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지사에게 죽임 당한 항일독립지사

[주장] 항일혁명지사 김립의 명예 회복을 고대하며

등록 2019.03.19 07:53수정 2019.03.1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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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시절 항일독립지사들은 일제와 싸우는 도중 일본 제국 경찰이나 그 앞잡이인 밀정만 죽인 게 아니다. 뜻을 같이 하는 항일지사들끼리 서로 죽고 죽인 경우도 적지 않다.

북만주 항일민족교육의 효시가 된 서전서숙을 이상설, 이동녕과 함께 세운 이가 정순만이다. 정순만은 이상설과 호형호제할 정도로 절친한 관계이자 이상설의 심복이었다.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될 때 정순만은 1만8000원을 모금해 여비를 대주었던 인물이다. 바로 해외 항일근거지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한인들과 미주 교포를 대상으로 정순만이 수고한 결실이었다.

현재 시세로 환산하면 2억 원이 넘는 돈이다. 그러나 정순만은 1910년대 기호파-서북파 등 한인 노령사회의 파벌과 갈등 속에 생명을 위협받았다. 그때 이상설은 자신의 집에 정순만을 숨겨주며 지켜주었다. 그러나 결국 상대 파벌에 의해 정순만은 도끼로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그런가 하면 코뮤니스트와 아나키스트 간 살육전은 끔찍할 정도였다. 일제가 내건 현상금 액수에서 세 번째로 많이 내걸린 인물이 정화암(본명 정현섭)이다. 정화암은 무정부주의자로 북경에서 신채호, 이회영, 류자명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다. 정화암이 쓴 회고록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에는 끔찍한 살육전이 이렇게 서술돼 나온다.

"해림을 중심으로 한족총련지역(필자 주 : 아나키스트 본거지)과 영안현을 중심으로 공산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경비를 돌던 교민이 20여 세 가량의 청년공산당원을 잡아왔다. 하얼빈 쪽에서 공산당 본거지인 영안현으로 가려면 해림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가끔 공산당원들이 해림 역에서 체포되어 오는 수가 있었다. 체포되어 온 사람들은 거의 사살해 버렸다.

자루에 산 채로 묶어 넣고 다리 위에서 얼음이 언 강 위로 떨어뜨려 익사시키는 방법, 땅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묶어 그 구덩이에 세워놓고는 흙으로 묻어 죽이는 방법, 넓은 벌판으로 데려가 도망치게 하고는 뒤에서 총으로 쏴 죽이는 방법 등 서로가 잔인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공산당원이라고 잡혀온 그 청년도 순진하고 총명하게 생겨 아까웠다. 언제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청년을 설득하여 내 사람으로 만들어 볼 결심이었다. 그런데 내가 산시(山市)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사이 그 청년은 사살되어 버렸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잡혀 왔다."

 

청산리 전투(1920)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 김좌진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인 한족총연합회 주석이었다. 김좌진 장군의 죽음은 아나키스트와 코뮤니스트 간 갈등이 빚은 참극으로 너무나 안타깝고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독립기념관


