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민족독립의 성지, 마포 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 역사 재조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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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기(jbg1219)등록 2019.02.19 09:13
정부는 민족독립의 성지, 마포 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 역사 재조명해야
 
정부는 친일적폐 청산을 통하여 역사의 현장을 재조명하고 바로 세워야,
3.1절 제100주년 맞아 마포 경성형무소의 역사 재조명 통하여 국민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려야 하며 마포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을 서둘러 민족독립의 성지로 삼아야 할 것이며 옥사자 보상과 명예를 찾아 주어야 한다고 본다.
 
마포 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는 현재 국민대다수가 잊고 모르고 있는 실정으로 정부가 홍보하고 알려 민족독립의 성지로 역사관 건립을 통하여 잊혀진 역사를 알려야 한다. 당시 악명이 높던 마포 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 역사관 건립 통하여 교훈 삼아야 하며 2019,기해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로 미발굴독립유공자 발굴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을 위해 항일독립투사들의 무덤이 됐던 마포 공덕리 105번지 후손들이 기억하게 그 자리에 "마포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하여 역사적 재조명 통하여 사실을 알려주어야 할 것이다. 민족독립을 위해 항일독립투쟁과 항일의병활동이나 사회주의운동을 하시다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강제노역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민족독립의 의지와 절개를 지키며 숨을 거둔 역사의 현장이다. 옥사나 병사를 해도 시신도 돌려주지 않아 혼백이 지금도 마포 공덕동 하늘인 구천을 맴돌고 있는 신세이다. 그래도 그 명예도 인정받지 못하거나 찾지 못하고 시신도 수습하지 못해 흔적조차 사라진 마포 경성형무소의 주변을 머물거나 애국혼령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다는 아픈 사연을 왜 모르는가? 지난 역권들이 역사를 지운다고 해서 역사가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생전에 걸어 들어가면 살아서 생전에 걸어 나오지 못한다던 그 형무소가 바로 마포 경성형무였다.
 
식민지역사관을 건립하라'는 글을 보내는 정병기(62)씨의 직함은 '미발굴 독립유공자 후손'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마포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음을 밝히기 위해 국가를 상대로 41년째 자손된 도리를 다하고 민족독립을 위해 목숨을 받치신 증조부 정용선 선생의 명예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다.
 
당시 마포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서울에 세워 식민통치의 상징으로 해방 전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까지 사용되었던 형무소이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인 1908년에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다. 경성감옥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신설되어 경성감옥으로 불리게 되었고, 서대문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8.15 광복이후 1946년에 마포형무소로,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신설된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폐지되었다. 마포형무소 건물은 이전 후 사라졌고, 그 터에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이 들어서 있다. 1995년에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 마포형무소 자리에 "1912년 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이 설치되었다.
 
1912년 일제가 공덕동 소재 마포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를 지어 독립운동가를 고문·단죄하던 곳으로, 1908년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독립운동가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매년 3.1절과 8월15일 광복절 그리고 11월17일 애국선열의 날을 맞았다. 지난 41년간 6번의 공훈심사를 받았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애국선열과 우리 선조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어 가면서까지 만세를 부르고 모진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 강토 그 어느 곳인들 독립을 위해 피 흘렸던 역사가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지금은 잊어져 가고 있는 이 장소만큼은 그 의미를 다시 새겨야만 하는 중요한 한 장소가 있다. 바로 역사의 현장으로 항일독립투사들과 항일의병활동가들에게 악명 높았던 마포 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이다.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지고 있지만 바로 이곳이 독립에 몸 받쳤던 수많은 이들의 피울음이 새겨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증조할아버지 산소가 없는 사실을 알고 고교 졸업 후부터 관련 기록을 찾으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경북 봉화군 사무소에서 어렵게 찾은 호적에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 선생이 1928년 5월 20일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는 이 호적을 근거로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수형인 명부' 같은 독립운동을 증명하는 자료가 더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반려됐다. 증조부가 독립군 자금 조달을 위해 부잣집을 털기도 했다는 동네 원로들의 인우(隣友)보증서도 제출했으나 소용없었다. 정부기록보존소·국사편찬위원회부터 주미·주일 한국대사관까지 자료를 요청했지만 수형인 명부나 판결문은 없다는 답변만 왔다. 봉화군청 공무원은 "1980년대 정부가 실수로 기록 폐기를 지시해 수형인 명부가 폐기됐다"며 관보를 보여줬다고 한다. 정씨는 "정부가 기록을 없애놓고 이제 와서 그 자료를 요구하면 어떡하느냐"고 개탄했다.
 
