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좋아한다면 구스미 마사유키처럼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4)구스미 마사유키 '낮의 목욕탕과 술'

등록 2019.03.04 09:20수정 2019.03.04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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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자전거로 5분만 가면 도서관이 있다. 귀한 보물이 가득한 집채만 한 금고가 곁에 있는 기분. 여유롭고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 사이를 걷다가 발길을 붙드는 제목을 봤을 때, 그 내용 또한 마치 찾고 있던 퍼즐 혹은 열쇠처럼 내 마음에 딱 들어맞을 때의 반가움, 해방감, 오묘함이란! 그 보물 이야기를 하려 한다. 보물과 같은 책 이야기. 형식은 자유. 허구에 허구를 더할 수도, 누군가에 전하는 편지가 될 수도. 내 보물을 보여주는 방법은 내 자유니까. - 기자 말

 

'낮의 목욕탕과 술' ⓒ 이명주

 
그러니까 이게 다 구스미 마사유키의 <낮의 목욕탕과 술> 때문이다. 한낮 도서관에서 벌거벗은 채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탕 속에 남자 그림과 '낮의 목욕탕과 술'(아래 낮탕술)이란 제목마저 태평하기 짝이 없는 책. 덕분에 어제 하루 낮술을 길게 즐겼다.
 
역시 한낮, 목욕탕에 다녀와 밝은 햇살 아래에서 마시는 맥주는 최고다. 그 첫 한 모금은 그야말로 무적. (…) 나는 지금 온몸으로 맥주를 받아들이고 영혼을 다 바쳐서 맞아들인다. 사랑, 그런 느낌이다.


백합조개달걀찜이 나왔다. 지체 없이 사케 한 병을 주문한다. (…) 부드러운 달걀과 미역 (…) 익은 조갯살이 이 사이에서 (…) 술이 새로 나오는 타이밍에 은어소금구이를 시킨다.

취기라는 아련한 벚꽃색 공기가 머리 쪽으로 출렁 흐르기 시작한다. 행복하다. 이것을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한 인생일꼬. 마셔야지. 봄날의 저녁나절, 활짝 핀 벚꽃에 건배.
 
애주가라면 이미 군침이 돌았을지도. 직장에 매인 몸이면 퇴근 후 어떤 술에 무슨 안주를 먹을까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거나. 이 책은 목욕탕과 술을, 특히 한낮에 그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을 좋아하는 작가가 일본 각지의 목욕탕과 술집에서의 추억담을 엮은 것.

재밌다(좀 한심한 것도 같고). 바로 앞서 '술을 마시는 건 인생을 도려내는 일'이라 일갈한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고 절대적으로 술을 줄이고 보다 치열하게 살아야지 다짐해놓고 <낮탕술>을 보면서는 '그래,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지. 행복의 기준도.' 하며 안도했으니.
 

구스미 마사유키 <낮의 목욕탕과 술> ⓒ 이명주

   
아는 사람은 단번에 눈치 챘을 수도 있겠다. 구스미 마사유키. 유명한 일본 만화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다(다니구치 지로와 공동 작업). TV 드라마로도 시즌7까지 제작돼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다. 나는 드라마를 보고 팬이 됐는데 미리부터 알고 이 책을 택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듯 한량 기질이 농후한 작자가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해서 널리 명성을 얻은 인물이라니. 그뿐 아니라 에세이스트, 디자이너, 방송인 거기에 하나 더, 밴드를 결성해 공연을 다닐 만큼 음악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마치 '거봐, 계속 내멋대로 살아도 좋아. 기왕이면 제대로 실컷.' 하고 말해주는 것 같아 든든해졌다. 
노폐물, 냄새, 나쁜 기운, 피로, 부정, 스트레스로 똘똘 뭉친 온몸을 청정하고 따뜻한 물 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천천히 발부터 시작해 허리까지 (…) 어깨, 목까지 뜨거운 물로 감싼다. 뒤통수, 귀까지 푹 담그고 눈을 감는다. 으흐흐흐

진지하게, 시시덕시시덕, 질질, 때로는 뜨거운 논쟁을 벌이며 음악 이야기를 나누었더랬다.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기타를 쳤다. 그러다 날이 저물면 집에 욕조가 없으니까 가까운 목욕탕에 갔다가 그냥 돌아오지 못하고 다시 마셔버리곤 하는. (…) 그립다.

좋은 게 많은 사람이다. 좋으면 양질의 그것을 오래도록 누릴 줄 아는. 아니 좋다보다 사랑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까.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는 희생이라 했으니. 그 대상을 위해 나의 것을 기꺼이 나누고 대신하는. 몸과 마음의 힘, 시간, 돈 뭐든. 나는 어정쩡하다. 한참 부족하다. 더, 더, 더! 


이 책은 두 번째 소개했던 가쿠타 미쓰요와 오카자키 다케시의 <아주 오래된 서점>과 형식이 비슷한데 앞서는 헌책방이었다면 이번엔 작가가 다녀온 다채로운 목욕탕과 그 근처 술집들에 관한 이야기다. 찾아가 저마다 주인공이 돼 보는 것도 즐겁겠다. 목욕탕과 술집이 아니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것들의 조합. 

나는 작가가 '정말로 괜찮아서' 공개하고 싶지 않다고 한 미타카의 '치요노탕'을 가보고 싶다. 그곳의 정원 딸린 노천탕에서 목욕을 즐기는 중에 휴게실에서 판다는 400엔 짜리 생맥주와 안주로는 오뎅이나 야키소바를 먹고 싶다. 하지만 '불알이 보일 듯한' 풍덩한 팬티를 입고 '길게 길게 방귀'를 끼는 무례한 인간은 제외. 

그리고 2005년부터 여탕에서 '목욕탕 록 페스티벌'을 열고 있다는, 쟁쟁한 뮤지션들의 참여로도 유명하다는 기치조지의 'B.T.U'란 목욕탕과 아사쿠사의 대형 백화점식 대형식당인 '신타니바'도 가보고 싶다. 여기선 혼자건 여럿이건 편히 앉아 떠들고 먹고 마시면 된단다. 이곳에서 한 달을 살면 마침내 일본어를 익히게 될지도.

그런데 말이다. 목욕 후 마시는 차가운 술이 '한순간 여기가 어딘지 잊어버리게 할 만큼' 맛있는 진짜 진짜 이유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 책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확인하시길.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당신과 나도 목욕 후 맥주 한잔 혹은 스스로 좋아하는 그 무엇들의 최상의 조화와 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보물 찾기 ⓒ 이명주

 
#목욕탕 #낮술 #낮의목욕탕과술 #고독한미식가 #구스미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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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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