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카이로선언에 '한국독립' 확보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26회] 장개석은 일본이 패망하면, 전후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등록 2019.02.27 17:00수정 2019.02.2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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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선 김구 선생과 김원봉 장군 1941년 3월 1일, 3.1절 22주년 기념식.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 신익희 선생, 김원봉 장군이 함께 선 사진이다. 매우 귀한 자료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전세가 급박해지면서 김구와 임시정부의 활동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그동안 주미외교부를 통해 미국측의 정보를 입수하면서 국제정세를 살펴온 김구는 미국에 임시정부의 정식승인과 공식 외교관계의 수립 및 군사원조 등을 제의하였다.

1941년 8월 김구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영국수상 처칠이 회담하고 세계대전 후 국제문제에 관한 '대서양헌장'을 발표하자, 이를 환영하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군사원조를 거듭 요청하였다.

특히 헌장 제3항의 "영·미 양대륙의 역량을 연합하여 각 민족이 자유로이 그들을 의지하여 생존할 수 있는 정부의 형식을 결정하는 권리를 존중하며 각 민족중 불행히도 이런 권리를 박탈당한 자가 있으면 양국 정부는 함께 그 원래의 주권과 자주정부를 회복하게 하려 한다."는 내용에 주목하고, 이 헌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임시정부는 1942년 2월 다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6개항을 요구하였다. 

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② 두 정부간의 외교관계를 개시할 것.
③ 한국과 중국의 항일군수품을 증가·원조할 것.
④ 군수품·기술자와 경제를 공급할 것.
⑤ 평화회의 개최시에는 한국정부 대표를 참가시킬 것.
⑥ 국제영구기구 성립시에는 한국을 참가시킬 것.

이와같이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에도 미국과 영국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여전히 아시아 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갖고 있는 동맹국 영국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여전히 항영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일고 있었다. 미국도 필리핀을 지배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와 외교활동에 주력하는 한편 1942년 1월에는 「임시정부포고문」을 발표하여 전 세계 20여 개국이 일본에 선전하고 총공격을 개시한 현 시점이 조국독립의 최후의 기회이므로 모든 동포들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 적 일본을 향해 진공하자고 호소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10일 김구와 외무총장 조소앙의 공동명의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에 공식적으로 선전을 포고하였다. 바로 이틀 전인 12월 8일 독일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본이 미국의 해군기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ㆍ일 전쟁이 일어났다.  

긴박하게 전개되는 국제정세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한 것은 우리도 일제와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을 연합국측에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이것은 곧 전후에 연합국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전략적인 조처이기도 했다.
 

카이로 회담장의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 부부 ⓒ 자료 사진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는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하지 못한 외교적, 정치적 행위였지만 연합국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포고는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의 3개 거두가 전후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처음으로 제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열강의 '위임통치'를 막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을 즈음 조소앙은 루스벨트와 장개석의 회담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국제공동관리 문제를 저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중국국민당 조직부장으로 한국 담당자인 오철성(吳鐵城)을 통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장개석과의 면담을 추진하여 성사되었다. 
 
1943년 7월 26일 오전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선전부장 김규식, 광복군총사령 이청천, 동 부사령 김원봉 등 임시정부 대표단은 통역 안원생을 대동하고 중국정부 군사위원회 2층 접견실에서 장개석과 만났다. 중국측에서는 국민당 오철성 조직부장이 배석하였다. 

이 회담이 국제공동관리 문제를 저지하고, 곧 열리게 되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논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카이로선언의 결실이 이승만의 노력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중국측은 한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장개석이 만나 나눈 대화를 「총재 접견 한국영수 담화 요기」라는 제목의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장개석은 중국국민당 총재, 군사위원회 위원장 등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총재'란 호칭의 배경이다. 

총재 : 중국혁명의 최후 목적은 조선과 태국의 완전 독립을 돕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이루는 데는 매우 어려움이 클 것입니다. 한국혁명 동지들이 한마음으로 단결하고 노력 분투하여 복국운동을 완성하기를 바랍니다.

김구ㆍ조소앙 : 영국과 미국은 조선의 장래 지위에 대해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채용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중국은 이에 현혹하지 말고 한국의 독립 주장을 지지하고 관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총재 : 미국쪽에서는 확실히 그러한 논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이 문제를 가지고) 반드시 쟁집(爭執))이 많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문에 한국 내부의 정성통일(精誠統一)과 공작 표현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중국도 역쟁(力爭)할 수 있고, 이 일에 착수하기도 쉬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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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회담에 참여한 3개국 영수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을 위해 모인 3개국 영수들 (왼쪽부터 중국의 장제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 독립기념관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가름하는 미ㆍ중ㆍ영의 정상회담이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카이로에서 열렸다. 회담에는 3국의 정상 루스벨트ㆍ장개석ㆍ처칠이 참석하고, 그들의 보좌관들이 배석하였다. 이 회담에서 3국 정상들은 향후 일본과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등 대일전쟁의 방법론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한국문제가 의제로 올라온 것은 23일 저녁이었다.
 