거꾸로 청산리 전쟁으로 유명한 백야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자 청년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좌진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인 한족총연합회 주석이었다. 김좌진의 족형제이자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시야 김종진 역시 아나키스트 본거지인 해림 역 근처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돼 피살되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생각의 차이, 곧 이념과 오해는 슬프게도 참극에 또 다른 참극을 낳았다. 민족의 독립!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라는 같은 목표를 위해 목숨을 걸고 분투했지만 항일지사들 간 비극을 피하진 못했다. 항일독립군끼리 수백 명의 비극을 자초한 '자유시 참변'(1921)은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1920년 일제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일제는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독립군 부대는 이미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중소국경지역이나 러시아령 자유시로 집결했다. 그곳에서 군권 다툼 끝에 독립군 부대 상호간 수백 명이 죽고 죽이는 참변을 겪는다. '자유시 참변' 이면에는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간의 파벌과 군권 다툼이 존재했음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결국 간악한 일제는 독립군 토벌에 실패하자 그 화풀이 대상을 만주 일대 조선인 마을을 표적으로 삼았다. 만주 화룡현과 연길현 일대 조선인 마을을 대상으로 닥치는 대로 집을 불태우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20년 경신참변! 바로 그 유명한 간도대학살이 그것이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에는 조선인 마을 소학교 교사를 잡아다가 껍질을 벗겨 죽이는 잔인한 장면이 묘사돼 나온다. 여성을 능욕한 뒤 어린아이와 함께 가족 전체를 불태워 죽이는 등 마을 전체를 초토화시켰다. 일제의 만행으로 한순간에 마을 전체가 몰살되고 지옥으로 변한 천인공노할 참극이었다. 님웨일즈의 <아리랑>에도 김산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목사 가족에게 참극이 빚어지는 슬픈 대목이 나온다. 그러한 일제의 만행은 1937년 남경대학살 당시 그 잔혹성과 야만성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오늘 소개하는 항일독립지사 김립의 죽음 또한 같은 항일독립지사들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이었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더구나 항일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 백범 김구 선생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김립은 이동휘의 최측근으로 일찍이 동양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만든 인물이다. 김립은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참여를 반대했던 이동휘를 설득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한 인물이었다. 이동휘가 국무총리, 김립이 차관급인 국무원 비서장의 직위를 맡았다. 당시 국무원 비서장은 외무차장, 내무차장, 법무차장, 재무차장, 군무차장 등 각부 차장(차관)회의를 주재하는 위치였다. 다시 말해 상해임정의 실질적 업무인 인사와 재무를 통괄했던 지위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사진(1920년 1월 1일 정초) 둘째 줄 왼쪽 끝이 백범 김구, 둘째 줄 가운데 팔짱을 낀 채 다리를 포갠 인물이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에서 10번 째), 이동휘 오른쪽으로 이시영, 안창호, 김철, 그리고 국무원 비서장 김립(왼쪽에서 14번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장건상 ⓒ 독립기념관

 
실제로 항일독립지사 김립은 국제정세에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당대 손에 꼽을 정도의 전략가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승전국인 제국주의 논리임을 일찍이 간파했던 인물이다.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 그리고 그들과 동맹국인 일본이 조선의 식민지 상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립은 처음부터 파리강화회의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김립은 오히려 러시아 혁명 이후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해 대소외교를 중시했던 인물이다. 그리하여 식민지 약소민족 해방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던 레닌으로부터 운동자금을 지원받고자 했다.

김립은 상해 임시정부 특사 자격으로 같은 한인사회당 출신 한형권을 러시아로 파견했다. 그 결과 금괴 40만 루블을 상해로 옮겨오는 데 결정적으로 역할을 수행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인사회당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박진만의 역할이 컸다. 한형권과 박진만은 러시아 볼세비키 권력자 레닌과 직접 대담하며 상해임시정부 인정과 함께 레닌으로부터 거액의 운동자금을 약속 받았다.

박진만은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망각의 존재이지만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로는 대단한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코민테른에 조선의 상황을 보고하고 기관지에 투고하였으며 대중연설을 단행했던 인물이다. 임정 특사 한형권과 함께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상해임시정부를 소비에트 러시아가 승인하도록 만든 숨은 주역이었다.

그는 항일혁명가 가운데 유일하게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던 거물이었다. 한인사회당 출신 한형권과 박진만은 모두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상해 임시정부 대표자격으로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형권은 국빈대우를 받으며 외무차관 카라얀의 환대를 받았다. 실제로 모스크바를 찾아가는 길목마다 한형권은 북을 울리며 태극기 물결 속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1920년대 초반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부들 사진(독립기념관 소장) 이극로, 이동휘, 박진만, 김립(앞줄 왼쪽부터) 김철수, 계봉우, 미상(뒷줄 왼쪽부터). 이극로는 1930-1940년대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지도자이고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위원장, 박진만은 한인사회당 모스크바 파견대표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레닌과 대담하며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자금을 획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뒷줄 김철수는 김립 피살 직후 독립운동자금을 관리했던 인물로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한다. 계봉우는 김립의 절친이자 김립의 권유로 한인사회당에 가입한 역사학자이다. ⓒ 독립기념관

  
역사학자 계봉우는 1920년대 초 '상해 정계에서 김립을 능가할 인물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그만큼 김립은 국제정세에 탁월할 정도로 밝았고 항일운동과정에서 조직과 선전에 뛰어났다.

