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 풀어놓을 땐 언제고... "산림청 못 믿겠다"

전면 복원 vs. 일부 존치, 점점 깊어지는 가리왕산의 '흉터'

등록 2019.03.01 11:02수정 2019.03.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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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 일부 주민들은 산림청에 대해 극도의 불신을 나타내고 있다. 가리왕산 스키 경기장 입구에 붙어있는 현수막들. ⓒ 이정환



평창군을 지나 미탄면을 거쳐 정선군에 들어섰다. 그때까지 고즈넉했던 바깥 풍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빨갛고 혹은 시커먼 현수막들이 등장했다. 그 중 하나에는 '알파인 경기장 철거 반대 범군민 투쟁위원회' 명의로 "정선군민은 분노한다, 곤돌라는 안 뺏긴다"고 써 있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만 해도 정선 가리왕산 알파인 경기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극찬했던 곳이다. 그리고 올림픽의 환호가 사라진 지금, 그 곳은 버려진 땅 신세다. 숲을 복원하는 사업이 시작된 것도 아니고, 사후 활용을 위한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와 지자체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환경부와 산림청은 애초 계획대로 모두 철거하고 전면 복원을 하자는 입장이고, 강원도와 정선군은 곤돌라와 운영도로를 남기는 일부 존치를 주장하고 있다. "원래 약속대로 산림으로 다시 복원하는 것은 법적 의무"라는 주장과 "올림픽 유산을 일부라도 남겨 합리적으로 활용하자"는 반박이 1년이 지나도록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철조망 치고, 멧돼지 사육장 만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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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 '알파인 경기장 철거반대 범군민 투쟁위'는 지난 1월 가리왕산 멧돼지 사육시설 실태를 조사한 결과 이와 같은 사육시설 4곳이 방치돼 있다고 밝혔다. ⓒ 정선군범군민투쟁위

 
이런 갈등 양상은 일부 정선군민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좀 더 복잡해졌다. 지난 1월 22일, 정선군에서는 군민 2천여 명(주최측 추산)이 참여한 가운데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1980년 사북 사태(광부들이 일으킨 노동항쟁) 이후 지역에서는 최대 규모라고 했다.

앞서 산림청이 강원도에 전면 복원 시행을 요구하며 행정 대집행을 예고하자 이에 반발해 군내 161개 단체가 참여해 만들어진 '알파인 경기장 철거반대 범군민 투쟁위'가 주도한 집회였다. "곤돌라와 운영도로 존치"를 요구하며 정부를 규탄했다. 지난 27일에도 그 흔적은 정선군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산림청에 대한 분노가 높은 것으로 보였다. "산림청은 가리왕산 산림 파괴범"이라거나 "가리왕산 훼손한 산림청이 유전자 보호가 웬말인가"라는 등 현수막은 불신의 골이 꽤 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현수막도 눈에 들어왔다.


"철조망 치고, 멧돼지 사육장에 유전자 보호림 지정이 웬말인가"

경기장 입구 콘테이너에서 농성을 진행하고 있는 신승남 정선군 북평면 번영회 회장은 "주민들은 산림청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고 말했다. 정선에서 태어나 57년 동안 살아왔다는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가리왕산 나무를 실어내던 트럭을 봤던" 이야기도 했고, "등산로 개방으로 인해 유전자 보호 식물이 초토화됐다"는 주장도 했다. "산림 경영 주체로 우리 군민은 산림청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했다.

산림청과 오랫동안 쌓인 불신의 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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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7일자 동부지방산림관리청 공문. 과거 산림청 주도로 가리왕산에서 '야생조수보호증식장' 사업이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정환

