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와 한국당의 만남... 극우 등장의 숨은 공식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한국 근현대사의 극우세력 등장 패턴

등록 2019.02.21 18:40수정 2019.02.2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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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 '대선 무효' 청와대앞 1인 시위 2.27 전당대회 당 대표 후보 등록 한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지난 13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광장에서 ‘여론조작 대선무효! 문재인, 김정숙 특검하라!’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 권우성

 
자유한국당 내에서 극우세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016년 11월 19일부터 결집된 태극기 세력 일부가 2.27 전당대회와 김진태·지만원 '5.18 망언'과 결합하면서 이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태극기 세력을 대표하는 대한애국당(의석 1석)이 집회장 밖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보다 강력한 정치적 통로를 갈망하는 극우세력의 욕구가 보수 정당인 한국당을 매개로 표출되고 있는 것.

극우세력이 결집해 진보 진영을 위협 내지 자극하는 양상은 최근 역사에서 크게 세 차례 있었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2016년 촛불 정국, 1945년 해방 정국, 1894년 동학혁명 정국이 그 사례들이다.

촛불정국-해방정국-동학혁명정국의 공통분모

1812년 이래, 한반도에서는 민중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양상은 일제강점기 때는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등으로 표출되다가 1945년 이후로는 각종 민족·민주 운동으로 계승됐다. 200년 넘도록 민중의 정치적 도전이 지속되는 양상은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1812년은 홍경래의 난이 벌어진 해다. 교과서나 역사서들은 이 사건이 1811년 12월 18일에 발생했다고 적혀 있지만, 음력으로 순조 11년 12월 20일자(양력 1812년 2월 2일) <순조실록>에 따르면 음력으로는 신미년(순조 11년) 12월 18일, 양력으로는 1812년 1월 31일 발생했다. '1881년 음력 12월 18일'을 '1881년 12월 18일'로 착각하다 보니 이런 오류가 발생했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정치에 대한 저항이었다. 왕실이 아닌 왕실 사돈들이 국정을 농단한 이 시대에는 일개 가문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돌아가는 파행적 양상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소수 특권층한테 권력과 부가 집중되고 서민 경제가 피폐해지면서 양극화가 심해졌다. 홍경래의 난은 이래서 발생했다.


그런데 조선 정부와 우파는 홍경래의 난을 진압했을 뿐, 동종 사건을 예방하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했다. 그래서 1800년대 내내 민란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역사학자 방용식의 논문 '재지사족의 체제 이반과 1862년 진주민란'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재지사족(在地士族)은 향촌에 거점을 둔 양반을 지칭한다.
 
"백성들이 국가의 잘못된 통치에 저항하는 민란이 전국에서 발생했고, 1800년대에는 모두 100여 건의 민란이 일어난 것으로 집계된다." -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가 2017년 발행한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제16권 제1호에 수록
 
숱한 민란이 발생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 이로 인해 터진 사건이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동학혁명이다. 하지만, 이 운동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홍경래의 난이 벌어진 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는 주요 국가들의 지배층이 교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유럽에서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부르주아들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에서는 1868년 메이지유신과 1912년 중국 신해혁명 등을 통해 지배층 교체가 이뤄졌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1812년부터 항쟁이 끊임없었지만, 지배층 교체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중의 불만이 한없이 누적돼, 정치지형을 계속 흔들어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파, 긴장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1812년 이후로 우파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중이 정치체제와 경제구조에 불만을 품고 세를 응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다 보니, 항상 긴장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서를 대변하는 현상이 우파 강경 세력인 극우세력의 등장으로 표출되곤 했다.

극우세력은 1894년 동학혁명 때는 민병대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도 이런 정황이 묘사돼 있다. 이 시기에는 지주층이 민병대를 결성해 농민군(소작농 중심)의 혁명운동에 '맞불'을 놨다.

극우세력은 제국주의가 지주계급과 우파의 이익을 비호해준 1910~1945년엔 상대적으로 잠잠했다. 그러다가 1945년부터 친일청산과 단일정부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등장했고, 2016년 이후로는 박근혜와 구체제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거리를 누비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동학혁명 상상화. ⓒ 김종성

 
[극우세력 등장 패턴 ①] 외국 군대의 주둔
   
그런데 극우세력의 등장에는 패턴이 있다. 그중 두 가지가 지금부터 제시된다. 이들은 일반 보수세력을 우군으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보수세력처럼 소수파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보수세력은 정치권이나 재계에서만 다수일 뿐, 숫자 면에서는 엄연히 소수다. 극우세력은 훨씬 더 소수다.

이런 점이 극우세력의 등장 환경에 영향을 주고 있다. 소수파이기 때문에 이들은 아무 때나 거리로 나올 수 없다. 다수파인 민중과의 물리적 충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근 한국사에서 이들은 외국 군대가 주둔해 있을 때만 거리로 몰려나왔다.

