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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이 사랑이 될 수 있다고? 이 연극을 참고한다면...

[리뷰] 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 러시아 대문호가 들여다 본 '아내'

19.03.17 16:50최종업데이트19.03.1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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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 ⓒ ?씨어터오컴퍼니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안톤 체호프는 소설, 희곡 등을 포함해 9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러시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다. 그를 '단편 소설의 거장'이자 '현대 희곡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체호프는 삶의 단면을 칼로 잘라 보여주는 듯한 인상의 작품을 많이 남겼다. 개중엔 진지한 것도 많았지만 유머러스한 것들도 제법 있었다. 900편에 이르는 글이 모두 발표된 것은 아니다. 미발표 글이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들은 수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그의 희곡들은 전 세계에서 끊임없이 무대에 오른다. 

연극 <체홉, 여자를 읽다>는 그의 희곡이 아닌, 미발표 단편소설 5편을 옴니버스로 구성한 작품이다. '약사의 아내', '아가피아', '나의 아내들', '니노치카', '불행'이라 이름이 붙여진 에피소드들은 하나같이 아내의 불륜과 일탈을 소재로 한다. 

삶의 정수를 들여다보는 데 천재적인 체호프가 인간을 들여다 본 작품. 아내의 사랑이나 욕망을 그린 작품들을 '여자를 읽는다'는 주제 아래 모아놓은 것이다. 5편의 에피소드들은 각각 코미디, 드라마, 그로테스크 코미디, 로맨틱 코미디, 멜로의 형식을 띈다. 

약사의 아내

어느 조용한 마을.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간, 재미없는 약사 남편을 둔 젊고 예쁜 약사의 아내가 푸념한다. 코골며 나 몰라라 자고 있는 남편을 향한 불만의 표출이다. 조용한 삶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그녀 아닌가. 

사실 그녀는 젊고 예쁜 걸로 소문이 나 있는 바. 두 군인 장교가 찾아온다. 그녀는 남편이 깨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들을 맞이한다. 곧 둘 중 한 명의 잘생긴 장교와 곧 눈이 맞아 흥분의 감정으로 빠져든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녀는 사심없이 그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끌릴 뿐이다. 

잘생기지 않은 술 취한 다른 한 명의 장교와의 실랑이, 그녀와 잘생긴 장교와의 밀당, 깰듯 말듯 긴장하게 만드는 남편의 잠꼬대 등이 어우러져 무대는 코믹하면서도 은근한 에로틱을 선사한다. 하지만 아내의 사랑과 욕망은 아직 위험하지 않다. 

5편의 에피소드 중 가장 무난한 편이다. 완연한 코미디로도, 정교한 드라마로도 보이지 않는다. 옴니버스 연극의 시작으로 큰 임팩트를 남기지 않는 게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이는데, 일면 성공한 듯하지만 자칫 뒤에 이어질 에피소드들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반감을 일으킬 수 있다. 

아가피아

자유로운 영혼 사프카와 그보다 나이가 많은 작가 니키타는 함께 낚시를 즐기는 친구 사이다. 조용히 책을 읽으며 낚시를 즐기는 니키타와는 달리 사프카는 새소리가 들리지 않자 새소리 나는 물건을 가져와 기어이 새소리를 듣는 낭만파이다. 그건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였다. 

그런 사프카여서일까.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피아는 먹을 것들을 챙겨와 안면이 있는 니키타가 보는 앞에서도 아랑곳 없이 밀애를 즐긴다. 이제 곧 남편이 올 시간. 가야 한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사프카와 아가피아의 밀애는 '알콩달콩'하다. 파렴치한 불륜의 모습으로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아내의 욕망 아닌 사랑이 보일 뿐이다. 사프카도 그녀를 욕망의 대상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 같다. 위험한 겉모습과 달리 그저 사랑스런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전형적인 불륜 드라마의 형식을 띄지만 일탈, 욕망의 키워드보다 사랑의 키워드가 앞선다. 아울러 이후 에피소드들에서 이어질 여자로서의 주체적인 욕망 발현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사프카와 아가피아의 밀애와 사랑은 사프카가 아닌 아가피아의 선택인 것이다. 

