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약을 먹은 뒤 깨달았다, '나의 적은 여성이 아닙니다'

[포스트 빨간약, 우린 어디에 4] 페미니즘은 나를 지켜주는 '강력한 무기'

등록 2019.03.21 17:15수정 2019.03.2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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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빨간약, 우린 어디에] 에세이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국여성노동자회 영영페미 그룹 <페미워커클럽>은 페미니즘과 노동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의 소모임 입니다.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노동을' 혹은 '노동의 관점으로 페미니즘을' 사유하며 세미나를 진행했고, 각자의 삶과 노동을 재조명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빨간약은 그간 억눌려 자책하던 우리에게 큰 해방감을 주었지만, 사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 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됩니다. 현실과 이상, 상황과 존재의 위치 속에 발생하는 수많은 고민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워커클럽> 멤버들이 나누어온 이야기를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자 에세이로 적어 연재합니다. 


대학 입학 후 처음으로 하는 아르바이트였다. 친구에게 pc방 알바가 꿀이라는 정보를 입수 한 후, 알바몬 사이트에 들어가니 마침 집 근처 pc방에서 '용모 단정한 여자직원 구합니다.' 라고 구인하는 글을 볼 수 있었다. 잘됐다 싶어 바로 면접을 봤고, 다행히 알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손님이 많고 하나하나 음식을 해야 하는 곳이어서 몸이 힘들었지만, 사장님이나 같이 일하는 알바생들이 모두 좋으신 분들이여서 차차 적응해 나갈 수 있었다. 비록 이따금씩 나를 무시하는 손님들로 인해 상처를 받는 일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참고 넘길 수 있었다.

 나를 '그런 여자'로 몰아가다니

그렇게 알바를 한지 한달이 지났을까. 불안불안하더니 기어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내가 퇴근한 후의 일이었다. 피시방의 특성상 손님이 음식을 시키면 알바생들이 직접 음식을 컴퓨터 앞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내가 퇴근한지라 남자 직원이 음식을 서빙하자 남자 손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제 그 여자 어딨어? 왜 걔가 안가져다주고 너가 가져다주냐? 앞으론 꼭 걔가 가지고 오라고 해."

이 말을 남자직원에게 전해들은 사장님이 불같이 화를 내시며 그 손님에게 경고를 했다고 한다. 다음날 출근한 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사장님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덧붙여 말씀하셨다. "pc방이 무슨 술집이야? 여자가 떠받들어 주길 바라면 술집에나 갈 것이지 왜 pc방에 오는지 모르겠다." 그 때 당시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도 술집과 여자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은근히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어떻게 화를 내야하는지 몰랐기에 그저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몇 달이 지나고, pc방 일도 자연스레 관두게 되었다.

이후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던 도중 그 때의 일을 이야기 하자 친구 한명이 화를 내었다. "그 손님, 너를 무슨 창녀취급한거 아니야?" 그제서야 비로소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게 그런 뜻이였어? 나는 그런 여자 아닌데, 날 그런 취급을 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름 대학에 들어가서 장차 성공한 여자가 될 것이란 꿈에 부풀어 있던 나에게 '창녀' 취급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것이였다.

성녀 vs 악녀, 엘리트여성 vs 성매매여성 - 이분화된 여성성의 올가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나는 일명 '빨간약'을 먹게 됐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고,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 때 일명 '빨간약'을 먹게 되었다. 내가 살고있는 이 사회가 남성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라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그 속에서 남성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편하게 유린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에는 호감을 표시해줄지 몰라도 수틀리면 바로 김치녀가 돼버리는 바로 그런 존재.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편하게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사회는 뭐지? 고민이 시작되고, 괴로웠다. 때로는 모르는게 약이라는데, 알아버린 나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괴로웠다. 그냥 파란약을 선택할 것을 그랬다. 그러면 더 편하게 살 수 있을텐데. 당연히 아빠에게서, 남친에게서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를 지킬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 인기 많은 여성학 강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성으로서의 '나'에 집중하며 공부했던 것이, 점차 다른 여성들의 이슈에까지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들과 연대하고 싶었다.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겨낸다면 두려움도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

그러다 여성노동자회에서 주최한 '페미노동캠프'에 참가하게 되고,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학교에서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던 것과는 다르게, 세미나를 통해 많은 친구들, 선배들과 의견을 교류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 중 회원들과 같이 공부한 책,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에서 우에노 치즈코가 나에게 지난 알바생 시절 불쾌했던 경험에서 느낀 나의 분노의 원인을 알려주었다.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가부장제 체제 하에서 엘리트 여성과 아닌 여성으로 이분화 되고, 그들끼리 경쟁을 하게 된다고 한다.

'여여격차'가 벌어질수록 여성들은 연대하기 어려워지고, 자책감과 자부심이 양극으로 심화된다. 나는 당시에 내가 엘리트여성에 가까웠다고 느끼고 자부심이 있었는데, 나를 성매매 여성으로 취급했다는 것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불쾌함이 부끄럽다. 나의 적을 '여성'으로 생각했음이 더없이 창피하다. 이제는 '악녀'에 카테고리화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느낀다. '성녀' '악녀'의 이분화는 남자들이 여자를 편하게 나누어 이용한 것에 그치기 때문이다. 여성이 두 가지로 나뉘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악녀'에 속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게 된다.

'나를 악녀로, 창녀로, 김치녀로, 된장녀로, 김여사로 보지 말아줘. 나는 그들과 달라.' 많은 여성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 가부장제 사회에 동화되어 하게 되는 이러한 생각들은 자신을 얽매는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이런 올가미에서 벗어나서 여성들을 '성녀' '악녀' 혹은 '엘리트여성' '비엘리트 여성'으로 이분화하여 교묘하게 그들을 수탈하는 가부장제에 화를 낼 것이다.

빨간약,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

빨간약을 먹기 전의 나는 어쩌면 편했을 지 모른다. 가끔은 내가 페미니스트로 각성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평화롭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오히려 빨간약을 먹고 난 후 나를 지키는 법을 깨달은 것 같다. 과거에는 불쾌한 경험을 해도 상처 받았을지 언정 겉으로는 웃으며 아무 말도 못하고 넘겼을 지 몰라도, 지금은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나는 은근히 기분 나쁜데도 이유를 알 수 없어 웃고 넘겼던 것을, 지금의 나는 같은 상황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남자 손님이 어디를 가나 여성을 깔보는 남성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비웃어 줄 것이다. 또 사장님에게, 술집에 가면 여성을 쉽게 돈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발언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살포시 얘기해줄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그 말과 행동은 못하더라도, 같은 상황에서 가만히 웃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내가, 그리고 여성이 무시 당하는 상황에서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페미니즘을 일컬어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라고 칭한다. 나는 어떤 부분은 동감하고, 어떤 부분은 동감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막 깨닫기 시작한 나는 한때 페미니즘이 나를 망쳤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어두운 면을 깨달았고, 그를 외면하고 싶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스스로 좀먹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로 산 지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깨달았다. 페미니즘은 나를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사회에서 나를 지켜주는 강력한 무기가 되리라고 믿는다.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여 나를 비롯한 여성들을 깔보는 이들을 보란 듯 비웃어 주고, 코웃음 쳐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 영영페미 모임 '페미워커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돕여 #여적여 #여성알바 #페미워커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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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하는 여성노동운동 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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