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찰 보고서 베낀 한국 독립운동사 기록

경주 3.1만세운동 거사 장소 기록 달라... 노동리 교회로 바로잡아야

등록 2019.02.22 12:10수정 2019.02.22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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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의 기미년 3.1만세운동은 3월 11일과 12일 경주 노동리 교회 또는 도동리 교회에서 박래영 목사, 박문홍 영수 등이 3월 13일 경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사전논의 했다. 이후 12일 밤 박문홍 영수 집에서 태극기 300개를 제작한 뒤 새벽에 배포했으나 일경에 적발돼 체포되면서 13일 경주 장날 거사는 일단 실패한다.

그러나 이틀 뒤 이들의 뜻을 이어받은 최성렬, 서봉룡, 김억근, 박봉록 등이 주동이 돼 3월 15일 경주 작은 장날에서 만세를 벌였다. 경주 3.1만세 독립운동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이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사전에 모여 경주 장날 거사를 기획하고 도모했던 교회당은 도대체 어디일까? 국가기록물에서조차 노동리 교회 혹은 도동리 교회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혼선을 주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100년 전 경주에서 만세운동을 사전에 기획한 역사적 장소에 대해서는 시급히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 도동리-노동리 교회 혼재

현재 국가보훈처의 공식 간행물에서조차 어느곳에서는 도동리 교회로, 또다른 곳에서는 노동리 교회로 표기하고 있다.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 공훈록>에서 경주에 본적을 둔 3.1운동 관련 독립운동가는 모두 9명이 검색된다. 이 가운데 3명은 대구나 부산, 혹은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인물로 경주 만세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인물이다.

경주 3.1운동관련 독립운동가는 김성길, 김철, 김학용, 박문홍, 최성렬, 최수창 선생등 총 6명. 그러나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 게시된 공훈록에서조차 동일한 사건을 두고 노동리 교회와 도동리 교회가 뒤섞여 표기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주 3.1만세운동 관련 독립운동가 김성길 선생의 공훈록에는 노동리교회로 표기돼 있다. ⓒ 경주포커스

 
 

경주 만세운동의 핵심인물인 박문홍 선생의 공훈록에는 도동리 교회로 표기돼 있다. ⓒ 경주포커스

 
예컨대 김성길 선생의 공훈록에서는 '노동리 교회'에서 모의한 것으로 표기돼 있지만, 나머지 5명의 공훈록에는 '도동리 교회'로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서 검색 가능한 경주 출신 3.1만세운동 관련 독립유공자들의 공훈록에는 경주3.1만세 운동을 모의한 장소가 대부분 도동리(道東里 )교회로 잘못 표기돼 있고, 극소수만 '노동리((路東里) 교회'로 표기돼 있어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리 교회와 당시 있지도 않았던 도동리 교회가 혼용되면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경주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주최하는 경주시조차 지난 2월17일 언론사로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도동리 교회'라고 잘못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2월17일 경주시 보도자료. 도동리 교회로 잘못 적어 언론사에 배포했다. 의도하지 않은 왜곡이 일상화 되고 있는 것이다. ⓒ 경주포커스


경주시 보도자료를 인용한 대부분의 언론보도는 물론 심지어 다음과 네이버와 같은 주요 포털에 게시된 각종 사전에조차 당시 존재하지도 않은 도동리 교회에서 경주 3.1만세운동을 도모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사적 장소'에 대한 '의도하지 않은 왜곡'이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에도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잘못표기 시작은 일제 고등경찰요사

그렇다면 왜 당시에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도동리 교회라는 표현이 노동리교회 라는 표현과 뒤섞여 전해오고 있을까?

먼저 당시 경주3.1운동의 주동자격인 박문홍 선생의 판결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박문홍 선생은 교회당에서 1919년 3월11일~12일 청년 5~6명과 함께 경주 3.1만세운동을 계획하고 12일 밤 자신의 집에서 태극기 360개를 제작한뒤 배포하다 13일 새벽에 체포돼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박문홍 선생의 판결문에는 이와관련해 '노동리'(路東里) 라는 표현이 선명하게 나온다.
  
 

박문홍 선생의 판결문 원문.국가기록원 소장. ⓒ 경주포커스

판결문에서는 '대정 8년(1919) 3월12일 밤 경주면 노동리(路東里) 야소교(耶蘇敎) 교회당에서 만나 공모한후 다음날 13일 경주읍내 큰장날에...'라는 표현이 선명하다.<위 사진 색칠한 부분>

당시 경주지역에서는 현재 경주제일교회의 전신인 노동리(경주읍)교회가 유일했으며, 경주읍교회가 위치한 곳은 노동리 176번지였다. 현재 경주제일교회자리에 당시 예배당이 있었던 1931년 경주시가지 지도, 현재 제일교회 관계자들의 증언도 이와 일치한다.<아래 사진>
 

1931년 경주읍내시가약지도.둥근선으로 표시된 곳이 현재 제일교회가 있는 곳이다. ⓒ 경주포커스

 
이 교회 원로목사들의 증언도 일치한다. 강주복(78), 김의진(74) 원로장로는 2014년11월 8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기록에 보면 1920년 온 교우가 힘을 모아 한옥 와가 165㎡(50평) 예배당을 완공했다고 나와 있어요. 그 교회 사진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그 예배당 터가 성문 남문 밖 노동동 176번지 지금의 경주제일교회입니다."라고 증언했다.

경주제일교회 90년사(1992년)에 따르면 경주지역 최초의 기독교 교회는 1902년 성건동 197번지 초가에 마련한 임시 집회장이었다. 그후 현재의 제일교회자리가 있는 노동리로 옮긴 경위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 않다.

