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는 왜 그들에게 '증오'의 상징물이 됐나

[게릴라칼럼]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에 떠올린 태극기의 두 얼굴

등록 2019.03.01 16:57수정 2019.03.0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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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당시 박사모(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와 보수단체들이 맞불 집회 후 무단 투기한 것으로 보이는 쓰레기들. ⓒ 하성태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지난 2016년 12월 중순의 어느 토요일 저녁. 서울 경복궁 인근 국립민속 박물관 옆 돌담길 앞에 투기된 포장 장미 수백 송이를 목격했다. 당시 광화문 인근에서 맞불 집회를 벌였던 박사모(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 및 보수단체들이 버린 집회 용품 같았다. 그 숫자나 대담한 쓰레기 투기도 놀라웠지만, 과연 저 비용을 누가 감당했을까 의문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잘 알려지다시피, 장미는 이후 '태극기'로 변모했다. '대통령님 사랑해요', '탄핵무효'와 같은 손 피켓은 그대로였지만, '탄핵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 이른바 '탄기국' 출범하면서 집회 참석자들을 대변하는 상징물은 태극기로 통일됐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의 탄생이었다.

이후 태극기가 장미처럼 버려지는 일은 사라졌다. 태극기 부대도 알고 있는 걸까. 형법 제3장 105조에 명시된 국기, 국장의 모독죄(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의 형량이 꽤 높다는 사실을. 

그런데 '태극기 부대'의 출현이, 광화문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뒤덮은 태극기의 향연이 낳은 폐해는 따로 있는 것 같다. 태극기 자체에 대한 인식 변화 말이다. 한번이라도 그 '태극기 집회'의 한복판에 서 있어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들이 무수하게 휘날리는 태극기가 어떤 감정을 주는지.

자의 반 타의 반 덕수궁 대한문 앞 태극기 집회의 복판에 '갇힌' 적이 있다. 한 번은 '박근혜 탄핵' 전이던 2017년 1월, 최대 인파(자칭 10만이었던가)가 모였다는 대한문 앞을 자청해서 찾았더랬다. 시청 앞 도로를 꽉 메운 '태극기 부대'가 휘날려대던 태극기를 보고 나는 공포감과 혐오감을 느꼈다.

비단 심심치 않게 오가던 욕설과 한 쪽에서 벌어지던 물리적 갈등 때문만은 아니었을 터. 논리보다 감정이, 이성보다 맹목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는 군중들이 흔드는 압도적인 숫자의 태극기 물결에서 신흥 종교나 광신도가 연상되기도 했다. 그 옆으로 휘날리던 성조기의 초현실적인 이미지나, '저 비용은 누가 댔을까' 하는 궁금증은 둘째 치더라도 말이다.

아마도 그때 이후였던 것 같다. 집에서 보관하던 소형 태극기를 별 고민 없이 처분해 버렸던 것은. 습관처럼, 일상처럼 마주했던 태극기가 불편해지고, 거리에서 태극기를 마주할 때마다 깜짝 놀라고 불편한 감정이 들었던 것은. 그로부터 2년이 훌쩍 지난 오늘, 제100주년 3.1절인 이날 태극기에 대한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다름 아닌 "아파트 입주민에게 알립니다"라는 아파트 관리실의 안내방송 때문이다.
 

서울 성동구의 한 아파트 단지 풍경. 100주년 3.1절을 맞은 1일, 태극기가 게양된 집은 1동에 한 곳이 채 안 된다. ⓒ 하성태

3.1운동 100주년, 그리고 태극기


"오늘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입니다. 입주민 여러분은 집에 보관하고 계신 태극기를 게양해 주십시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성인 3명 중 1명은 집에 태극기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국가 기념일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일이 실제로 유명무실해진지 오래라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건너 편 아파트를 육안으로 확인했을 때, 한 동에 하나가 고작이었다. 심지어 3.1절 100주년인데도 이럴 진데, 평범한 국가기념일엔 오죽할까. 반면 소셜미디어 속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태극기를 동반한 캠페인과 기념 '인증샷'이 타임라인을 뒤덮고 있었다.
 
