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숙덕커플 페미니즘 연대기6> 가장 자유로운 결혼, 팍스를 이야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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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숙(dream40)등록 2019.02.28 20:13

어떻게 뼛속까지 자유로울 수 있지?
 
'내 남자와 페미니즘으로 다시 살기'와 함께 페미니즘 독서모임 '이프'가 세 살이 됐다. <뼛속깊이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목수정, 레디앙, 2008)이 올해 첫 토론 책이었다. 어떻게 뼛속까지 자유로울 수 있지? 숙덕커플도 이프 회원들도 경험하지 못한 '경지'였다. 반면 사랑과 성이 정치적이란 덴 모두 동의했다.
 
안산 여성노동자회 페미니즘 책모임 '이프'가 2019년에 읽고 토론할 책목록
1.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 목수정, 레디앙, 2008
2. 불편할 준비, 이은의 외 4인, 시사인북, 2018
3.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 이임하, 철수와 영희, 2018
4. 깃발, 홍희담, 창작과비평, 2003 (<황석영의 한국명단편101> 제7권 등에 수록)
5. 전족, 펑지차이, 더봄, 2018
6. 한 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제임스 웰든 존슨, 문학동네, 2010
7. 아무도 몰랐던 이야기,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오월의 봄, 2018
8. 안녕, 내 이름은 페미니즘이야, 강남순, 동녘주니어, 2018
9. 빨간 기와집, 가와타 후미코, 꿈교출판사, 2014
10. 분노와 저항의 한 방식 페멘, 갈리아 아케르망, 디오네, 2014
11. 바늘, 천운영, 창작과 비평사, 2004 (<천운영 소설집> 등에 수록)
12.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 에마 골드만 외, 르 몽드, 2018 

치맛속이야말로 정치적인 거 맞아! 그런데 여자가 사랑하고 남자와 함께 살면서도 자유롭기까지 하다고?  

우리가 발 디딘 현실은 그만큼 척박했다. 한숨과 부러움에 불편함까지 뒤섞인 토론이었다. 반칙이 즐겁다, 월경하라, 저자는 충동질했다. 다른 질서 속에 방황하고, 자유에 무방비로 노출되기엔 우리는 발이 무거워 보였다. 그래도 우리는 큰 소리로 웃어재꼈다. 우리가 매일 견뎌내고 있는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요구야말로 가장 큰 '반칙'이었으니까. 우린 매일 자유의 월경을 하고 있었다.

"목수정처럼 말하고 글쓰고 싶다. 여기가 우리의 파리라 생각하자."
"한국사회의 이중적 가치관 보였다. 내가 운동권이라서 비판이 불편하게 읽혔다."
"기분나쁘지 않았다. 탈조해도 여기 산다. 팍스, 내가 결혼하지 않고 사는 이유다."
"자유롭게 사는 목수정 부럽고 아나키스트 희완 멋지다. 어른들의 놀이터 갸를롱이 궁금하다. 꼭 가보고 싶다!"
"이직 생각하며 일한다. 임신출산 사회적 보장되고 100% 국가가 비용 지불하는 게 가장 부럽다."......


그리고 내 남자 덕이 한 말은 조금 길게 옮겨 본다.
"신성한 결혼이니 믿음의 가정이니 거룩한 교회니, 제도의 허망함을 알게 됐다. 그런 틀에 매여 못보던 것들이 점점 보인다. 이 책도 그랬다. 자유가 보이고 사람이 보인다. 100% 웃는 남자 희완을 보니, 강한 남자인척 가부장제에 쩔은 내가 보였다. 명색이 목사인데 전엔 꼭 하고 싶은 게 없었다. 그런데 페미니즘 하며 내 삶과 신앙에 새로운 방향이 보였다. 내 짝꿍과 같이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가슴이 뛴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버전으로 한마디 하자면, 많이 컸다 우리 덕이!)

