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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첫 섹스를 시작하려 하는 장면에 담긴 '파국'

[리뷰] 거장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

19.02.21 11:40최종업데이트19.02.2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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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멕시코시티 로마구역 한 중산층 가정을 통해 그려낸 삶의 의미 ⓒ 네이버 영화

 
<로마>(감독 알폰소 쿠아론)는 멕시코시티 내 로마 지역을 배경으로 한 흑백영화다. 한 중산층 가정의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의 눈길로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격랑, 가정 불화, 개인의 불행, 그것을 극복해 내는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개똥을 치우느라 바닥에 뿌려놓은 비눗물이 네모난 수챗구멍 주변으로 끊임없이 흘러들다가 그 물이 다 빠져 나가기 바로 전 물에 수채구멍만한 하늘이 비치는데, 그게 영화의 시작이다. 개인적으론 그것이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었다.

올망졸망한 개구쟁이 아이들이 네명이나 되는 한 중산층 가정에는 클레오와 아델라라는 가정부가 있다. 이야기는 클레오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가정부 클레오는 끊임 없이 방안을 돌아다니며 침대를 정리하고,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걷어 빨고, 개똥을 치우고, 사모님 소피아와 그의 남편 차가 들어오고 나갈 때 개 보리스의 목줄을 잡고, 아이들을 깨우고, 재우고, 차와 간식을 준비하며 쉴 틈 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빨래를 하다가 시체놀이를 하는 주인집 아들처럼 하늘을 보고 누워 "죽는 것도 나쁘지 않네"라고 말하는 클레오의 모습에서 희망없는 그녀의 삶이 그대로 읽힌다.

영화는 사회적 격랑이나 삶의 질, 폭력과 야만을 계몽적인 언어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상황을 예견할 수 있는 배경 장면을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 읽어내도록 만들 뿐이다.

출근 길 집 앞을 지나가는 군인들, 영화를 보러 가면서 맞닥뜨리는 학생 시위, 격렬하고 잔인한 진압 모습, 가난한 이들과 무관한 축제, 산불이 나자 인간띠를 만들어 불을 끄는 모습, 신생아실의 아이들, 결혼식, 시신을 부둥켜 안고 울부짖는 여성을 무심히 지나치 거리를 보며 관객 스스로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야만 한다. 영화가 지루할만큼 느리고 음악이 없다. 절제된 대사와 상징을 품은 배경 장면으로 많은 것을 대신한 이유일 것이다.
  
영화는 개인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가정의 파탄, 섹스가 가져 올 파국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주인집 사모 소피아 남편이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상황은 다른 이와 전화를 주고받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클레오가 맞게 되는 파국은 남자와의 첫 섹스를 시작하려는 장면에 담겨있다. 임신을 하자 무책임하게 도망치는 클레오의 남자친구는 첫 섹스 전 알몸으로 샤워실 커튼의 봉을 내려 자신이 배웠다는 무술을 보여준다. 마지막에 봉을 클레오에게 들이대는 장면에서 폭력성과 파국을 예감할 수 있다. 
 

▲ 시체놀이 중인 클래오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클레오 ⓒ 네이버 영화

 
클레오는 남자친구에게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리지만, 그는 재킷을 영화관에 남겨둔 채 사라져 버린다. 사모님인 소피아는 임신 사실을 알린 클레오를 가정부에서 해고하는 대신 병원에 데려가 검진을 받게 한다. 만삭의 몸으로 주인집 할머니와 아기 침대를 사러 갔던 클레오는 시위대를 진압하러 가구점으로 처들어 온 용병을 보고 놀라 양수가 터진다. 

캐나다 퀘벡으로 연구차 갔다던 주인집 사모님의 남편은 다른 여성과 동거 중이다. 주인집 사모 소피아는 남편과 헤어져 홀로서기를 결심한 뒤 남편이 짐을 챙겨갈 시간을 주기 위해 가족 여행을 떠난다.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여행에 동행할 것을 권유한다. 
 
여행지 바닷가에서 놀던 아이들은 날이 어두워짐에도 계속 더 놀게 해달라고 조르고,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아이들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한 뒤 잠시 자리를 비운다. 날은 더 어두워지고 점점 더 큰 파도가 밀려와 주인집 딸 소피가 바닷물에 익사할 위기를 맞는다. 클레오는 수영을 못하지만 위험한 주인집 딸 소피를 구하려 바닷물에 들어간다. 거센 파도에 밀리고 밀리며 마침내 클레오는 주인집 아들과 딸 소피를 구해 해변으로 돌아온다. 그리곤 돌아온 사모 소피아, 아이들과 서로 부둥켜 안고 운다. 그러면서 클레오는 고백한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성들이다. 두 주인공 소피아와 클레오는 남자의 배신으로 심리적 죽음을 경험한다. 남편이 떠나 파국을 맞은 가정, 임신을 알리자 돌연 자취를 감추고 책임을 강요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남자와의 사랑을 꿈꿨던 클레오는 아이를 낳기 원치 않았다는 고백으로 관계의 파국에서 온 희망 상실과 심리적 죽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들은 남자들의 부재를 여성의 연대와 사랑으로 극복하며 새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배경 내내 깔려 있던 폭력적인 사회, 남성들이 배반한 가정의 일상과 가정부 클레오의 눈길을 통해 감독은 관객들이 무엇을 전해받길 원했을까. 개똥이 널브러진 세상, 폭력과 진흙탕이 난무하는 곳에 내팽개쳐진 삶이라도 '사랑과 연대'로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 또 강인한 어머니의 사랑의 힘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남편에게 기대어 여유로운 삶을 살던 소피아는 새로운 삶을 준비하며 차를 작은 것으로 바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편과 타던 차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돌아오기 전 소피아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이제 출판사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여행에서 돌아온 클레오는 아델라에게 해 줄 이야기가 많다고 말한다. 버림받은 채 임신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던 클레오, 수영을 못하면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에 들어가 아이들을 구해낸 클레오. 그녀는 앞으로도 여기저기 쌓인 개똥을 치울 것이고, 옥상을 오르는 계단 한 켠 작은 방과 가정부의 고단한 일상은 여전하겠지만, 분명 그의 삶은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남성에게 기대어 덧없는 꿈을 꾸다가 이후 상실과 절망을 극복한 클레오가 옥상을 오르는 발걸음이 조금 가벼워 보였던 것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테니 말이다.
로마 알폰소 쿠아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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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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