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가 아니라 불륜'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

[조곤조곤 49] 정희진·권김현영·루인·한채윤 '미투의 정치학'

등록 2019.03.01 17:46수정 2019.03.0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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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 선고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오후 비서 성폭력 혐의 관련 항소심 선고를 받기 위해 서초동 서울고법에 도착하고 있다. ⓒ 권우성


2019년 2월 1일은 내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을 것이다. 이날 서울고등법원 형사재판부는 전 충남도지사인 안희정이 위력을 이용한 성폭력을 저질렀음을 인정했고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안희정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법정구속됐다.

판결이 선고되던 때, 나는 법원 근처의 카페에서 저녁에 열릴 집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을 하게 될지 아니면 항의를 하게 될지 몰라 초조해 하면서. 이후 열린 집회에서 나는 활동가들의 손을 맞잡고 격려를 나누었다.


김지은씨가 뉴스에 나와 용기 있게 고발한 지 거의 1년이 흘렀다. 법원 안팎에서 김지은씨를 향한 2차 가해가 이어졌다. 그만큼 재판 과정은 험난했지만, 2심에서는 안희정의 혐의가 인정된 것이다. 나는 적어도 안희정의 가해 사실을 부인하고 김지은씨의 증언을 의심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2심 판결 이후 안희정의 배우자를 포함해 그의 지지자들은 재판 결과를 부정했다. 두 사람은 불륜관계였고, 따라서 이 사안은 '미투'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황당했다. 부러 강조하자면 그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하는 '불륜 관계'는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에서도 인정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주장한 배우자의 증언이 너무 감정적인 나머지 재판부가 자제를 요청했던 일도 있었다. 

이와 별개로 나는 안희정 측의 전략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사랑'과 '친밀함'을 전제한 관계에서도 성폭력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부부 강간, 친족 성폭력, 데이트 폭력이 이를 증명하는 명백한 사례다.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웠건 피해자와의 관계에서 가해자가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이용해 의사에 반한 성적 행동을 했다면 이는 여전히 성폭력이지 않은가.

나는 '불륜'을 주장하는 이들이 김지은씨를 흠집 내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사건은 미투가 아니라 불륜'이라는 주장에 설득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투가 아니라 불륜'이라는 주장이 통하는 까닭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이 부부 관계건 연애 관계건 불륜 관계건 간에 모든 이성애 관계를 법적 개입이 불필요한 '사생활'로 여기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 법도 개입이 불가능한 '사생활'이 어떻게 정치적·사회적 문제로 간주될 수 있겠는가.

이는 앞서 언급한 부부 강간과 데이트 폭력 그리고 가정 폭력이 '범죄'로 여겨지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가정 폭력을 여전히 '집안 문제' 혹은 '남편의 아내에 대한 훈육'으로 여기며 데이트 폭력은 '사랑싸움'으로 치부한다. 가해자들은 '남편으로서 할 일을 했다', '사랑해서 그랬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즉 폭력을 폭력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거짓된 '불륜'이라도 꾸미는 데만 성공하면 성폭력은 없던 일이 될 수 있다.

이는 그 자체로 '젠더 문제'다. 사람들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서로에게 사기·협박·절도를 저질러도 절대 성폭력이 벌어졌을 때처럼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폭력임에도 그 앞에 성(性)이 붙으면 사람들은 이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파악해 버리거나 폭력을 그 자체로 보지 못한다. '아랫도리 간수를 잘 못해서', '여자 문제'와 같은 표현이 이를 방증한다. 

연구모임 도란스의 네 번째 기획 총서 <미투의 정치학>은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 이 책은 제목부터 본질을 건드린다.

앞서 언급한 이유 등으로 '미투'는 누군가에게(주로 남자들에게) 진지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스캔들 혹은 가십으로 소비돼 왔다. 마치 타인의 '사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투 운동'이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성폭력 범죄들뿐만이 아니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는 결국 젠더 관계와 이를 구성하는 '성별 제도'를 향할 수밖에 없다. 그 제도가 '성별화 된 인간'을 만들기 때문이다(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여성성·남성성 모델에 따라 사람들의 성적 수행 또한 달라짐을 생각해 보자).

