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진마스크만 쓰고 일하다..." 어느 군무원의 이야기

직업환경의학 의사가 만난 노동자 건강 이야기

등록 2019.03.19 11:59수정 2019.03.19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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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병과 관련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기 위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에게는 업무 관련성 평가 의뢰가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 전공의 수련 과정 중에도 업무 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게 되어 있다. 필자도 전공의 시절 20여 건의 업무 관련성 평가서를 작성하였는데 그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업무 관련성 평가서는 간단하기도 하면서 복잡하기도 하다. 각 작업의 특성과 발생한 질환의 인과관계 수준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뢰된 사례와 관련하여 연구 자료가 많지 않거나 작업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어려운 경우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내용을 검색하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노동자의 작업 관련 자료를 보충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업무 관련성 평가 사례는 36세 스프레이 도장공에서 발생한 비소세포성 폐암 사례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면 누구나 발생할 확률이 높은 직업병임을 알 수 있는 사례였다.

처음 이 사건을 접했을 때 명확한 자료를 찾아 첨부해주면 간단하게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다양한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도료를 칠하는 도장공은 그 업무 자체로 국제암연구소(IARC)에서 1급 발암 직업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군무원이었다. 공무원 신분을 가지고 군에서 종사하는 군무원은 산재나 직업병 관련하여 산재보험이 아닌 공무원 연금공단의 산재 승인을 받게 되어있다. 작업 환경에 대한 감시나 특수건강진단 등의 과정은 산업안전보건법이 아닌 '군 작업환경 및 작업자 보건관리 훈령'이라는 규칙을 따른다. 

그 결과 이 노동자는 스프레이 도장공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며 폐암에 걸렸음에도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법원을 상대로 '공무상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청구 소송'을 준비 중이었다. 오히려 몇 년 전 같은 공정에서 근무한 동료의 백혈병은 바로 승인되었다고 했다. 산재보험의 직업병 인정 과정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공무원 연금공단의 직업병 인정 과정은 훨씬 어려운 수준이었다. 

관련 자료를 모두 검토하고 실제 사용했던 보호구와 작업 장소에 대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해당 노동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스프레이 도장공은 각종 발암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산재승인 과정에서 업무관련성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 인크루트 직업사전

 

첨부된 의무 기록상 폐암이 이미 뼈에 전이된 상태였다.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우울한 상태는 아닐지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걱정과 달리 다소 활기찼다.


노동자는 "공무원 연금공단의 불승인이 매우 억울해 본인이 쓰던 보호구며 작업 환경이며 모두 잘 알리고 싶다"며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모든 물어보라고 했다. "그동안 제대로 된 보호구나 환기 시설도 없이 일해서 결국 이렇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덕분에 나는 궁금한 질문을 원 없이 했고 필요한 사진 자료들도 추가로 받기로 했다. 

통화 말미에 노동자는 조심스레 아이들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둘이 있는데 그 아이들이 걱정이라며 소송에서 꼭 이기고 싶다고 했다. 이에 나는 당시 업무 관련성 평가의 자료는 소송에서 절대 지지 않을 정도로 준비해야 했다. 

실제로도 근무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넓은 창고를 그냥 정비소라고 쓰고 있었고 창문에 달린 환풍기 하나가 환기시설 전부였다. 그곳에서 군용 대공포를 정비하고 색칠하는 업무를 하는데 정비 작업은 많지 않고 노후화된 장비의 도색이 주된 업무였다. 

안전관리 담당자도 전문 인력이 아닌 사람이 하고 있고 이에 대한 외부 감사도 받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한 노동자가 백혈병이 발생해 산재 승인까지 받았음에도 여전히 방진 마스크만 쓰고 작업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작업에 주로 사용된 군용 카키색은 발암물질인 크롬을 함유하고 있었다. 스프레이 도장을 통해 노출되는 경우 방진 마스크는 이를 효과적으로 막아줄 수 없었다. 오히려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더 노출될 가능성마저 있었다. 

예상보다 훨씬 길어진 업무 관련성 평가서를 보내드리고 몇 해 지난 3월 어느 날, 소송을 통해 군무원이 산재 승인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장 작업 노동자를 만날 때면 가끔 당시 군무원의 활기찼던 목소리가 떠오르곤 한다. 울분보단 열정이 느껴지던 목소리. 다행히 2018년 9월 21일 공무상 재해 보상의 내용 수준을 높이기 위해 공무원 재해보상보험법을 공무원연금법에서 분리해 제정·시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무상 질병과 관련한 요양 승인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지속적인 개정, 보충을 통해 불필요한 소송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권종호님은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이자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또한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3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업무관련성평가 #직업환경의학 #공무원 연금공단 #산업재해 #산재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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