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은 붕괴될 것" 볼턴은 알고 있었나

[분석 & 주장] 문재인 정부, '장외 중재자' 역할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등록 2019.03.04 18:33수정 2019.03.04 18:42
15
원고료로 응원
  
a

제2차 북미정상회담 이튿날인 28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무위원장이 베트남 하노이의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호텔에서 회담 도중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백악관은 예정보다 일찍 종료된 2차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 "현시점에서 아무런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AFP


협상을 불발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전형적인 이런 방식이었다. 합의 불발 직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 책임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돌렸다. 미국이 수용할 수 없는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북한이 요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 언론을 통해 드러난 내용은 이와는 다르다. 북한이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 정작 더 중요한 문제도 있었다. 3월 2일자 <뉴욕타임스>는 2018년 초부터 트럼프가 북한과 대화하고 "더 이상 북한의 핵위협은 없다"는 등의 트윗을 올리며 노벨평화상 수상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자 참모들이 불안해 했다고 전했다. 그러자 당시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동료들을 이렇게 안심시켰다고 보도했다.

"걱정하지 말라. 협상은 붕괴될 것이다."

실제로 그는 3월 3일 CBS, CNN, 폭스뉴스에 잇달아 출연해 협상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혔다. 그의 발언 가운데 주목할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 비핵화의 대가로 엄청난 경제적 미래를 얻는 빅딜 내용을 정리한 한글과 영어 두 개의 문서도 건넸다"고 밝힌 부분이다.

그렇다면 그 문서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생각하는 비핵화의 정의를 담은 문서"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볼턴은 "핵과 생화학무기, 탄도미사일을 포기하는 결정을 하라"는 것이었다며, 이게 바로 "우리가 원하는 광범위하게 정의된 비핵화"라고 설명했다. 볼턴은 북한이 이를 수용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회담 전부터 "협상의 붕괴"를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비핵화는 핵무기 및 핵물질, 그리고 핵시설을 폐기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는 추가적으로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포기까지 비핵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란 핵협정 탈퇴의 불똥
 
a

베네수엘라 제제 관련 브리핑 1월 28일 미국 워싱턴에 위치한 백악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국가 안보 회의 보좌관인 존 볼턴이 듣고 있는 모습. ⓒ AP Photo/ 연합뉴스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는 왜 이렇게 무리한 비핵화를 요구한 것일까? 그 답은 트럼프가 지난 2018년 5월에 탈퇴한 이란 핵협정에 있다. 트럼프 본인이 이 협정에서 탈퇴하고는 북한과의 합의는 이란 핵협정보다 강력해야 한다는 기준을 세워버린 것이다. 볼턴이 3월 3일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란 핵 협상에서 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차 말했다"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 행정부가 목표로 내세워온 FFVD, 즉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inal, fully verified denuclearization)'의 연원과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이 공개적으로 처음 등장한 시점은 트럼프가 이란 핵협정에서 탈퇴한 지 한 달여 후인 2018년 7월 초였다. 당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북한을 방문하기에 앞서 "김정은 위원장이 FFVD를 약속했다"며, 이는 미국의 북핵 해결 원칙이라고 못 박았다. 이후 미국은 CVID와 FFVD를 혼용하다가 10월부터는 FFVD로 거의 '단일화' 해왔다.

그리고 폼페이오는 미국의 외교전문잡지 <포린어페어즈> 2018년 11/12월호 기고문에서 "앞으로 있을 북한과의 협정은 이란 핵협정보다 우수할 것"이고 "우리의 목표는 FFVD"라고 강조하면서 이것이 이란 핵협정보다 강력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최종적(Final)'의 의미는 북한이 앞으로는 또다시 대량파괴무기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재개할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고 이는 이란 핵협정에는 담보되지 않은 것이다. '완전히 검증되는(Fully verified)'이라는 것은 이란의 핵심적인 군사 시설에 대한 사찰이 포함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약점이 있는 이란 핵협정보다 더 강력한 검증 기준이 북한에 적용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구체적인 합의는 협상에 남겨져 있지만, FFVD는 우리가 양보하지 않을 핵심적인 목표에 해당된다."
 
즉, 북핵 합의에는 이란 핵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던 탄도미사일과 생화학무기 폐기도 담겨야 하고, 이란 핵협정에서 제한적으로 인정한 우라늄 농축 활동도 북한에겐 불허해야 하며, 북한을 상대로 사실상의 전면 사찰도 보장돼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이번 북미정상회담에서 이러한 내용을 두루 담은 '비핵화 문건'을 꺼내들었다. 김정은으로서는 당황할 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비핵화'가 남북 정상이 합의한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라는 "완전한 비핵화"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 사실상의 무장 해제 요구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볼턴은 "빅딜 문서"라고 표현했지만, 김정은은 패전국에게나 강요하는 사실상의 '항복 문서'로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장외 중재자'의 한계
 
a

지난 2018년 9월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에서 돌아온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마련된 프레스센터에 방문해 대국민보고를 통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이희훈


만약 트럼프가 FFVD 관철을 목표로 삼았고 김정은이 이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인해 2차 북미정상회담이 불발된 것이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제재 완화 대(對) 영변+알파'를 둘러싼 갈등보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회담 불발 이후 회의론과 낙관론이 교차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와 그의 참모들은 일단 겉으로는 향후 결과에 낙관론을 펴고 있다. 하지만 김정은은 최선희 외무성 부상을 통해 회의감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로서는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라면, 김정은은 트럼프의 본심을 의심하면서 신년사에서 언급한 "새로운 길"을 진짜로 생각해야 할 상황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문재인 정부의 역할도 엄중해졌다. 그 출발점은 이젠 더 이상 "중재"라는 표현부터 사용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실 이번 2차 북미정상회담 불발로 북미 양자 회담 구도의 한계는 명확해졌다. 문재인 정부는 '장외 중재자' 역할을 해왔지만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라곤 예상조차 못했다. 남북 간, 한미 간에 긴밀한 소통과 공조가 이뤄져왔다고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제3자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장내 당사자'로서의 위상을 분명히 하면서 북미 양자 협상 구도를 '다자화' 해야 한다. 남북미 3자든, 남북미중 4자든, 러시아와 일본까지 포함하는 6자든 말이다.
#비핵화
댓글15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