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은 지금] 봄눈이 그려낸 천상의 풍경

3월의 셋째 주말, 꽃 피는 봄에 내린 눈

등록 2019.03.18 15:45수정 2019.03.1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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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 봄눈이라 하기엔 아직 설악산의 겨울은 깊다. 앞으로 한 달은 더 겨울잠을 잘 산은 겨울가뭄 끝에 내려준 눈이 고맙다. ⓒ 정덕수

 
산을 오를 때 들머리와 날머리를 선택하는 방법은 성향에 따라 다르다. 시작을 가파른 직선을 선택하며 돌아올 땐 대체로 완만한 길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처음엔 완만한 길로 올라 짧고 가파른 길을 이용해 내려오는 걸 원하는 이들도 있다.

계절도 지켜보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게 된다. 서서히 계절이 바뀌기만 하지는 않더란 이야기다. 때론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모습을 꼭 닮기도 한다. 그렇다고 늘 이와 같지도 않은 게 자연의 섭리라, 가장 먼저 한 계절을 맞이하고도 다른 계절로 이동은 가장 늦다.

산은 높이를 달리하며 높을수록 가을과 겨울은 빠르게 자리하고, 반대로 봄과 여름은 가장 늦게 맞이 하면서도 짧다. 바다를 지척에 둔 설악산의 해발 200m 가량 되는 대부분의 마을들에선 이미 봄이 한껏 팽창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조마조마 하다. 거기에서 걸어서도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지척에선 전혀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한계령 오색에서 한계령으로 오르는 길은 백두대간과 함께 달린다. 왼쪽으론 백두대간의 북암령에서 점봉산을 거쳐 한계령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론 대청봉에서 끝청봉을 거쳐 한계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크게 웅크린 뼈대를 보며 오른다. ⓒ 정덕수

 
매화와 복수초는 이미 제법 깊은 골짜기에서도 만날 수 있고, 얼레지와 노루귀 현호색이 앞다퉈 피는데 산은 여전히 한겨울 풍경이다. 산수유와 생강나무, 진달래, 개나린 이미 피었고 며칠 안 되어 벚꽃이 흐드러질 기세다. 

지난 3월 15일 비 소식에 "3월이니 한계령엔 눈이 내리겠네. 눈꽃이나 지난 겨울 촬영 못했으니 한 번 나서 봐야겠어"라고 혼자 중얼거렸는데 토요일 나가보니 북암령 어귀가 막 떠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막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을 만날까, 아직 얼마간 산자락을 깊은 잠에 가둔 겨울과 이별하기 전 애틋한 시간을 가져볼까 갈등했다. 친구가 9시쯤 한계령을 가자고 전화를 안 했다면 남대천이나 복사꽃 꽃망울 움트는 곰마을이나 종합운동장 근처를 휘돌았겠다. 다소 삐딱하게 다른 방향으로 틀어 생각하는 일종의 반항적 기질도 작용했겠지만, 도착한 친구 차를 타고 오색을 지나 한계령으로 향했다.

개나리나 진달래는 며칠 기다려야겠지만 생강나무와 산수유, 매화는 만개했다. 자두도 일찍 꽃이 핀 걸 보며 몇 년 전 일시에 봄꽃들이 피어 혼란스럽던 기억을 해냈다. 생각나무가 핀 다음 진달래와 살구꽃, 복수꽃이 자두와 함께 피는데 생강나무가 필 시기에 온갖 유실수와 산벚, 돌배까지 꽃이 피는 기이한 현상을 만났던 기억은 몇 년이 지났어도 의문이다.
 

한계령 구름이 채 걷히지 않은 한계령은 예상만큼은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설경을 촬영하기엔 무리는 없었다. ⓒ 정덕수

 
오색초등학교에서 결국 상평초등학교 오색분교로 바뀐 모교를 지나 관터마을 앞을 지날 때 44번 국도를 따라 나란히 달려오던 백두대간 사면에 은빛 눈꽃들이 빛났다.

"역시 생각대로야. 오늘은 눈꽃 사진 좀 올 들어 처음으로 촬영하겠네."

운전을 하던 친구가 차창 밖을 흘깃 보더니 한마디 했다. 친구와 겨우내 눈다운 눈을 본 것이라곤 2월 1일에 낙산 주변에서였다. 1월 하순에 매화와 복수초를 본 뒤 눈 내리면 다시 찾자고 했던 터였다. 그러나 이때는 오색은 물론 한계령도 눈이 몇 밀리미터밖엔 내리지 않았다.
 

