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이자 자애로운 아버지" 백범을 판소리로 만나다

[인터뷰] <백범 김구> 총감독 임진택... 21일, 임시의정원 100주년 기념 국회 공연

등록 2019.03.20 13:31수정 2019.03.2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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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1일 오후 7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초청 공연하는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포스터. ⓒ 임진택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국회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아래 의정원)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의정원'은 1919년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서 개원됐다. 초대 의장에 이동녕(1869∼1940)을 선출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오는 4월 10일이 국회 전신인 '의정원' 개원 100주년이다. 국회가 '의정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해 임진택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21일 오후 7시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초청 공연한다.


사설은 임진택, 작창과 실연은 임진택과 왕기철, 고수는 이규호와 고창훈이 맡는다. 임진택 명창은 초청 공연에 이어 다음달 12일 국회의정아카데미에서 <백범 김구> 중 '윤봉길 의사 거사 장면'과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등의 대목을 관객과 함께 부를 예정이다.

암살 위협에도 꿈쩍 않던 "백범은 호랑이 같은 분"
 

<백범 김구>를 창작판소리로 만든 임진택 명창 ⓒ 조호진

 
"제헌의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공화헌법을 제정하여 정부 수반을 선출할 제 대통령은 이승만이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포된다. 이때에 북에서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여 별도의 헌법을 채택하고 독자적인 국호를 정해 내각이 출범하니 수상은 김일성이라. 남과 북에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된즉 한반도는 폭풍 전야 정적처럼 동족상잔의 전쟁 위기가 고조된다.

그러한 동족상잔의 징후는 정부수립 전후 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 등 대규모 유혈사태가 잇달아 일어나며 점차 드러난 바, 이승만 정부는 김구를 여순사건의 배후로 몰아 공격하였고, 김구는 이를 일축하였것다. 이 무렵 세간에는 김구가 암살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김구는 '나는 왜놈이 나를 죽일 일은 했어도 동족에게 죽을 일은 하지 않아서'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더라." (임진택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중에서)


임진택(69) 명창은 이승만 정부의 암살 위협에도 "나는 동족에게 죽을 일은 하지 않았다"며 바위처럼 꿈쩍 않은 백범에 대해 "백범(白凡)의 '범'(凡)은 평범하다는 뜻이지만 내가 받은 백범에 대한 느낌은 평범이 아니라 비범으로 호랑이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백범 김구>를 판소리로 창작한 임진택 명창은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를 통해 선생님의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을 온 겨레 가슴속에 깊이 새기고, 선생님이 가신 그 발자국 따라 아름답고 힘찬 문화 상생의 길로 온 국민이 함께 손잡고 걸어갈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분열과 대치로 얼룩진 100주년... 부끄러운 마음으로 공연 준비
 

<백범 김구> 공연 중인 임진택 명창 ⓒ 임진택

 
국회 공연을 사흘 앞둔 19일 임진택 명창과 전화 등으로 인터뷰했다.

- <백범 김구> 국회 초청공연 소감은.
"2019년은 3.1혁명 100주년이자 임정 수립과 의정원 개원 100주년을 맞는 해이지만 가해자였던 일본은 여전히 사죄와 반성 없이 역사를 왜곡하며 모욕적 언행을 일삼고 있다. 분단된 우리는 한 민족끼리 여전히 사상과 이념을 놓고 분열하면서 대치하고 있다. 진정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역사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행해야 할지 부끄러운 마음으로 가슴을 저미면서 <백범 김구> 공연을 준비 중이다."

- 백범과 의정원은 어떤 관계인가.
"백범은 한때 의정원 의원이었다. 백범이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국무령과 주석을 역임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으나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이동녕 의장과 백범의 관계는 매우 각별하였다. 국회가 의정원 100주년을 기념해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 공연을 초청하는 이유이다."

- <백범 김구>는 어떻게 구성됐나.
"1부 '빼앗긴 나라', 2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3부 '갈라진 나라'로 구성됐다. 1·2부는 <백범일지>를 바탕으로 썼다. 백범의 글에 담긴 깊은 고뇌와 높은 향취를 다 담아내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3부는 백범의 생각과 행동, 연설문을 주축으로 썼으며 남북협상을 위한 북행 과정과 서거 당일의 긴박한 묘사는 수행비서 선우진의 회고록에 근거하여 썼다."

"백범이 걸어간 길은 중도(中道)가 아니라 정도(正道)였다"
 

<백범 김구> 공연 중인 임진택 명창 ⓒ 임진택

 
- <백범 김구>를 판소리로 창작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엔 좀 막막했다. 판소리는 풍자와 해학도 중요하지만 절규와 통곡 또한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심으로 절규하고 통곡하기 위해서는 백범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더불어 백범의 뜻과 생각에 내 자신을 일치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백범은 과연 내가 존경할만한 분인가?', '백범의 생각과 노선과 행동은 옳았는가?'라고 내 자신에게 계속해서 물었다.