실제로 1922년 2월 피살 당시 김립은 머리와 가슴에 12발의 총격을 받고 즉사했다. 시신은 처참했고 중국인 복장이어서 김립의 피살 소식을 맨 처음 전한 중국 <차이나 선>지에선 40대 중국인 양춘산으로 보도했다. 양춘산은 김립의 가명이었다. 그러나 며칠 지난 뒤 피살된 중국인이 상해 독립운동의 거물 김립으로 드러났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립 피살 소식을 긴급히 본국 외무대신 앞으로 타전했다. '공산당 수령 김립 살해에 관한 건'이라는 기밀문서를 보낼 정도로 일제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제 첩보자료에도 김립을 '공산당 수령'으로 묘사하거나 '배일흥한(排日興韓)'의 대표적 인물로 적시했다.

일찍이 김립은 1900년대 동향인 항일변호사 허헌과 함께 조선에 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 실현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김립은 김립의 '립(立)'과 허헌의 '헌(憲)'을 생각하며 자신의 본명인 김익용을 김립으로 바꿨던 인물이다.

1910년 2월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이갑, 안창호, 유동렬, 윤해 등과 함께 서북학회에서 활동했다. 서북학회는 구한말 대중연설 등 언변에 능한 청년논객들의 애국계몽기관이자 허수아비 정부를 비판하며 혁명을 꿈꾼 정치조직이었다. 그러나 그해 8월 한일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자 김립은 핵심활동가 이갑, 안창호, 윤해 등과 해외망명을 단행했다.

망명 후 김립은 연해주에서 항일운동단체 권업회 총무가 되어 활동했다. 1911년 김립은 북간도 연길현에 항일민족교육을 전담할 길동기독학당을 세웠고 1912년엔 군사훈련까지 가르친 광성학교를 이동휘와 함께 세워 독립군 양성을 기도했다. 당시 광성학교는 용정 명동학교 못지않을 정도로 북만주 항일민족교육의 본산이었다. 1913년엔 왕청현 라자구에 동림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무관들을 양성했다.

이후 김립은 연해주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적위대와 함께 항일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18년엔 김알렉산드라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했다.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는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에 참여한 조선인 항일혁명여성이다. 한인사회당 창당 당시 국제주의 정신에 입각해 러시아 볼세비키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연결시켜 준 인물로 당시 하바로프스크 당 서기였다.

김립이 이동휘를 설득해 상해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았던 기간은 1919년 11월에서 1920년 9월이다. 그 기간 동안 러시아 혁명 정부는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통합정부로서 국내외 항일혁명역량을 집중시키고 항일독립운동의 총본산 역할을 수행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상해 임정은 이 임무를 방기한 채 무기력하게 외교독립론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다 이승만의 기호파와 안창호의 서북파 간 대립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에 김립 등 사회주의자들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상해 임정은 3·1운동의 희생 속에 탄생된 소중한 망명정부였지만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상해 임정은 1922년 논란 끝에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로 결정한다. 어렵게 소집된 국민대표회의조차도 1923년 상반기 내내 개조파-창조파-임정고수파로 분열된 채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 동안 거의 70여 회에 이를 정도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렇지만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 그리고 무장투쟁노선과 외교독립노선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암투와 분열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자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은 상해 임정의 분열된 모습에 실망하여 독립운동자금지원을 중단한다. <백범일지>의 김구의 회상에서도 언급되듯이 1924년부터 러시아 혁명정부와 상해 임시 정부는 완전히 관계가 단절된다.

문제는 국민대표회의가 열린 6개 월 동안 항일독립지사들의 숙식비의 대부분이 러시아 볼세비키 정권에서 지원한 독립운동자금으로 충당됐다는 사실이다. 한형권이 2차 자금으로 가져온 20만 루블에서 충당한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김립과 한형권을 죽이려고 임정 경무국 비밀경호요원들을 중심으로 테러단을 만들어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김립을 살해하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한형권이 베를린 주재 소련대사관을 거쳐 2차 자금으로 가져온 20만 루블을 빼앗기 위해 의열단 김상옥을 사주해 항일독립지사 윤해를 죽이려 저격했다. 김립의 죽음에 대해 <백범일지>에는 '파렴치한 공금횡령범'으로 규정했다. 실제로 상해 임정은 1922년 1월 26일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고 제1호'를 발표했다. 그 포고문의 일부 내용을 보면 이렇다.
 
"김립은 이동휘와 서로 결탁하여 마침내 국가 공금을 횡령하여 개인주머니를 살찌우고 같은 무리를 불러 모아 공산이란 미명 하에 숨어서 간악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그 죄가 극형에 처할 만하다'.