여성노동자들의 일상이 팍팍할수록, 자유는 더 뜨겁게 다가오는 거였다. 펄펄한 야성의 작가 목수정은 우리의 아바타 같았다. 자유로운가 그대?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그녀도 여기서 결혼하고 살았다면 기가 꺾였을 거라나. 여긴 우리의 해방구, 반말 토론도 자유의 공기였다. 기혼 비혼 할 거 없이 모두 프랑스의 시민연대계약(PACS팍스)에 관심이 많았다. 거기 비춰 본 한국의 남성중심 결혼문화는 얼마나 낯설던가. 

2장의 한 꼭지를 보자. "도대체 두 분이 무슨 연대를 하셨다구요?"라는 제목 아래 짧은 발췌분이 이랬다. (189쪽) 
한국식 표현대로라면 그는 분명 나의 시아버지다. 그러나 희완을 남편이라 불러본 적이 없듯이, 돌아가신 그분 또한 시아버지라는 관계 속에서 바라본 적은 없었다. 나의 엄마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도 가야지" 하고 말할 때 비로소…….
 
저자와 프랑스 남자 희완은 팍스로 맺은 커플이다. 희완의 아버지 앙리를 저자는 첨 만났을 때부터 '할아버지'라 불렀다. 90세의 앙리는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의례적인 호기심도, 이방인에 대한 생경함도 비추지 않았단다. 다만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선의가 있을 뿐,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아버지들의 태도와 너무 다른 인상이었단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저자는 어머니를 통해 시아버지란 말을 처음 들은 거였다.
 

팍스에 관한 책 두 권을 나란히 읽었다 <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을 읽고 토론하면서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도 함께 읽었다. 프랑스 남자와 시민연대계약(팍스)을 맺고 사는 두 한국 여성 저자들의 책이다. 프랑스도 68혁명까지 그랬다던가.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생활동반자관계법' 입법은 언제쯤일까. '제도의 지체'가 아닐 수 없다. ⓒ 김화숙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선의'가 진한 여운을 남겼다. 환대, 친절, 존중, 이해, 미소, 관용 같은 것이리라. 회원들마다 여자로 살며 겪은 가부장적인 가족관계를 돌아보게 했다. 나도 30년 전 시아버지와 처음 만난 날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그 시어머니는 쌀가마니도 번쩍 든다. 니는 배추나 한 포기 들겠나?"
"살다 보면 남자가 바람도 피우고 그럴 수도 있다. 여자가 참고 사는 거다."

첫 만남에서 시아버지가 내게 보인 '선의'요 '당부'였다. 뼛속까지 가부장제에 주눅든 여자, 나는 '착한' 미소로 듣고만 있었다.
  

 
시민연대계약(팍스), 그리고 생활동반자관계법
 
 시민연대계약(PACS)을 더 들여다보자.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이승연, 스리체어스, 2018)도 함께 읽으면 좋다. 목수정도 이승연도 프랑스 남자와 결혼 아닌 관계로 사는 사람들이다. 결혼 29년에 페미니즘으로 다시 살기 3년인 숙덕커플에게 팍스는 어떻게 보이는가? 전엔 쉽게 살다 헤어지는 '부도덕한 동거'로 보이더라. 지금은 아주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랑과 결혼에 상상력을 더하니, 맞다. 프랑스에선 결혼 하는 사람들을 '체제순응적'이라 본다나. 생각할수록 또 맞는 말이다.  
 
팍스는 '가장 자유로운 결혼' 같은 거다. 남성중심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인 가부장제 결혼의 대체제도다. 시민 두 사람이 나름대로 정한 합의로 맺는 계약이 핵심. 의식도, 주례도, 증인도 필요 없고 등록만하면 된다. 파기할 땐 재판절차 없이 일방적인 통보만으로도 가능하다. 결합할 때와 달리, 헤어지는 건 한 마음만 떠나도 성립한다는 현실을 반영한 제도다. 허울만 유지되는 결혼 같은 건 없는 거다. 세금 감면 등 제도적 혜택은 결혼과 같다. 자동 재산상속이 없을 뿐이다.

