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모신 유일한 사당, 전라도에 있게 된 사연

안중근 모신 장흥 해동사에서 광주 백범기념관까지... 호남의 독립운동 관련 시설

등록 2019.03.02 11:32수정 2019.03.0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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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해동사.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있다. 안중근 의사를 모신 유일한 사당이다. ⓒ 이돈삼

 
삼일절(3.1절) 100주년을 맞아 남도의 독립운동 관련 시설을 돌아본다. 남도에는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함평에는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이 있다. 김철은 모든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고,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장으로 일했다.

장흥에는 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해동사가 있다. 화순엔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묘와 추모비가 있다. 광주에 백범기념관이 있고, 청년 김구가 머문 보성 쇠실마을도 있다.

해주 태생 안중근 의사 사당이 왜 장흥에?
  

장흥 해동사의 안중근 의사 위패와 영정. 지난 1955년 죽산안씨 문중에서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 이돈삼

장흥 해동사에 걸려있는 안중근 의사의 글귀. 대한국인 안중근이 썼다는 글씨와 함께 손바닥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다. ⓒ 이돈삼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에 있는 해동사는 안중근 의사를 모신 전국 유일한 사당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듬해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유명을 달리했다. 황해도 해주가 태생인 안중근 의사 사당이 왜 장흥에 있을까. 

장흥에 사는 죽산안씨 문중에서 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순흥안씨. 대한민국 어디에도 안중근 의사를 모신 사당이 없고, 후손도 없어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안 죽산안씨 문중의 배려로 사당이 생겼다.
  

안중근 의사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장흥 해동사 전경. 죽산안씨 사당인 만수사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장흥 해동사 출입문에 그려져 있는 태극 문양. 해동사는 여느 사당과 다른 문양을 하고 있다. ⓒ 이돈삼

 
죽산안씨 문중은 죽산안씨 사당인 장흥 만수사에 안중근 사당을 따로 짓고, 1955년부터 지금껏 제사를 지내 왔다. 나이 32세에 이국땅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전국에 하나뿐인 공간이 장흥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의 사당은 20여 년 전에 국비와 지방비를 들여 다시 지었다. 장흥군은 올해부터 3년 동안 사당 주변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한다. 전국에 하나뿐인 안중근 의사 사당을 청소년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에 참여한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묘지. 화순군 앵남리에 있는 제주양씨 선산에 있다. ⓒ 이돈삼

지강 양한묵 선생의 묘.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으로 3.1독립선언에 참여한 유일한 호남사람이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감옥에서 숨졌다. ⓒ 이돈삼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한 호남인

지강 양한묵 선생 추모비와 묘는 화순에 있다. 양한묵 선생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작성에 천도교를 대표해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해 5월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이 56세로 옥사했다.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에 들어간, 하나뿐인 호남사람이다. 33인 가운데 감옥에서 숨진 유일한 분이다.

선생의 태 자리는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 능주세무관에 임명되면서 화순 도곡으로 옮겨 와 살았다.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고, 1898년엔 일본으로 건너가 손병희 선생 등과 함께 진보회를 조직했다. 1905년엔 이준 선생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해 일제에 맞서다 옥고를 치렀다. 1911년엔 학교를 운영하며 항일 정신교육에, 낙향해선 신학문 보급에 앞장섰다.

선생의 추모비는 화순 남산공원에 있다. 묘는 전남학숙 뒤편 제주양씨 선산인 화순읍 앵남리 앵무산에 있다.

양한묵 선생이 태어나 19년 동안 살았던 해남에 생가도 있다. 작년에 해남군에서 복원했다. 마을에 세워져 있던 순국비도 생가로 옮겼다. 서대문형무소의 겉모양을 딴 조그마한 기념전시관도 만들었다. 마을에는 또 선생이 어린 시절 꿈을 키웠던 비둘기바위, 공부를 했던 서당 소심제도 남아 있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 있는 김광언의 집. 치하포 사건으로 탈옥해 도망자가 된 청년 김창수(백범 김구)가 40여 일 동안 숨어 지낸 집이다. ⓒ 이돈삼

보성 쇠실마을에 있는 백범김구 은거기념관 내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의 삶을 엿볼 수 있다. ⓒ 이돈삼

 
청년 김구가 숨어 지내던 곳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은 청년 백범, 당시 이름 김창수가 40여 일 동안 숨어 지냈던 곳이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한 청년 김구는 대동강변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하고, 인천감리서에 갇힌다. 하지만 탈옥에 성공, 도망자가 돼 서울과 공주 남원 함평 목포 강진 완도 보성 화순 담양 등지를 전전한다.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생활도 한다.

이때 숨어 지낸 마을이 쇠실마을이고, 묵었던 곳이 김광언의 집이다. 김구는 여기서 지역주민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그 경험담이 〈백범일지〉에도 쓰여 있다.

쇠실마을에는 청년 김구가 머물렀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두루마기 차림의 김구가 마루에 걸터앉았던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이 사진과 비교해 보면, 지붕만 초가에서 슬레이트로 바뀌었을 뿐 집의 구조나 마당, 주변 풍경이 옛 모습 그대로다.

이 집 앞에 1990년에 세운 백범 김구 은거 기념비가 있다. 2006년에는 한옥 형태의 백범기념관도 조그맣게 들어섰다.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비. 김구가 40여 일 동안 지냈던 쇠실마을의 김광언의 집 앞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광주 백범기념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김구 선생 동상. 오른손을 내밀어 방문자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 이돈삼

 
백범과 광주의 인연

광주엔 백범기념관도 있다. 백범은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우리 민족의 지도자다. 동학농민혁명 때엔 어린 나이에 접주로 활동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하며 경무국장을 했다. 나중에 주석을 맡아 항일운동의 최선봉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백범과 광주의 인연은 해방 이후에 맺어졌다. 1946년 광주 대성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김구선생 환영 기념강연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광주부윤(광주시장) 서민호로부터 '일제 때 고국을 떠나 살다가 해방이 돼 귀국한 동포들이 광주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김구는 그동안 성금으로 받은 금품을 기탁한다.

이 금품을 종잣돈 삼아 네댓 평의 조그마한 건물 100여 채를 짓고 이 사람들이 살도록 했다. 지금 백화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광주천변이다. 마을의 이름을, '100가구가 화목하게 살라'는 뜻으로 백범이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해방촌이다.

백범기념관에서는 김구 선생의 삶과 활동상, 그리고 백화마을에 얽힌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다. 영인본 백범일지를 만나고, 선생의 행적도 사진으로 만난다. 광주와 전남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광주 백범기념관 내부. 김구 선생과 백화마을 이야기를 비롯 백범의 삶까지도 알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광주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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