 
이렇게 산림청에 대한 불신이 오랫동안 쌓이는 과정에 '멧돼지'도 등장한다. 지역신문 보도를 살펴보면, 1997년 산림청이 가리왕산 멧돼지 증식 사업을 벌이는 바람에 상수원 오염과 농작물 피해를 우려한 주민들과 오랜 시간 갈등을 빚은 것으로 나타난다. 동부지방산림관리청의 2000년 8월 7일 '가리왕산 산림생태관찰원 조성에 따른 주민의사에 대한 회신'이란 제목의 공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7년도에 향토종 및 멸종 위기 야생 동물의 입식과 보호 증식을 목적으로 야생보호증식장 조성 사업을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착수한 바 있으나 이 가리왕산 일대에는 우리나라 어느 다른 산에서 볼 수 없는 신갈나무, 거제수, 주목 등 희구수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야생화의 경우도 세계적 희귀종인 '금강제비꽃' 외에 수많은 토생 야생화와 산채, 산삼, 약초 등 다양한 향토 식물 자원이 분포되어 있는 우리나라 식물 자원의 보고로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명산이므로..."

그러면서 해당 사업을 "산림생태관찰원"으로 변경하며 "주민들께서 항상 우려하고 계신 멧돼지 등 야생 동물의 입식이나 증식하는 당초 사업은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는 수익 사업 차원에서 추진됐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사육장 설치 뿐 아니라 수렵장도 함께 운영하려고 했으나 당시 환경부처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동부지방산림청 관계자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오래 전 일이라 관련 자료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다.

"자신들 입맛에 맞는 행정으로 이런 상황까지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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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 일부 주민들은 현재 가리왕산 알파인 경기장 입구에 설치한 콘테이너에서 농성을 진행 중이다. ⓒ 이정환

 
산림청이 야생동물 증식장 조성 사업 당시 설치한 철제 울타리도 가리왕산 환경을 훼손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산림청은 총사업비 40억 원을 들여 멧돼지 등이 산 아래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총연장 37km(주민투쟁위 측 42km)에 이르는 철제 울타리를 설치했다. 주민들은 이로인해 멧돼지들의 활동 범위가 제한되면서 오히려 고산 식물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상태는 꽤 오랫동안 사실상 방치됐다. 산림청이 일부 철제 울타리 제거 계획을 발표한 것은 2008년 6월이었다. 동부지방산림청 관계자는 통화에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12.3km 구간이 일부 철거됐고, 2018년에도 추가로 1km 구간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육장 시설 등은 최근까지도 그대로 방치됐다고 한다. 투쟁위가 지난 1월 현장 조사를 벌인 결과 멧돼지 사육사 여러 동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산림청은 2008년 10월 29일 경기장 예정부지가 포함된 가리왕산 일대 2362ha(헥타르)를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했다.

현재 투쟁위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덕수 강원도의원은 "가리왕산은 나물을 뜯고 약초를 캐는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어머니 같은 산"이라면서 "재산권을 산림청이 갖고 있다 해도 산림청만의 산이 아니라 자신들과 같이 호흡하는 산으로 지역 주민들은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끔 나름대로 해석해서 산림 행정을 하다 보니까 이런 상황까지 왔다"는 것이 장 의원의 주장이었다.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도 아직은 미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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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스키 경기장의 곤돌라 모습. ⓒ 이정환

 
투쟁위가 농성을 진행중인 컨테이너 근처에서 만난 한 주민은 경기장을 바라보며 "예전에는 숲이 참 풍성했다, 급하게 (경기장을) 부랴부랴 만드는 바람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온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 세금 아니냐, 그 피해는 우리 주민들, 국민들이 다 보는 것이다"며 "답답하다"고 말했다.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는 다시 분노를 접했다. 역시 이 지역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는 김아무개씨는 "그 경기장 유치하느라고 여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자원봉사 했는지 모를 것"이라면서 "올림픽이 끝나고 우리한테 돌아온 게 뭐가 있나, 화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22일, 군민들의 분노가 집회를 통해 표출된 이후 정부·지자체 그리고 주민대표 등이 참여하는 '가리왕산 갈등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위한 논의가 현재 진행 중이다. 이제까지 모두 네 차례 회의가 열렸지만 아직 별다른 접점을 찾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랫동안 쌓였던 불신의 골을 메우기에는 앞으로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가리왕산의 '흉터'가 깊어지고 있다.
#가리왕산 #평창올림픽 #정선군 #산림청 #곤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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