한계령 봄눈 내린 한계령의 참나무 숲 ⓒ 정덕수

 
천성적으로 눈은 눈답게 푹푹 빠져야 눈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바란다고 갖춰지지 않는다. 이루어질 조건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예전엔 겨울이면 눈이 처마에 닿도록 내렸다. 사흘을 넘어 나흘, 닷새 하염없이 퍼부었다. 언제부턴가 아주 이른 초겨울이나 늦은 가을자락에 한두 번 갑작스럽게 눈이 내리면 다행이고, 그마저 없는 경우 겨울 가뭄만 지독하다.

장대터널을 지날 때, "도대체 이 터널은 언제 빠져나가는 거야? 이젠 지겨워"라 투덜거리는 날 발견한다. 경이로운 토목기술의 집합체인 터널이 아무리 세상과 세상을 빠르고 안전하게 소통시켜주더라도, 차창 밖으로 파란 하늘아래 펼쳐진 산과 들과 굽이쳐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싶은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가뭄이 길다는 이야긴 바깥 나들이엔 좋은 조건이겠다. 비나 눈이 안 내리는 조건만큼 나들이에 좋은 조건도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지독하게 길면 어느 순간 눈이 그립고, 비 내리는 풍경을 욕심낸다. 거기에 더해 다가올 봄 풍경이 삭막하리란 걸 이미 깨달아버리면, 쾌청하기만 한 긴 겨울 가뭄은 지긋지긋해서 털어내고 싶은 귀찮은 존재가 된다.
 

한계령 정상의 사면위로는 크기가 비슷한 참나무 숲이다. 봄눈 내린 숲은 여전히 겨울 풍경이다. ⓒ 정덕수

 
설을 전후해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3월은 물론이고 4월에도 예고 없이 눈이 내린다. 농가에서 거름을 낸 밭을 갈고 두럭을 만든 뒤 감자를 놓고, 옥수수를 심어 싹이 뾰족이 내밀 때 내리는 눈은 농심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다. 그나마 지독한 가뭄보다는 났다. 한창 자라는 싹들이 속절없이 누렇게 뜨다 결국 말라비틀어지면 농부는 자식들의 고통을 대하듯 안절부절못한다.

봄눈은 오래 쌓여있지 못한다. 짙은 구름이 물러나고 하늘에 해가 드러나면 물거품이 서서히 꺼지듯 자취를 감춘다. 간절히 기다렸던 만남은 시간이 구분한다. 기다릴 땐 한 없이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만남의 시간을 얄밉게 지나가는 모습처럼 봄눈은 속절없이 스러진다.
 

한계령 오색에서 한계령으로 오르는 길에서 줄곳 눈길을 사로잡는 바위산이 있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차 한 잔을 손에 들고 바라보아도 좋고, 필례로 넘어가는 길에서도 만날 수 있는 이 봉우리를 경계로 양양군과 인제군이 나뉜다. ⓒ 정덕수

 
한계령에서 바라보는 점봉산과 서북주릉의 숲들은 그런 봄눈이나마 고마워 한껏 받아들였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할 때 웃음이라는 소통의 기호가 가장 적합하다. 산의 품에서 좀 더 깊은 잠에 머물러야 할 꽃들을 피워낼 식물들은 포근하게 덮을 눈이 절대적이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경험은 점봉산과 백두대간에겐 지난 겨울이 아찔했다.

몇 장 사진을 담고 늦은 아침을 먹고 좀 더 둘러볼 생각을 했다. 한계령에서 가까운 필례로 향했다. 필례라는 이름은 삼베 짜는 여자를 이르는 한자말 "필녀(匹女)"로, 주변 지형이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여자를 닮은 형국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필례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오색으로 향하는데 이미 늦은 뒤였다.
 

한계령 설화 날이 개고 해가 비치기 시작해도 바람이 차고 기온이 낮은 한계령 정상은 높은 습도가 눈꽃이 아닌 얼음꽃 상고대를 만들어 낸다. ⓒ 정덕수

 
구름 걷히고 해가 드러나면 봄눈 금새 자취를 감춘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배고픈 걸 못 참은 탓에 또 놓치고 말았다. "금새보다 더 야속하고 미운 새도 없네" 실없이 농담 한마디로 넘겨버리기엔 오색의 봄눈 풍경은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우리 좀 더 내려가서 노랑제비꽃하고 생강나무랑 진달래나 촬영하자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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