본래 시민연대계약은 20세기 말 LGBT 인권의 신장과 함께 사회의 동성결혼 허용 요구에 대한 정치적 대체제로서 탄생했다. 세계 20여개 국가에서 팍스와 유사한 시민결합제도가 운영되고 있는데 1989년 덴마크가 최초였다. 이후 뉴질랜드, 우루과이, 프랑스, 미국의 버몬트주 등 세계 여러 나라에 도입되었다. 시민동반자관계(Civil partnership), 등록된 동반자관계(Registered partnership), 가정동반자관계(Domestic partnership), 생활동반자관계(Life partnerships), 시민연대계약(Civil solidarity pacts) 등 나라마다 명칭도 다양하다. 
 
프랑스 팍스도 늘어나는 동성커플의 관계를 사회적으로 인정하고 보호하기 위해 1999년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제3의 선택이 되어 이성커플이 더 많이 팍스를 맺고 있다. 프랑스에서 결혼제도 밖과 안에서 태어난 아이의 비율은 50:50, 이들에 대한 제도적, 인습적 차별은 전혀 없다. 1998년 사회당 의원 베르트랑 들라노에가 커밍아웃한 말을 들어보자. 그는 막바지에 이른 시민연대계약법 논의에 사회적 동의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의 목차 내 눈에 가장 띄는 2장의 제목을 보라. "프랑스에는 '며느라기'가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결혼이란 결코 어디서나 통하는 진리는 아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은 버리는 게 좋다. 대안은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세상의 많은 나라에 법적제도로 팍스가 있는데 한국은 뭘하고 있단 말인가. ⓒ 김화숙

   
"나는 동성애자의 권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인종차별과 유태인차별에 저항하는 모든 종류의 인권운동에도 참여해왔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은 모든 인류를 위한 투쟁과 같다. 그들이 다수든 소수든 일군의 사람들이 한 사회에서 또 하나의 자유를 쟁취할 때마다 사회는 조금 더 확장된 자유를 얻게 된다." (196쪽)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은 모든 인류를 위한 투쟁과 같다. 생각할수록 맞는 말이다. 다수든 소수든 일군의 사람들이 또 하나의 자유를 쟁취할 때마다 사회는 조금 더 확장된 자유를 얻어왔다. 법은 1년 후 국회를 통과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평등하게 존재할 권리와 한 뼘 더 큰 자유'를 위해 싸운 10년의 결과였다. 베르트랑 들라노에는 후에 파리시장이 되었고 재선까지 성공한다.  

여기서 진선미 여성가족부장관 청문회가 떠오른다. 성소수자를 변호한 후보자의 이력을 "동성애자는 아니지요?"로 묻던 국회. '같이 사는 남자'가 뭐냐, 남편이라 부르라는 국회였다. 의원시절 '생활동반자관계법' 입법을 준비한 진선미 장관. 제도의 지체 때문에 평등하게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한 소수자들의 대변자였다. 10년 싸워 호주제폐지를 이뤄냈듯, 그가 꿈꾸는대로 생활동반자관계법을 포함, 다양성이 존중받는 문화를 이루는 정치인이 되길 응원해 본다. 
   
            

뼛속까지 부자유 치맛속까지 가부장제!
 
숙(필자): 희완이 한국 체류 6개월에 애정결핍으로 쓰러져 누웠잖아.(206-208쪽) 어떻게 읽었어?
덕(필자의 남편): 전체적으론 재미있었어. 우리가 고민하는 지점과 닿은 책이고. 그런데 그 대목은 좀……. 프랑스남자라 그런가? 난 낯설고 공감이 안 됐어. 예술가라 그런가?
숙: 프랑스 남자, 예술가, 그러지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희완과 수정에게 느낀 점 말해 봐.
덕: 희완이 애정결핍으로 앓아 누웠다는 게 이해 안 돼 넘어갔어. 그럴 일인가 싶어서.
숙: 진짜? 희완이 이상하다는 거야? 너는 살면서 소외감이나 애정결핍 느낀 적 없었어?
덕: 없었던 거 같아. 우리에게 그런 상황이 있긴 했나?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들 들락거리며 내가 관심가는 정치인이라 나는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꼼꼼히 지켜보았더랬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위해 일했다고 "동성애자는 아니죠?"라고 묻는 현실. 누구나 평등하게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덴 그들도 이론적으론 결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폭력과 차별과 혐오의 언어를 뱉아내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모순을 어쩔고. 그후 나는 정신을 차리고 살피게 됐다. 수시로 여성가족부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는 것도 그 중 하나다. ⓒ 김화숙

