깝다. 내게 진짜 놀라운 일은 평소 지식인을, 합리적 공동체를 자처해온 서울대의 교수·학생사회마저 파업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장이자 사회학과 교수인 서이종 교수는 조선일보에 직접 <도서관 난방 중단… 응급실 폐쇄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기고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는 아무리 어려운 사정으로 파업을 하더라도 "미래 인재들의 공부와 연구를 직접 방해"하는 행위는 "금기"라며,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피해를 입히면서까지 도서관 난방을 중단했던 파업은 "헬조선의 끝판왕"이라고 일갈한다.

심지어 최근 사회적으로 지탄받았던 "민노총은 사회악이다"라는 말까지 굳이 인용하면서 노조 매도하기에 열을 올렸다. 아무리 파업해서 원래 하던 일을 하지 않았기로서니, 이제는 나라경제 타령을 넘어 헬조선을 만든 책임까지 떠맡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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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조선일보에 실린 서이종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장의 칼럼 ⓒ 조선일보 PDF

 
하지만 '일부 교수'들만의 인식이 아니었다. 서 교수의 글은 학내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서 600개가 넘는 추천을 받는 등 높은 지지를 받았다. 난방 중단에 분노한 학생들로 인해 학내 커뮤니티는 파업을 비난하는 익명의 글로 넘쳐났으며, 총학생회에 반대행동을 촉구하는 적극적인 요청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한 학생은 노동자들이 학내에 부착한 손자보에 "가정부가 보일러실 점거하고 집주인 행세 하려는 꼴"이라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이번 일로 모교를 찾았던 나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경악스러웠다. 이쯤 되니 도서관 이용의 불편함 때문에 화내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노동에 대한 천시가 이번 파업을 기회 삼아 분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피해자, 불공정... '냉골 도서관'을 둘러싼 프레임

이번 파업 사태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학생들이야말로 파업의 진정한 '피해자'라는 주장들이었다. '미래 인재' 학생들의 공부할 권리는 '서울대생'이라는 학벌주의와 결합해 그 어떤 경우에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이 되었다. 난방이 중단된 건물은 중앙도서관 이외에도 행정관 등 몇 개의 더 있었으나 유독 도서관만 강조된 이유다.

그렇다면 왜 이런 주장은 호소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이는 서울대 학생들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청년이라는 사회적 약자로서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2월 9일 TV조선은 학생들이 준비하는 변리사·회계사시험, 행정고시 등을 나열하며 '힘없는 취준생'의 피해를 조명했다. 학생들 스스로도 자신을 사회적으로 '취약한' 고시생이라 여기며 힘센(?) 노조와 대학본부 사이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노동자들이 그간 어떤 어려움을 겪어왔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됐다.

물론 파업으로 인해 학생-고시생들이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취업준비와 고시공부를 하는 학생들을 보호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을 권리 때문에 노동자들의 파업할 권리를 유보하라는 것은 분명히 문제다.

자기계발로 더 나은 삶을 지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 자유가 타인의 기본권까지 가로막을 수는 없다. 더구나 그 자유가 가로막는 것이 '최저임금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의 조금 더 나은 삶'이라면 더더욱 그래선 안 된다.

하지만 이 간극은 계속 넓어질 것 같다. 지금의 청년들은 IMF 경제위기 이후 '경쟁'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기며 성장했다. 이들에게 사회의 역할은 자신들이 경쟁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니, 경쟁이 아닌 집단행동으로 권리를 신장하려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불공정' 그 자체로 느껴진다.

그런 그들에게 유럽식 시민윤리를 들이대며 파업에 대한 양보만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받아질 수밖에 없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있을 수 있어도 "부당해도 괜찮아"는 있을 수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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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7일 파업을 선포하고 행정관과 도서관 등 3개 건물 기계실에 들어가 난방 장치를 끄고 무기한 점거 농성을 했던 서울대 시설관리직 노조는 11일 대학 측과 잠정 합의안에 의견을 모았다. 2019.2.12 ⓒ 연합뉴스


나 역시 당장 시험이 코앞인 친구들에게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법부터 배우고 오라'는 말을 하고 싶진 않다. 당장 파업에 분노해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이게 된 개인을 비난하는 것은 결국 구조가 아닌 개인에게 책임을 돌린다.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다.

구조에 순응하고 그 속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있을까. 무한경쟁 속에서 여유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 이들이 파업을 지지할 수는 없더라도 비난하고 방해하지는 말았으면 할 뿐이다.

오히려 나는 묻고 싶다. 학생들이 이토록 왜곡된 노동관을 가지게 되는 동안 대학 교육은 무엇을 가르쳤는가? 나의 자기계발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이 성공한다는 교훈은 누가 가르치고 있는가? 각자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챙겨야 하고, 경쟁을 위한 노력을 보호하는 것이 다른 가치들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은 누가 재생산하고 있는가?

실은 우리 시대의 대학이 그런 학생을, 그런 인재를 길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노동 정서는 기업화된 대학이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우리 시대의 대학이 보장하는 학습권 속에서 학생은 무엇을 학습하는가? 세계를 보다 정합적이고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에는 세계를 유지하고 변화시키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부분은 빠져있다는 말인가?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그 중요하다는 '교육'과 '연구'가 누구의 노동 위에 서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는 말인가?

'대학'은 이미 파산했다

대학이 교육하는 세계 속에는 노동이 존재할 곳이 없었고, 바로 앞에서 펼쳐진 노동의 세계 앞에 대학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거부반응뿐이었다. 서울대 파업은 이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인 셈이다. 이미 비판적 지식의 요람으로서의 대학은 파산한 지 오래고, 그저 고급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지식공장으로서의 대학기업만이 존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대학의 학습권은 오직 고시와 취업준비만을 자신의 영역으로 하는 것이 아닐까.

서이종 교수가 역설하듯,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대학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 대학이 월 150만 원 남짓 받는 최저임금 노동자들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껴야 한다. 그 중요하다는 미래 인재들의 교육환경을 최저임금으로 후려치는 곳이 대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4차 산업혁명을 들먹이며 대학의 교육과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는 그의 글은 오늘날의 대학이 자신이 누구의 땀방울 위를 밟고 서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기능인들의 집합소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줄 뿐이다. 대학 당국이 진정으로 학생들의 교육을 걱정하여 '학습권'을 운운하는 것이라면, 노동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부터 가르쳐야 한다. 노동이 천시받지 않는 대학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것은 그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대 #서울대학교 #노동 #노동조합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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