"딱 3초! SNS라도 오늘 만큼은 태극기를 달아주세요."


소셜 미디어에서는 이른바 '3.1절 1000만 명 태극물결 캠페인'이 한창이었다. 심지어 손흥민 선수가 뛰고 있는 영국 토트넘 구단 공식 계정도 "오늘은 삼일절 1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여러분 모두 독립투사와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라는 글과 함께 태극기를 펼쳐든 손흥민 선수의 모습을 게재했다.

앞서 지난 2월 23일 고민정 청와대 부대변인의 제안으로 시작됐다는 '만세하라 1919' 릴레이 캠페인 역시 눈에 띄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SNS를 통해 소감을 밝히고 만세를 외치는 영상을 게시하는 이 캠페인은 고 부대변인이 청와대 조국 민정 수석과 배성재 SBS 아나운서, 그리고 'SNS 친구들'을 지목하면서 퍼져나갔다.
 

영국 토트넘 구단 소셜 미디어 계정에 게시된 손흥민 선수의 사진 ⓒ 토트넘

태극기의 본래 의미를 되찾아주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정점엔 태극기를 든 유관순 열사의 그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역시 100주년 3.1절 전부터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고 있는 그림이었다. 아울러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 광화문에 게양된 대형 태극기는 분명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규정되어 희생되었고 가족과 유족들은 사회적 낙인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은 완성될 것입니다. 새로운 100년은 그때에서야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3.1운동 100주년의 태극기와 태극기 부대의 태극기

'박근혜 탄핵' 재판 당시 헌법재판소 내에서 태극기를 펼쳤던 서석구 변호사의 모습을 기억하시는지. 우리는 이렇게 최근 2년여 동안 2개의 상반된 태극기를 마주해야 했다. '태극기 부대'가 훼손하고 모독하는 태극기와 진정한 국기로서의 태극기 말이다. 오늘 오전 3.1절 기념사를 통해 '신한반도체제'를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이 태극기를 들고선 국민들과 함께 만세 삼창을 부르는 모습은 그래서 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2년여 넘게 태극기를 들고서 '혐오'와 '증오'를 극대화시킨 세력이 누구인가. '태극기 부대'라는 이름부터 모욕에 가깝지만, 실제로도 태극기를 든 채 시종일관 "빨갱이"와 같은 증오와 혐오의 언어를 내뱉은 이들로 인해 태극기(가 주는 이미지) 자체에 대한 반감이 생긴 이가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런데 물론 억지로 비교하자면 서청이나, 서북청년단이나 대청이니, 족청이니 그런 거 그 당시 우익단체들이 많았지만, 비슷한 게. 이거하고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막강한 이승만 체제, 미국, 일본 소위 말하면 냉전 체제의 막강한 지원이 있었던 거예요, 서북청년단도.

그런데 지금 태극기 부대라고 하는 것은 허상이에요, 허상. 사람들이 이게 뭐냐 하면 아무런 지원 세력도 없고 자기들 몇 명이 모여서 그냥 만든 거예요, 길거리 나와서 하는 게. 운동도 되고 추운데 와서 떨어도 보고 역사를 내가 그 움직이고 있다는 그 착각도 들고, 이런 착각 집단을 가지고 왜 이게 그렇게 문제가 되냐 그거예요, 지금."


지난 2월 21일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의미를 역설하며 '태극기 부대'를 허상이라 평했다. 해방 공간에서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 세력이 가졌던 위상이나 의미와 비교하는 와중에 나온 평가였다. 정치적 의미나 현실 권력과의 관계에 있어선 '허상'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닐 듯 싶다.

과연 저들이 막대한 양의 태극기를 어떻게 마련했는지도 궁금하지만, 그보다 우선 그들이 훼손한 국기의 이미지 때문에 누적된 폐해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탄핵' 전후로 형성되고 극대화된 '태극기=극우'란 상징 이미지 말이다.

위에 언급한대로, 100주년 3.1절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린다고 지적했다. '태극기 부대'을 칭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 문 대통령은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는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와 더불어 태극기에 입혀진 극우의 이미지도 지워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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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진관사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 연합뉴스

#태극기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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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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