<미투의 정치학>에 등장하는 정희진의 말처럼 성폭력은 이러한 제도의 일부이다. 가령 직장에서도 여성을 '동료'나 하다못해 '업무 보조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끝까지 '성적 대상'으로 보는 남성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권김현영의 날카로운 분석처럼 "남성의 세계에서 성적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돼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고, 여성은 '욕망의 대상으로만 의미'를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안희정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1심 재판부는 안희정이 아니라 김지은씨에게 질문했다. 왜 (성적 대상인) 당신은 저항하지 않았냐고. 그 결과 1심에서 안희정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성폭력'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

때문에 변화는 가해자의 '성적 욕망'을, 즉 섹슈얼리티를 심문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곧 사회를 구성하는 성별 제도인 젠더를 건드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개인은 진공상태가 아니라 제도와 규범 속에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투는 태생부터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급진적인 정치가 그러하듯 미투는 이미 명백한 현실을 남성 중심 사회가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에서 출발한다. 정희진의 말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끔찍하게 정상적'인 일이지만 이 사실을 몰라도 그만인 남성들은 이를 '예외적인 뉴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설득이 가능하겠는가(흔히 등장하는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몬다'는 이야기나 나올 뿐이다).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이란 공동체에서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력자의 시선이며, 그래서 지엽적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이 인식을 질문하고 해체하며 여성과 소수자의 입장에서 성별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미투의 정치학>에서 '춘향전'을 재해석한 한채윤의 글은 이런 작업의 모범적인 사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조를 지킨 미담'으로 알려져 있는 춘향전을 한채윤은 시대적 맥락과 인물들이 놓인 젠더 관계(그리고 권력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통해 다시 독해한다. 무엇보다 춘향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살펴본다.

그리하여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강력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기생인 춘향은 이몽룡을 통해서만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춘향은 사랑 때문이 아니라 원치 않는 성적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기 위해 변사또의 성적 요구를 거부하고 이몽룡을 기다린다. 춘향은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이를 홀로 성취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는 춘향의 시대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멀리 왔나를 질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답은 부정적이다. 한채윤의 말처럼 "성폭력은 강제로 섹스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존중하지 않는 폭력"이지만 남자들은 존중의 조건인 소통에 철저히 무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의하지 않음'의 의미조차 모른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저항조차 하지 못할 위치에 있기에 어떤 요구는 애초에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여성들은 일상에서 여전히 '무수한 안희정'들을 마주하고 있다.

모두가 읽어야 할 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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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미투의 정치학> 겉표지 ⓒ 교양인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를 구성하며 개인의 인식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젠더가 성별 제도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의 변화를 이끌지 않는다면 성폭력을 둘러싼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지금의 성별 제도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기도 하다. <미투의 정치학>에서 루인이 훌륭히 밝혀낸 것처럼 비트랜스 그리고 트랜스젠더퀴어 여성 모두가 완벽히 따르기 불가능한 젠더 규범을 수행하기 위해 고통 받거나 혹은 거기에서 이탈해 폭력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미투의 정치학> 서론에서 정희진은 이 책이 "젠더와 젠더 폭력에 대한 시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무례를 무릅쓰고 감히 말하자면 겸손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미투 시대를 조망하고 그 속으로 파고들며 이를 통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적일 수 있는 조건을 분석한다. 이는 젠더가 규범이자 제도임을 논증하며 한국 사회가 어떤 공간인지를 근본부터 들춰내는 일이기도 하다. <미투의 정치학>이 단지 '시론'에 불과하지 않은 이유다.

또한 이 책은 연구모임 도란스가 꾸준히 해온 말, "이론과 실천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글쓰기 자체가 정치적인 실천이다"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 남성들이 있다면 양심을 모조리 버리지 않는 이상 결코 지금과 똑같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인식이 바뀌고 현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바뀜은 사회가 변화해감을 의미한다. 그런 남성이 많아질수록 많은 문제들이 알아서 해결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미투의 정치학>은 내게 완벽하고 필수적인 입문서다. 책의 진입장벽이 낮다거나 읽기 쉽다는 의미는 아니다. 독자의 성별, 사회적 위치 등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 이 책은 친숙한 이야기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우 낯선 이야기일 것이다.

내게 이 책이 입문서인 것은 적어도 '성폭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다면 그전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모두가(특히 남성이라면) 읽는 게 낫다. 나를 모르고 타인을 모르고 그래서 세상을 모른다면 폭력을 저지르고도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르는 상황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끝까지 당당하고 피해자는 숨는 일이 반복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이 책이 그런 일을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미투의 정치학

정희진 외 지음,
교양인, 2019


#미투 #성폭력 #여성운동 #페미니즘 #미투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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