이날 저녁 7시 반 장개석은 부인 송미령과 함께 루스벨트 숙소를 찾아가 저녁 만찬을 함께 하였다. 이 자리에는 장개석과 송미령,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 등 4명이 참석하였고, 회담은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이때 장개석은 일본이 패망하면 일본이 차지한 만주와 대만ㆍ팽호도는 중국에 귀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전후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다. 

 1. 일본이 차지한 중국의 영토는 중국에 귀환하도록 한다.
 2. 태평양상에서 일본이 강점한 도서들은 영구히 박탈한다.
 3. 일본이 패망한 후 조선으로 하여금 자유독립을 획득하도록 한다.

이는 왕총혜(장개석 보좌관)가 작성한 카이로선언 일지에 들어있는 것으로, 장개석과 루스벨트의 회담은 원만하게 이루어졌고, 양측이 동의한 내용이라며 기록해 놓은 것이다.
 
장개석과 루스벨트가 협의한 내용을 기초로 하여 카이로선언의 초안이 작성되었다. 루스벨트의 지시를 받은 그의 보좌관 홉킨스가 작성한 초안에는 한국문제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리는 일본에 의한 반역적인 한국인의 노예화를 잊지 않으면서 일제 패망이 있은 후 한국은 가능한한 가장 빠른 순간에 자유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홉킨스의 초안을 받아 본 루스벨트는 한국문제와 관련하여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시기에(at the possible earliest moment)'라고 되어 있는 것을 '적절한 순간(at the proper moment)'으로 고쳤다. '가능한 한 빠른 순간에'가 '적절한 시기에'로 다소 바뀌게 된 초안이 3국 수뇌들의 합의로 채택되었다.

1943년 11월 23일 밤 루스벨트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 그들의 보좌관인 해리 홉킨스와 왕총혜(王寵惠)가 참석한 가운데 카이로선언문이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홉킨스가 미국측 초안을 가지고 와서 논의하여 다음날 오후 늦게 왕총혜와 합의된 초고가 완성되었다.

미국측의 홉킨스는 이 초고에서 '가능한 한 빠른 시기에' (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라고 쓴 것을 루스벨트가 '적절한 시기에' (at proper moment) 라고 고치고 최종 공식선언문에는 처칠의 주장이 강력하게 반영되어 '적시에' (in due course) 라는 다소 애매한 문구로 대체되었다.

카이로선언이 나오기까지에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1941년 8월 '대서양헌장'에서 전후의 민족자결권을 공약하였다. 이 선언이 알려지면서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정식승인을 얻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이 노력의 성과로 1942년 4월에는 장개석 정부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자고 미국무성에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무성은 중국정부의 이러한 공식 요청을 거부한 것은 물론 오히려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해서는 안된다고 중국정부에 항의하고 나섰다.

미국이 내세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미국과 중국 내에 있는 한국인 사회가 지도권 다툼으로 분열되고 중경 임시정부도 여러 파벌싸움으로 독립쟁취를 위한 통일된 연합전선이 구축되어 있지 못 하다는 점과, 둘째는 해외 한인단체가 국내 한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미국의 이러한 완강한 반대로 중국정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승인을 보류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임시정부의 승인을 거부한 데는 외형적으로는 한인사회의 분열과 대표성 부재를 이유로 들었지만, 이것은 그들이 내세운 명분일 뿐이고, 실제는 영국의 강력한 반대와 전후 극동에서 미국의 군사기지를 확보하려는 전략 때문이었다.

루즈벨트가 전시중에 한국의 40년 신탁통치 안을 제시한 것이나 전후에 분단정부 수립에 그토록 집념을 보였던 것도 한반도의 전략적인 이용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당시에 세계 여러 지역에 갖고 있던 식민지의 해방운동을 예방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은 물론 카이로선언에서까지 한국문제를 삭제할 것을 주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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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지원 아래 한국광복군 대원에게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훈련을 시킬 것을 협의한 후 회의장을 나서는 김구와 미국측 대표 미군의 지원 아래 한국광복군 대원에게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훈련을 시킬 것을 협의한 후 회의장을 나서는 김구와 미국측 대표 ⓒ 한길사

임시정부가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장개석을 움직이고 장개석이 주요한 국제회담에서 한국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광복군이라는 병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실제로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버마전선 등지에서 일제와 싸웠고 임정은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또한 두 나라는 OSS부대에서 군사훈련을 통해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카이로선언 #루스벨트 #장개석 #김구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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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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