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설거지를" 이 마음 먹는 데 19년이 걸렸다

아빠가 주방에 있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익숙하길 바라며

등록 2019.03.11 09:19수정 2019.08.12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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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싱크대 안에 수북이 쌓여만 가는 설거지와 주변에 널려 있는 냄비들 그리고 프라이팬 앞에만 서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냄비 안에 남아 있는 음식의 쿰쿰한 냄새, 싱크대 선반에 널브러져 축축한 채로 주인을 기다리는 고무장갑 앞에 서면 자꾸만 밖으로 떠나고만 싶었다. 맞다, 이 남자가 바로 나다.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는 싱크대 앞에 서면 마치 공황장애가 도진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명치 끝이 저릿하면서 답답한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억지로 설거지 할 생각에 테스토스테론이 온몸으로 뿜어대는 거부 반응이리라. 마음의 균형 추가 사정없이 흔들거렸다.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우리 집 주방이 아니라 템플스테이(temple stay)에서 발우공양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하는. 

'내 앞에 놓인 청수 그릇에 담긴 물로 헹구어 남은 음식을 모두 먹었겠지. 그리고 자신의 밥그릇, 국그릇, 찬그릇을 그릇에 담긴 물로 깨끗이 설거지 하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나머지 가족이 먹은 밥그릇이나 국그릇도 함께 해주었을 거야.'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설거지 하기가 수월해졌다.

설거지는 당연히 아내 몫이라고 생각했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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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설거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 최은경

 19년 전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제일 황당했던 순간이, 신혼여행에 다녀오고 출근하는 첫날 아침에 "밥 안 하느냐?"라는 말을 들은 때였다고 한다. 자기도 아침에 씻고 출근 준비에 바쁜데, 내가 "아침 준비 안 해?" 그랬다고 한다.

불리한 순간에 내 기억력은 여지없이 작동하지 않는다. 아내가 늘 기억이 안 나냐고 물어보는 건, 일단 모른다고 잡아뗀다. 정말 죄다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던가?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기억에 없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오블리비아테(Obliviate)' 기억력 마법을 써서 내 머릿속에 든 기억을 꺼내 보면 모를까. 그러자 아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해야 해?"

미안한다. 나는 당연히 아침 밥 차리고 설거지 하는 건 아내 몫이라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아이들은 크고 교육 문제로 아내와 다투기라도 한 날이면 설거지가 밀려 있는 게 더 못마땅했다.

"설거지는 그날 그날 좀 하지."

아내는 내 말에 괘념치 않았다.

"쌓아놨다가 시간 날 때 한 번에 하면 되지."

보다 못해 억지로 설거지를 떠맡은 날이면 내 불편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릇끼리 부딪히고 숟가락들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내적갈등의 외적 표현이랄까.

방 안에서 쉬고 있던 아내는 그 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나와서 한 마디 한다. 어쩌다 설거지 한 번 해주면서 꼭 그렇게 생색을 내야 하느냐. 당연히 아내 말이 맞는 말이라고 대뇌피질에서는 정상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옹색한 자존심에 상처 난 나의 변연계는 잔뜩 화가 나 있다.

'당신이 잠든 저녁과 아침 사이 아이들은 누가 챙기는데!'

이런 상황은 최근까지도 반복되는 부부싸움 레퍼토리였다. 그랬는데 지난해 연말 듣게 된 라디오 사연으로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사연인 즉,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설거지를 해주겠다고 했는데, 아내가 그런 남편을 칭찬해주기는커녕 '친구 남편은 매일 설거지 해준다고 했다'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는 거였다. 그래서 남편도 이에 질세라 "누가 더 오래 설거지를 계속해주는지 두고 봐"라고 했다고.

새로운 세계를 들여다본 거 같았다. 그렇게까지 설거지에 목숨을 거는 남자도 있구나 싶어, 아내와 다투고 화났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남자도 설거지를 해야 하는 거구나' 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기까지 19년이 걸린 거다.

달라진 아빠 모습에 달라진 아이들

이후 달라진 내 모습에 아내는 '그래도 내 맘 알아주는 건 당신밖에 없다'라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아이들도 달라졌다. 설거지 해 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들으면 "안 하던 아빠도 하는데..."라고 선뜻 응해주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출근 골든타임에 주방장으로 혹은 보조요리사로 활약한다. 요리에 들어갈 재료를 옆에서 손질해 주거나 아내가 출근 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카레나 볶음요리들을 골고루 저어주고 프라이팬에 눌어붙지 않도록 전기레인지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이제야 우리 부부가 블루투스 기기처럼 서로 페어링(pairing)이 된 셈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설거지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늘 어머니는 식사 때나 새참 시간이 되면 논두렁이나 밭에서 일하다 돌아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하시고 새참을 머리에 이고 나오셨다.

아버지는 소나 돼지 등 가축의 먹이를 준비하시고 축사를 돌보셨다. 아버지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내게 보이셨다면, 어머니도 내게 주방에서 남자가 설거지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더라면 나는 달랐을까.

아빠가 설거지하고 요리하는 모습이 우리 아이들에게, 특히 아들에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각인 되었으면 좋겠다. 마치 어릴 때 많이 먹어본 음식을 커서도 자연스레 찾게 되고 좋아하는 것처럼 말이다. 낯설지 않은, 익숙한 모습이어야 커서도 거부감이 없을 테니.
덧붙이는 글 치의신보에 중복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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