나남출판사 <백범일지>에는 '김립'의 죽음에 대한 기술이 빠진 채 '김립'의 죄악상만 서술돼 나온다. '김립'이 러시아에서 받은 자금으로 광동(廣東) 출신 중국인 첩을 두고 향락에 빠진 인물로 나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독립운동자금을 부당하게 유용한 매우 지저분한 공금횡령범으로 '김립'을 묘사했다. 이는 '김립'의 처단을 언급하지 않은 채 항일독립지사를 살해한 이유를 합리화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가 50이 넘은 나이에 언제 일제의 의해 피검돼 죽을지 모르는 엄혹한 현실에서 어린 아들 김인과 김신을 위해 쓴 유서이다. 서문에서 백범 김구는 이 점을 밝히고 있다. 해방 후 이광수가 윤문하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 돌베개

   
돌베개 출판사의 <백범일지>에는 '김립'에 대한 내용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돼 나온다. '김립'의 죽음에 대해 백범 김구는 '통쾌하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김립은 죽어 마땅하다는 파렴치범으로 묘사돼 있다.

"마침내 한(필자 주 : 한형권을 가리킴)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러시아 최고지도자인 레닌 씨가 친히 맞이하며 독립자금은 얼마나 필요로 하느냐고 물었다. 한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200만 루블을 요구하였다. 레닌은 웃으면서 반문하였다. '일본을 대항하는 데 200만으로 될 수 있는가?' 한은 본국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자금을 조달한다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레닌은 자기 민족이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즉시 러시아 외교부에 명령하여 현금으로 200만 루블을 지급하게 하였으나 외교부는 금괴운반 문제 때문에 시험적으로 제1차 40만 루블을 한형권에게 주었다.

한이 시베리아에 도착할 시기에 맞추어 이동휘는 비서장인 김립(金立)을 밀파해 한형권을 종용하여 금괴를 임시정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서 빼돌렸다. 김립은 이 금괴로 북간도 자기 식구들을 위하여 토지를 매입하였고 이른바 공산주의자라는 한인, 중국인, 인도인에게 얼마씩 지급하였다. 그리고서 자기는 상해에 비밀리에 잠복하여 광동여자를 첩으로 삼아 향락하는 것이었다.(중략) 정부의 공금 횡령범 김립은 오면직, 노종균 등 청년들에게 총살당하니 사람들이 통쾌하게 생각하였다."


김립을 살해한 노종균, 오면직은 백범 김구와 같은 황해도 출신 28살의 동갑내기 열혈 항일애국지사들이다. 그들은 일찍이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황해도 안악지국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다. 1921년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건이 일제에 발각돼 상해로 망명한 상태였다. 당시 상해 임정 경무국(경무국장 김구)은 김립을 처단할 방안을 세워두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노종균과 오면직이 상해로 망명해 오자 백범 김구는 이들을 비밀경호요원으로 채용하여 김립 처단이라는 특수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결국 '김립'의 죽음은 러시아 혁명 정부로부터 받아온 독립운동자금에 대한 오해에서 빚어졌다. 그 오해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갈등으로 표출되어 민족적 비극이자 참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오늘날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김립'은 <백범일지>의 표현처럼 지저분한 항일운동가가 아니었다.

김립이 피살되자 김립에 이어서 당 재정부장을 맡은 김철수는 모스크바 운동자금이 임시정부 공금이 아니라고 회고한 적이 있다. 김철수는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강달영의 제2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된 뒤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실제로 기밀 해제된 코민테른 보고서에는 모스크바 운동자금의 수령자와 정산 책임자를 한인사회당의 후신인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립'은 1910년대와 20년대 초를 대표하는 걸출한 항일독립지사이자 사회주의자였다. '김립'의 죽음은 실제로 항일독립운동계의 크나큰 손실이자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쇠락해 가는 계기로 작용했다. 20세기 냉전이 해체되고 21세기 마지막 냉전의 고도(孤島)로 남아 있던 한반도에 서서히 평화의 봄바람이 불고 있다.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지사들에게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는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채용한 경우가 허다하다. 항일독립운동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좌우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항일혁명가 김립의 억울한 죽음은 학계에서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졌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의 명예가 회복되고 서훈이 추서되길 고대해 본다.
#김립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상해파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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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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