나는 정치학도(1969년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입학)였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 관련 책들을 다시 살펴보았고 그 결과 백범은 가장 존경할만한 분이며 생각과 노선과 행동은 오늘날 내가 지향하는 생각과 노선에 가장 일치했다. 백범의 정치성향을 흔히 우익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분이 늘 좌우합작을 염두에 두고 계셨던 걸로 보아 그냥 우익이라기보다는 중도우파 정도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백범이 택한 길을 중도(中道)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백범이 앞서가신 길은 중도가 아니라 정도(正道)였다."

- 판소리로서 백범 이야기는.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어, 판소리 사설을 선생님이 다 써놓으셨네!'하는 느낌이었다. <백범일지>에는 역사성은 물론이고 문학성까지 담겨 있는데 그 수준이 벽초 홍명희 선생의 소설 <임꺽정>에 못지않다는 생각을 했다. 백범이 겪은 수많은 사건을 판소리로 다 담아내자면 10시간~20시간짜리가 될 것 같아 3시간 공연용으로 압축해 사설을 정리했다."

- <백범 김구> 공연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2010년 초연한 이래 모두 50여 차례 공연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다행히도 매우 좋았다. 판소리로 백범을 만나 즐겁다고, 감격스럽다고들 했다. 3시간이 넘는 대작이어서 나를 포함해 다른 명창들과 나누어 소리했다. 이번 국회 공연은 2시간으로 줄여서 1부와 3부는 내가 소리하고, 2부는 왕기철 명창이 맡았다. 창작판소리를 통해 백범 선생을 깊이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창작자이자 소리꾼으로서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 국회 공연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이번 국회 공연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문화국가론을 펼친 백범의 뜻이 우리의 얼과 삶이 숨 쉬는 판소리를 통해 실현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가난한 동포와 아이들에겐 자애로운 아버지였던 백범
 

백범 김구 ⓒ 백범기념관

 
- 임진택 명창에게 백범은 어떤 인물인가.
"내가 작심하고 추진한 창작판소리 12바탕은 역사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첫 작품이 <백범 김구>다. 백범 서거 60주년인 2009년 백범의 일생을 판소리에 담아내겠다는 생각을 가진 후, 경교장을 찾아가 2층 거실 남쪽 창문에 그대로 남아있는 60년 전의 흉탄 자국을 바라보고, 백범과 같은 황해도 출신으로 백범사상연구소를 만든 백기완 선생님으로부터 백범의 성정과 인품, 투혼과 기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와 함께 작고한 리영희 선생을 통해 백범의 일화를 알게 됐다. 해방 직후 테러가 횡행하던 살벌한 시기에 정관계 요인이 모인 만찬장에서 벌어진 일인데, 갑자기 정전이 되자 테러가 발생하는 줄 알고 모두들 피신하느라 상 밑에 숨는 등 아수라장이 됐는데 백범 혼자만 미동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일화를 들었다. 백범에게 범 같은 기상을 느낀 대목이었다."

- <백범 김구>에서 가슴 벅차고 목 메인 대목은
"백범은 호랑이 같은 기상만 가진 분이 아니다. 가난한 동포와 아이들에겐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그 대목을 <백범 김구>에서 이렇게 담았다."

"'그 해 겨울 백범은 서울시내 각처를 돌아보며 빈궁한 동포들에게 큰돈을 희사하였는데, 그 돈은 어머님 곽낙원 여사와 부인 최준례의 천장식과 아들 김신의 결혼식 때 들어온 부조금으로, 그 돈을 헐벗고 굶주린 전재민과 빈민들에 나누어 전달한 바, 그 중 금호동과 염리동에 전달된 돈으로 학교가 세워진즉, 금호동에 세운 것은 백범학원이라 이름 짓고 염리동에 세운 것은 창암학원이라 이름 지으니 백범 김구 어릴 적 이름이 바로 창암이로구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상놈이라 괄시받고 그렇게도 하고 싶던 공부 못한 것이 한이라.

헐벗고 굶주린 아해들아. 해방된 조국, 민국의 시대에 우리말과 우리글을 마음껏 배워보고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셈본도 하여보고 풍금소리에 맞추어서 노래도 불러보세. 까막눈 장님들 눈을 뜨고, 귀먹은 자 말귀 트이고 말 못하던 사람들도 말문이 확 뚫릴 터이니 모두들 모여 보세. 돈이 없어도 상관없고, 나이 좀 많아도 무방하고, 머리 좀 나빠도 괜찮 허니, 주저 말고 지체 말고 도망 말고 어서들 모여보세.' 뒤늦게 학교에 다니게 된 아해들이 열심히들 공부하니, 백범은 운동회에 참석하여 손수 상품을 수여하시고 아이들과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도 하셨더라.'
"

- 임정 100주년에 되새길 백범은.
"올해는 3.1혁명과 임정과 의정원이 모두 100주년 되는 해이다. 이때에 백범이 남긴 명문장 <나의 소원>을 되새겼으면 한다.

특히 1948년 4월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행한 연설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어디 있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가 존재할 수 있으리요. 현 단계 우리 민족의 유일 최대 과업은 통일 독립의 전취이며, 고로 우리의 공동한 투쟁 목표는 단선 단정의 분쇄인즉, 이는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있어서도 철저히 방지해야 할 것'이란 말씀을 되새기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의 길을 모색하길 백범이 바라실 것이다."
#백범 김구 #창작판소리 #임진택 명창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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