   
숙: 좋은 질문! 애를 셋이나 낳아 키웠고, 나도 바삐 살았는데, 왜 그런 상황이 없었을까?
덕: …….
숙: 그럼 반대로 보자. 내가 수정처럼 너를 가구취급하고 아이와 일에만 몰두한 적은 없던가? 수정처럼 아이와 일에 관심이 집중돼 있던 걸 반성하고 태도를 바꾼 경우라거나.
: 넌 그런 적 없는 거 같은데.
숙: 그럼 내가 희완처럼 너한테 소외감 또는 애정결핍을 느끼고 드러누워 앓은 적은 있었어?
덕: 당연히 있지. 생각나는 것도 있는데 뭘. 아~~ 신기하네. 나는 왜 그 느낌이 없지?
 
숙: 이상하지? 그럼 수정이 아이와 일에 빠져서 희완을 방치한 건 이해 돼?
: 그런 셈이지. 희완과 수정은 딱 우리가 아는 남녀 역할을 바꿔 한 거 같던데? 아내를 무급 가정부 취급하는 남편들을 혐오하면서도 딱 닮아가고 있었다고 수정이 말했잖아.
숙: 그니까. 평소의 넌 남자에 공감하잖아? 남자 희완엔 왜 공감할 게 없지? 나는 왜 수정에게도 공감하고 희완에게도 완전 공감할까? 한 발 더 들어가 보자. 이를테면 희완처럼 감정표현 잘하고 애정결핍으로 앓아 눕는 남자를 읽을 때 니 기분이 어땠는지. 니 눈에 희완이 어떻게 보였길래 그럴 일인가 하고 넘어갔을까?
 
덕: 음...... 나한텐 희완이 여자 같아 보였던 거 같네. 그만 일로 남자가 앓아 누웠다는 게 이상했어. 남자는 보통 안 그러잖아.
숙: 남자는 왜 안 그럴까? 남자는 사랑 따위 없이 잘 산다는 뜻인가? 감정을 안 느끼나?
덕: 그건 아니지. 감정을 다 느끼면 너무 불편하니까 어느 수위에서 차단하는 거 같아.
숙: 오~ 차단? 그럼 희완이 애정결핍으로 앓아 누운 건 뭐지? 남자로선 비정상적인 건가?
덕: 그건 아니지. 희완이 정상인 거 같아. 그러면 약한 남자 같고 못난 남자로 보일까봐 난 잘 못하는 거잖아. 내가 강해 보이려니 희완의 감정을 예술가라서 그런 거라고 넘겨 버렸나 봐.
숙: 오 좋아. 너는 감정을 부정하려 하는데 다 느끼고 사는 희완 보니 마음이 불편했어?
덕: 그런가? 맞아, 그런 거 같아. 나나 희완 중 한쪽은 이상하잖아. 피해서 넘어가고 싶었어.
 

숙: 봐봐. 덕, 남자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 남자는 강해야 한다. 그런 신념 말이야. 그게 진짜 남성성일까? 희완은 그런 신념 있었을까?
덕: 맞네. 없는 거 같아. 기쁨도 슬픔도 희완은 100%로 다 느낀다 그랬잖아.
숙: 그치. 남자도 인간 여자도 인간이지? 항상 남자는 강하고, 맨날 여자만 감정노동하고, 작위적이지? 남자도 사랑 받지 못하면 병날 수 있고. 여자도 일에 몰입하면 감정 못 돌보고. 그게 사람이잖아? 근데 우린 뼛속까지 부자유고 치맛속까지 가부장적이지? 모든 감정노동 내가 떠맡았고. 너는 감정 없는 척 했고. 심지어 니가 소외감 느낄까봐 나는 널 배려했잖아. 니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지…….
덕: 맞아. 맞네. 수정이 일 때문에 희완을 방치한 대목에서, 수정이 그러면 남자처럼 사는 건데, 안 되지, 했어. 성역할 고정관념? 내 편견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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