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으로 논쟁하는 당신에게 무기가 되어줄 책

[서평] '미투의 정치학'... 이 사회를 바꿀 힘은 우리에게 있다

등록 2019.02.20 11:05수정 2019.02.2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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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2심 선고일인 2월 1일, <미투의 정치학>(정희진 엮음, 권김현영·루인·정희진·한채윤 씀, 교양인, 2019)의 예약 판매 알람이 울렸다. 예약 주문해 발행일인 2월 15일, 책을 손에 쥐었다.

나의 삶은 나도 모를 위험한 곳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정작 그 삶을 살아 가아먄 하는 내가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잠 잘 시간도 밥 먹을 시간도 줄이며 급히 책을 읽어 치우는 버릇이 있기도 했다.

지금은 무엇을 모르는지를 생각하면서 책을 고르고, 우선 쌓아 두고, 그때그때 생각이 필요한 토픽에 따라 집어 든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는 편이다. 어쨌든 여전히,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늘 읽어야 할 책은 쌓여 있고, 이 책도 그렇게 쌓아 올린 책 무덤 속에서 얼마간 잠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책을 둘러 싼 반응들과 저자들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 책이 다루는 이슈는 좀 급했다. 일단은 읽기 시작하고, 틈틈이 읽어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폈다. 이슈를 따라 오는 동료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이들을 위해서 자야 할 시간을 조금 내어 보자는 마음이었다.

책을 펴자, 엮은이가 쓴 서문은 책에 수록된 다른 원고들만큼 길었다. 정희진의 서문 '일상의 혁명, 미투의 정치학'을 읽고 나니 책을 접을 수가 없었고, 결국 루인 마지막 원고 '젠더 개념과 젠더 폭력'까지 내달리며 읽었다. 마음에 남은 '독후의 감'을 조금이나마 털어 보고자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적어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새벽을 맞았다.

책 읽을 때 밑줄 치거나 귀퉁이를 접지 않고 딱 책 한 줄 사이즈로 들어가는 플래그를 붙이는데, 곱씹을 데가 너무 많아 새로 꺼낸 플래그 한 묶음을 거의 다 썼다. 이 책은 정말 '최전선' 한국 페미니즘 도서이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서평을 쓴다. (평소 '최전선'이라는 말이 이래저래 오용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 
 

미투의 정치학 미투의 정치학을 다 읽고 ⓒ 홍혜은

 
서문을 포함 다섯 개의 원고에는, 메갈리아 탄생 이후 지난 몇 해 동안 여성주의자로서의 삶에 뛰어들며 내 머릿속을 온갖 의문과 모호함으로 가득 채우던 키워드들이 총출동한다.

페미니즘, 여성주의, 언어, 연구, 혁명, 공작, 정치, 미투, 섹슈얼리티, 성폭력, 여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성녀(어머니)/창녀 이분법, 당사자, 비당사자, 피해, 피해자, 타자화, 성폭력 피해 사건을 대하는 페미니스트의 윤리적 태도와 글쓰기, 여성 내의 차이와 분열, 정조, 저항과 동의를 넘은 성적 자기결정권 논의, 청소년 성교육, 트랜스젠더퀴어, 섹스/젠더 이분법 비판, 젠더 폭력, 그리고 연대.

한 장 넘기면 그 다음 장, 플래그는 늘어가고, 머릿속에선 생각들이 쏟아져나오고, 지금껏 보아 온 많은 것들이 섞이고 휘몰아치고 풀리고 정돈되고 질문거리가 또 남는다.
 
최근 페미니즘 카페 두잉에서 2월 특강으로 정희진의 '우울과 자살의 인문학'을 들었다. 강연자는 매우 지쳐보였고, 강연 내내 <미투의 정치학>을 만드느라 너무 많이 괴로웠단 얘기를 반복했다.

당시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2005년 발간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며, 결국 이 텍스트의 메시지가 십여 년 후의 나에게 전달되고,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놀랍다. 한편으로는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해 왔지만 그만큼 변하지 않는 사회에 부딪혀 온 세월의 지난함이 가늠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강연자의 글쓰기에 대한 괴로움 토로에 '이 미친 세상에 미치지 않기는 쉬운가,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나' 하고 생각하며 괴로움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간을 읽고 난 이후 더 크게 이해가 갔다.
 
정희진의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 개정판 서문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성별 분업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의 여성주의"다. 즉, 돌봄 노동을 '양성'이 나누고, 여성에게도 인간의 영역에의 진입을 허하라는 투쟁이다.

다음으로는 "사회, 인간, 자연을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요소 혹은 분석과 파악의 원리로서 젠더"다. 젠더를 고려하지 않고는 사회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니, 사회를 분석할 때 젠더 시각을 반영해야 한다는 의미다.

준비된 혁명은 없다

마지막은 "성별을 '초월'하여 새로운 대안적 인식론으로서의 여성주의"다. 이 시각에서 볼 때 페미니즘은 "현재 지구의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대안적 인식론으로서의 여성주의는 기존 사회의 궤도 밖에 존재하면서도, 사회의 궤도 수정을 돕는다." 즉, "선택지 밖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도란스 총서 4권인 <미투의 정치학>은 바로 세 번째, '인식론을 다시 쓰기'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안희정 사건을 비롯, 각종 성폭력/젠더폭력 사건을 해석하는 강자의 인식론에 대항해 인식론을 다시 써 내려 가기를 제안하고 있다.