1894년, 1945년, 2016년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외국 군대가 주둔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소수파가 다수파를 상대로 자신 있게 논쟁과 무력투쟁을 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외국군이 그들에게 '믿는 구석'이 됐던 것이다. 꼭 외국군이 있어야 극우파가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200년간 한반도에서는 민중의 열기가 워낙 뜨겁다 보니 외국군이 주둔한 상황이 아니면 극우파가 섣불리 나오지 않았다.

1894년에는 일본군이 동학군을 진압하고자 조선에 주둔하는 상황이었는데, 극우세력은 민병대를 조직해 동학군과 싸웠다. 동학혁명 초기에 농민군이 전라도를 순식간에 점령한 사실, 또 고종 임금이 외국군의 지원을 요청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동학군은 조선 영역 안에서 최강의 군사 역량을 보유했다. 그런 동학군을 상대로 극우세력이 민병대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군 주둔 이후에는 동학군의 위세가 크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해방정국에서도 한국인 다수는 친일청산과 단일정부를 지지했다. 이 노선을 추구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전국 각지에서 지지를 받았다. 한반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도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건준이) 불과 수 주 만에 농촌을 지배"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농업 사회였으므로, 농촌을 지배하는 것은 곧 전국을 지배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서북청년단 등이 좌우 대결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경찰·기업·언론을 움직여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이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이렇게 미군의 후원을 받는 가운데 극우세력이 진보진영을 제압해 나갔다. 언론인 리영희의 <대화>는 이렇게 말한다.
 
"남한에 잔존했던 악질적인 반역자들과 친일파들이 이북에서 도피해온 같은 부류의 악질분자들과 결탁하여 남한 사회를 장악해버렸던 겁니다. 이북에서 도피해온 그런 부류의 청년들이 서북청년단이란 것을 결성해 미군정과 경찰의 비호 하에 온갖 테러와 불법행위, 폭력을 자행하고 있었어요."
 

1948년 5월 31일 국회 앞에서 소련군 철수를 외치는 서북청년단.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태극기 집회를 여는 극우세력 역시 주한미군에 심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들의 집회에서는 성조기를 흔들며 미국의 개입을 탄원하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타나고 있다.

6월항쟁 당시의 주한 미국대사였던 도널드 그레그의 회고록 <중국통>에서 느낄 수 있듯이, 1980년 광주항쟁 때 전두환 정권을 비호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확산됐다. 주한미국문화원들이 연달아 불탄 뒤, 미국은 한국 민중의 정치운동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부산미국문화원 방화의 배후 조종자로 징역을 살았으며 지금은 황교안 전 총리의 정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김현장씨 같은 사람들을 미국은 무척 두려워했다. 그래서 해방정국 때와 달리 미군이 좌우 대결에 개입할 가능성이 별로 없는데도, 극우파는 막연한 생각으로 주한미군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

[극우세력 등장 패턴 ②] 동아시아 질서 교체 

외국군이 주둔한 상황에서 싸움판에 뛰어들었다는 점 외에,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패턴은 극우세력의 등장 시기가 동아시아 질서의 교체 시기와 겹친다는 사실이다. 1894년은 일본이 동아시아 최강 청나라를 꺾고 이 지역 질서를 바꾸기 시작한 시점이다. 1945년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확립하기 시작한 때다.

극우세력이나 보수세력 같은 우파는 진보 진영에 비해 거리에 나오는 빈도가 낮다. 웬만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가만히 있어도, 법률·제도가 자기들 쪽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현 체제 아래 정권은 기본적으로 가진 자의 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주먹을 쥐고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은, 좀 더 유리한 정보력을 발판으로 상황의 긴박성을 일찍 예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뭔 일이 날 것만 같은 긴박감을 느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800년대 내내 민란을 숱하게 지켜보던 우파가 1894년에 민병대를 조직한 것, 일제강점기 내내 항일운동과 노동자 투쟁을 숱하게 지켜봤던 우파가 1945년에 극우 청년단체들을 후원한 것 등은 '지금은 행동해야 할 때'라고 직감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27, 한쪽에선 동아시아의 운명이... 다른 한쪽에선 우파의 운명이

좌파에 비해 우파는 새로운 지식에 둔감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이는 우파가 대중을 상대로 새로운 지식을 이야기하는 기회가 적기 때문에 나타나는 착시현상인 면이 없지 않다. 좌파와 달리 우파는 자신이 아는 새로운 지식을 대중 앞에서 잘 꺼내지 않는다.

최고급 정보는 공부를 많이 하거나 머리 좋은 사람에게 가는 게 아니라 돈 많은 사람을 찾아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1894년과 1945년에 우파가 상황 변화를 신속히 간파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2016년 이래로 3년간이나 극우파가 거리에 나와 있는 것은 한반도가 머지않아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것임을 예고하는 전조(前兆)일 수 있다. 비록 현 시점에서는 우파의 승리를 확신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2월 27일에 한쪽에서는 동아시아의 운명을 놓고 담판이 벌어지고, 한쪽에서는 우파의 미래를 결정하는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치러진다. 이 사실은 국제질서의 급변 속에서 생존을 모색하는 한국 우파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자유한국당 #태극기 세력 #5.18 망언 #서북청년단 #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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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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