교회 관계자들은 1902년 초기 임시예배당에서 오래지 않아 노동리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그 당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1919년에는 노동리 교회가 경주지역에서 유일한 교회 예배당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일교회 90년사에서는 만세운동에 대해 "3월11일, 12일 밤 교회가 경영하는 계남학교 사무실에 모여 태극기 수백 매를 제작하여 학교 오물 수집장의 쓰레기 밑에 숨겨 두었다가 3월13일 거사할 것을 계획하고...."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계남학교는 1909년 노동리 교회가 부설로 만든 경주 최초의 서양 학교였다.

또한 독립운동가 공훈록 등에서 언급되는 정래영 목사가 제일교회의 전신인 경주읍교회의 목사로 봉직했으며, 박문홍 선생이 '교인 박문홍씨'라는 이름으로 제일교회의 당회일지에 남아 있는 점으로 미뤄 당시 경주에서 유일하게 노동리에 있던 교회당에서 '경주 3.1운동을 모의했던 점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보인다.

해방후 독립운동사 편찬, 일제 '고등경찰요사' 기록 베껴

그렇다면 당시 교회 위치나 재판기록까지 모두 '노동리'로 돼 있던 것이 왜 현재는 '노동리교회 '와 '도동리교회'로 뒤섞여 전해올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1934년 일제 고등경찰요사 경상북도 경찰부 편 기록에 단서가 나타나 있었다.

<경주포커스>가 경주 근현대를 연구하고 있는 아라키 준 박사의 도움을 받아 1934년 '고등경찰요사'경상북도 경찰부, <경주군 경주면>의 3.1운동 전후 보고서 기록을 살펴 봤더니 '도동리 교회'라는 표현이 이때 처음 나타난 것이 확인된 것이다.
 

고등경찰요사 경북경찰부 경주군 경주면 삼일운동 관련 기록.자료 아라키 준 박사 소장. ⓒ 경주포커스

 
기록을 번역해보면  다음과 같다.
  
'3월13일 미명에 ...유력신도 박문홍외 15명을 인치 취조한 결과 3월9일 경산군 고산면 사월리 목사 김기원이 3월9일 와서 독립운동을 권유하고, 박래영 목사, 영수 윤기효 박문홍 3인이 유력교도 5~6명과 함께 3월11일~12일 2회 '도동리 교회당에서 회합하고 독립시위운동을 하기로 협의하고, 불량청년 김성길, 김술룡등을 선동하여 3월13일 장날에 일으키고....'

1919년 4월15일 박문홍 선생의 판결문에서 '노동리 교회'이던 것이 15년이 지난 1934년 일제 '고등경찰요사'에서 '도동리 교회'로 잘못 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경찰의 기록은 해방후 독립운동사를 편찬할 때 그대로 인용된다. 멀게는 1934년 일본 고등경찰요사에서 시작돼 가깝게는 해방후 우리나라 정부가 편찬한 독립운동사에서까지 경주 3.1만세운동을 기획하고 도모했던 장소를 기록하면서, 당시 있지도 않았던 '도동리 교회'로 표기한 것이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올해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1970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3권, 삼일운동사, 하권 제5절 경주군편에서 경주군의 3.1운동에 대한 서술을 보면 일제 고등경찰 요사를 베낀 흔적이 뚜렷하게 확인된다. 독립운동사에 나타난 경주 3.1운동 기록이다.

"3월 9일 경산군(慶山郡) 고산면(孤山面) 사월리(沙月里)에 사는 기독교 목사 김기원(金基源)은 친분이 두터운 경주의 박내영(朴來英) 목사와 윤기효(尹璂涍) 영수 및 박문홍(朴文泓) 영수를 돌연 방문하였다. 김기원 목사는 이들에게 대구 학생 의거의 소식을 상세히 전한 후 이곳에서도 민족거사를 단행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박내영·윤기효·박문홍 3인은 유력한 교도 5,6명과 더불어 3월 11일과 12일 밤 2회에 걸쳐 도동리(道東里) 교회당(敎會堂)에서 모임을 갖고 이곳에서 단행할 민족의거를 협의하고 김성길(金成吉)·김술룡(金述龍)을 규후 이들과 같이 3월 13일 경주읍 장날에 거사하기로 약정하였다.…"<이하생략>

어처구니 없게도 해방된 지 25년이 지난시점, 독립난 나라의 정부가 펴낸 공식 독립운동사 기록이 사실상 일제 고등경찰 보고서를 베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고등경찰의 잘못된 기록을 고스란히 옮겨 경주의 3.1운동사로 기록한 우리나라 정부의 엉터리 '독립운동사'가, 100년전 지방의 작은도시 경주에서 3.1만세운동 거사를 기획하고 도모한 '역사적인 장소'에 대해 혼란만 가중시키며 후세에 잘못 전해지도록 만든 것이다.

1970년 당시 독립운동사 편찬과정에서 경주독립운동가들의 재판기록만 제대로 살피기만 했어도 있지도 않은 교회명이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국가보훈처가 만든 독립운동가들의 공훈록 또한 작성과정에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엉터리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혼란을 가중시킨 빌미를 여전히 제공하고 있는것이다.

경주3.1 독립운동을 기획하고 실행을 사전 협의한 역사적인 장소, 당시 있지도 않은 '도동리 교회'로 더 이상 잘못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 공식 기록물, 특히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가 공훈록에서부터 '도동리 교회'라는 잘못된 표기는 전부 수정해 '노동리 교회'로 시급히 바로 잡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터넷신문 경주포커스에도 실립니다.
#경주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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