나의 아내들 

'푸른수염'으로 지칭되는 연쇄살인마, 라울 시냐 보로다. 그는 7명의 아내를 살해한 자신을 묘사한 어느 오페라를 인정할 수 없어,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쓴다. 왜 아내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그가 살해한 7명의 아내들은 '여자'를 생각할 때의 정형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가 나쁘고 몸매가 좋으면서 돈만 펑펑 써 짜증난다든지, 머리가 너무 좋아 피를 말리게 한다든지, 한없이 순종적이어서 답답하다든지, 매일 시만 읽으며 놈팽이 시인과 바람을 핀다든지 등등. 

7명의 아내들은 여자의 정형화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여자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맞는 게 아닐까 싶다. 5개의 에피소드 중 가장 큰 웃음을 주기도 하는데, 그 웃음의 이면에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세상의 정형화된 시선과 욕망을 내보이면 안 된다는 기조에 반하는 욕망의 표출. 

다른 에피소드들이 아내를 주체로 하여 그녀들의 욕망과 사랑을 그려냈다면, 이 에피소드만은 아내를 객체화하는 방식을 차용했다. 그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평소 여자를 어떻게 정형화하고 대상화하여 왔는가 생각하게 한다. 동시에 그 자체로 그런 생각을 호되게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니노치카

니노치카의 찌질하기 짝이 없는 남편 비흘레네프는 절친이자 사교계의 유명인사 루반체프에게 아내와의 문제에 대해 하소연한다. 한없이 차가운 니노치카와 잘 지내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니노치카와 내연 관계에 있는 루반체프는 니노치카에게 직접 말해 문제를 해결한다. 

하지만 비흘레네프에게 내연 관계를 들키고 마는 그들.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이내 루반체프는 니노치카의 의견을 들을 것도 없이 비흘레네프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자못 충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이는 비흘레네프, 역시 찌질하기 짝이 없다. 

에피소드의 제목도 니노치카, 주인공 세 명 사이의 문제 핵심도 니노치카이지만 정작 니노치카는 이 에피소드에서 도구이자 수단에 불과하다. 거래의 도구, 문제 해결의 수단. 남자들끼리의 거래이자 문제 해결이다. 

'로맨틱 코미디'라고 형식상 이름을 붙여놨지만, 엽기와 죽음 등이 나오지 않았을 뿐 '그로테스크 코미디'에 가깝다. 남자가 여자를, 사람이 사람을 어찌 이토록 수단화하고 도구화할 수 있단 말인가. 찌질하기 짝이 없는 남자도, 의리도 사랑도 없이 여기저기 후리고 등쳐먹는 남자도, 여자가 가장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종국엔 그들에게 여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불행 

고지식하고 꽉 막힌 변호사 남편 안드레이를 둔 소피아, 안드레이와 친구 사이이기도 한 일리인, 일리인은 소피아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고 구애를 한다. 하지만 결혼한 몸인 소피아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느 날도 일리인의 줄기찬 구애를 뿌리치고 집에 와 안드레이의 저녁을 챙기는 소피아, 그녀는 너무너무 불행하다. 일리인도 초대한 파티가 있어 술을 빌려 남편에게 자신의 불행을 말하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결국 세 당사자가 모인 곳에서 소피아는 큰 결심을 한다. 

이 에피소드는 여자의 사랑과 불륜 이상의 모습을 보인다. 또는 사랑도 불륜도 택할 수 없는 여자의 결심. 그건 모두에게 '불행'을 남긴다. 아니, 여자에겐 불행 아닌 행복의 시작일 수도 있겠다. 그녀의 결심에 이은 선택의 양상은 다분히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체홉, 여자를 읽다.>의 피날레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에피소드이다. 여자를 보고, 여자 곁의 남자를 보고, 여자가 보는 이 연극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아내가 주체가 된다는 것, 아내가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한 여자 한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것. 즉 또 다른 시작의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체홉, 여자를 읽다. 아내 사랑과 욕망 일탈과 불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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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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