어떻게 인식론을 다시 쓰는 일이 쉬울 수 있나. 어떻게 페미니즘이, 새로운 젠더의 인식론이 다수의 것일 수 있나. 강자의 관점을 체화한, 그들의 객관을 나의 객관으로 믿고 있는 다수 말이다. 그렇기에 성폭력은 소수(numerical minorities)의 문제가 아니고 소수자(oppressed minorities)의 문제임에도, 늘 사소한 소수의 문제로 치환되어버린다. 이 책은 이 지점에 대한 정면적 문제 제기다.

특히 안희정 사건이 궁금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들을 위해 힌트를 주자면, 권김현영의 챕터인 '그 남자들의 여자 문제'는 현장감 넘치는 재판 공청기다.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의 관점 그 자체를 뒤집고, 소수자들이 연대하기를 요청한다. 또한, 사회를 바꿀 힘은 바로 '우리'에게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최근 한 대외 말하기 자리에서 나 역시, "나는 이 사회를 바꾸는 힘이 '가난한 여성'들에게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사실 '가난한 여성'은 내가 아는, 내 삶에 체화된, 가장 친숙한 소수자의 이름이다. 이 이름을 무엇으로 다시 채워도 좋다. 사회는 소수자에게 수치를 주는 방식으로 침묵시킨다. 그렇기에 사회의 다수(majorities)는 모든 생애주기 과업을 성실히 수행해 낸 일부로 표상된다.

물론 환상이다. 이는 현실이 아니다. 억압 받는 소수자는, 수적으로 소수가 아니다. 그들의 삶은 이미 무수히 존재해 왔다. 다만 수치와 낙인에 저항할 새로운 인식론이 부재했기에, 제대로 말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의 삶을 다시 정의하고, 각자의 억압 구조에서 접점을 찾아낼 때, 혁명이 시작되리라 믿는다. 그래서 미투는 이미 "일상의 혁명"이다. "모든 혁명은 미완이라는 의미에서, 곳곳에 반동이 매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에게 충격과 격세지감을 안겨주었다는 면에서, 혼란 속에서는 늘 장사꾼과 '밀정'이 활보한다는 의미에서..." 혁명은 이미 시작됐다. "준비된 혁명은 없다."(책 83~84쪽)
 
책의 작업 방식과 서술의 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다. 페미니스트의 작업은 서구/남성/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주류의 작업 방식과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한 권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겠다는, 혼자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는, 하나의 진리를 설파하겠다는 책은 페미니스트의 책일 수 없다.

차이의 연대, 차이의 정치

그렇기에 페미니즘은 몇 명의 위대한 인물, 스타를 길러내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페미니즘은 패치워크와 콜라주 같은 것이지, 시스틴 성당 벽화나 제단화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 책에는 많은 이들의 노고가 들어 있으며, 그것이 '페미니즘적'이다. 이 책은 '쌓아 올린' 책이다. 책의 저자들은 분명 평소 각자의 톤이 분명히 다른데, 다섯 편의 원고가, 그 내용과 어조의 측면에서 서로서로 보완하고 이어져 한 권의 작업물을 완성시켜 낸다.

'페미니스트'를 하나의 집단으로 치환하고 싶은 일부의 바람과는 달리, 페미니스트는 모두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 이 책은 '차이의 정치, 차이의 연대'를 고민한 오랜 기간을 거쳐 나왔음이 틀림 없고, 특히 앞서 도란스 총서 1~3권이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밑거름이 됐을 것이라 짐작한다.
 
<미투의 정치학>이라는 패치워크를 이루어낸 사람들은 편자와 저자만이 아니다. 도란스 구성원인 이름 실린 저자들, 원고가 빠진 다섯 번째 저자(서문과 책표자 뒷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실무적으로는 글을 만지고 책의 만듦새에 관여한 출판사 사람들.

그리고 안희정 사건 공동 대책 위원회를 비롯 미투의 계보를 이어 온 많은 성폭력 사건의 중심과 주변에서 시간과 노력을 쓴 페미니스트들, 참고문헌 목록을 이룬 지식의 계보 위에 놓인 다른 연구자들, 이 책에 등장한 수많은 개념들이 쌓이고 진전되게 해 온 당사자, 실천가들이 있다. 이들 모두가 책을 만들었다. 이 작업은 앞으로도 '완결'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이 책은 '설득하는 페미니즘'의 계보를 다시 쓰고 있다는 점에서 각종 미투 사건을 가지고 온오프라인에서 '키배(키보드 배틀)'를 뜨고 논쟁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어떤 소수자가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인식론이 얼마나 주류사회의 그것과 강제적으로 일치해 왔는지를 알게 된다면, 앎의 이후 이 사회를 바꾸는 흐름에 자연스레 동참하게 된다면, 그래서 서로 곁을 내 주는 소수자들이 늘어난다면, 이 책은 그것으로 시대의 소임을 다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2019년 2월 16일 글쓴이의 SNS에 발행한 서평을 토대로 수정·재작성했습니다.

미투의 정치학

정희진 외 지음,
교양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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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저자. 소수자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관심사는 마이너리티/섹슈얼리티/몸/시민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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