그 후 정씨는 증조부를 비롯한 선열들이 스러져간 마포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 역사관이라도 건립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하고 다녔다. 경성형무소는 1908년 지은 서대문형무소가 수감자들로 넘치자 1912년 서울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에 지어졌다. 마포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는 광복 후에도 교도소로 쓰이다 1961년 안양교도소로 옮겼고 그 자리에 서울 서부지방법원과 서부지검이 들어섰다. 지금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쓴 표지석만이 경성교도소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고 있다. 서대문형무소는 서울구치소로 바뀌어 1987년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옛 건물을 보존하고 역사관이 마련됐다.
 
마포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에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는 장기수와 무기수만 보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1년 1월 1일자는 경성형무소에 1130명이 수감돼 있고 그중 무기수가 105명이라고 전했다. 정씨는 "경성형무소는 '살아 나오기 어렵다'고 악명 높았던 독립운동의 성지(聖地)"라고 했다. 독립운동가 일송(一松) 김동삼 선생도 1937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경성형무소에서 독립투사들은 모진 고문과 탄압으로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으면서도 의연하게 싸웠다. 독립투사들은 단식하며 일제 간수들에게 맞섰고 이들이 부르는 '대한 독립 만세'와 노랫소리가 감옥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2년 7월 20일자는 "마포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에서 죄수 전부가 만세를 높이 부르고 단식동맹을 결행하여 부근 주민들이 물결같이 몰려들어 용산서 경찰이 총출동했다"고 보도했다.
 
금년은 특별한 해로 3.1절 제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그런 독립투사들의 투쟁 현장인 마포경성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는 이제 없고 그 항일 역사도 사라졌다. 정씨 증조부 정용선 선생의 항일 투쟁을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경성형무소에 수감됐던 수많은 독립투사의 항일투쟁 역사도 함께 묻혀버린 것이다. 정씨는 "후손들의 역사의식 부재(不在)"라며 "증조부의 희생은 '버림받은 애국'이었다"고 말한다. 광복 94년을 맞는 기해년에도 정씨의 목소리에는 호령과 탄식이 섞여 있었다. 3.1절 제100주년을 맞아 이제라도 정부는 친일적폐청산을 통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민족역사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되어 애국선열의 정신과 자세를 본받고 교훈삼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소망한다. 글/ 정병기<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유튜브 동영상/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 교훈삼아야 하며 항일독립투사, 중형을 언도받은 수형자 ,모진 박해와 강제노역으로 옥사한 역사의 현장 기억하고 본받아야 한다. 아직도 애국혼령혼백이 구천을 맴돌고 있다.
동영상 첨부 http://www.youtube.com/watch?v=g6gEv0Ug4gk
 
덧붙이는 글 당시 마포형무소(麻浦 京成刑務所)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이 서울에 세워 식민통치의 상징으로 해방 전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까지 사용되었던 형무소이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전인 1908년에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이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다. 경성감옥의 수용 공간이 부족해지자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새 감옥이 신설되어 경성감옥으로 불리게 되었고, 서대문의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8.15 광복이후 1946년에 마포형무소로, 1961년에는 마포교도소로 각각 개칭했다. 1963년 경기도 안양시에 신설된 안양교도소로 이전하면서 폐지되었다. 마포형무소 건물은 이전 후 사라졌고, 그 터에는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이 들어서 있다. 1995년에 마포구 공덕동 105번지 마포형무소 자리에 "1912년 日帝가 경성형무소를 설치하여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이 옥고(獄苦)를 치렀던 유적지"라고 적힌 표석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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