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전쟁... 인문계 고등학교의 슬픔

[주장] 학교선택제 시행 10년... 캐슬처럼 공고해진 고교서열

등록 2019.03.25 11:06수정 2019.03.2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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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학기 초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는 몸살을 앓는다. 성적이 최상위권에 있는 학생들이 자율 사립형 고등학교(이하 자사고)로 전학을 하기 때문이다. 2010년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를 고를 수 있는 학교선택제 시행 이후 매년 벌어지는 일이다. 수요자 중심이라는 시장의 논리가 교육계에 침투돼 빚은 현상이다. 그 결과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는 슬럼화가 진행돼 수업 자체가 힘든 지경이다. 교실 수업이 전쟁이라면 믿겠는가?

교과서가 없는 학생은 기본이고 수업 시간 교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수업 시간 핸드폰을 만지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오죽했으면 등교 시 핸드폰 소지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학교가 있었겠는가. 수업 중에 핸드폰 문제로 교사와 학생 간 갈등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학교 규정대로 핸드폰을 압수하려는 교사와 어떻게든 뺏기지 않으려는 학생 사이 신경전이 오가기도 한다. 

그 결과 교사들은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경우 생활지도가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은 여학교를 선호한다. 그다음이 남녀공학, 남자 인문계 고등학교 순이다. 여교사일 경우 더욱더 그러하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간 남자고교 담임을 맡은 한 여교사는 교실에 들어가는 게 두려워 학교에 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학교 폭력과 왕따 현상, 자해하는 학생들을 교사 개인이 사랑으로 품거나 통제하기엔 이미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담임 기피 현상은 20년 전 2000년대 들어 전국적인 양상으로 번졌다. 학교선택제 시행 이후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 학년 초 담임 배정 시 문과 남학생반을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어 한다. 그 절절한 심정을 이해한다. 나도 3학년 문과 남학생반을 담임했을 때 결석신고 철이 세 권을 넘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이 자유롭게 학교를 선택해서 진학한다는 것은 언뜻 보기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명분 아래 소외된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 현실은 절망적일 정도로 침체해 있다. 더구나 교사들의 사기는 크게 저하돼 있고 정신적 스트레스도 높은 게 현실이다. 학교선택제 시행 10년째인 올해도 그런 현상은 반복되고 있다. 

학교선택제는 부패 혐의로 구속된 공정택 전 교육감이 시행한 학교 시장화 정책 가운데 하나다. 이후 자사고가 확산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가 가파르게 슬럼화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교선택제 시행 이후 캐슬처럼 공고해진 '고교서열'
 

상가 건물 학원에 나붙은 서울대 합격자수 광고 서울대 및 대입합격자수 광고는 고교서열화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공교육 정상화를 방해하는 것으로 인권침해의 성격을 띤다. 더구나 학원이 아닌 사립학교 정문에 나붙은 대입합격자 현황 광고는 학교 스스로 교육기관임을 포기한 낯부끄러운 행위이다. ⓒ 하성환

 
서울지역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 신입생의 중학교 석차백분율은 평균 하위 60%를 넘어선 지 오래다.


5년 전 고1 담임을 할 때 받은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35명 가운데 인수분해가 불가능한 석차백분율 하위 80% 이상인 아이들이 20%에 달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서울지역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석차백분율 하위 80% 이상이 30% 정도로 더욱 악화하였다. 올해 서울지역 인문계 고등학교 신입생의 학급 인원이 25명~30명인데 이는 거의 1/3 수준에 달하는 수치다. 

10년 전 학교선택제 시행 첫해 강서구 소재 모 인문계 학교에서 경험한 일이다. 수학 교과의 경우 수준별 수업을 진행했지만, A반을 제외한 B반과 C반의 차이를 찾을 수 없었다. C반의 경우 '탁아방' 그 자체라고 일갈하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해당 수학교사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이 밖으로 돌아다니지 않게 돌보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며 고통을 호소한 적이 있다. 

석차백분율 상위 30% 이내에 포함된 아이들은 교사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비율이 아무리 크게 잡아도 오늘날 인문계 고교의 경우 17% 선에 머문다는 데 있다. 석차백분율 하위 50% 이상의 학생이 2/3에 달한 현실에서 인문계 고등학교의 고민은 깊어진다.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특목고, 자사고로 상당수 빠져나간다. 예전 실업계 고교인 특성화고 진학에 실패한 아이들이 함께 혼재한 일반 인문고교는 하늘과 땅만큼 성적이 극과 극이다. 그런 와중에 매년 학기 초 그나마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자사고에서 다시 빼간다. 양극화된 교육 모순을 극명하게 안고 있는 이런 현실에서 교육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런 교육은 도대체 무엇일까?

학력 미달인 아이들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일부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밤에 일찍 자고 아침에 지각하지 않도록 일어나는 습관부터 가르쳐야 한다. 기본 생활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니 가정통신문은 유명무실하다. 교실에 널려 있거나 가져가도 회수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온종일 엎드려 자는 아이도 적지 않다. 아이들이 고등수학을 이해하기는커녕 우리말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작금의 현실이다.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의 좌절, 누가 책임지나
 

수업시간 무기력하게 자는 학생들 자사고 등 고교서열화 정책은 차별과 경쟁교육 속에서 아이들에게 좌절과 열패감을 지속적으로 안겨주었다. 경쟁 속에 낙오된 아이들의 무기력한 모습과 상처투성이 낮은 자존감은 일반 인문계 고교의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 하성환


자는 아이들의 좌절과 고통,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고교 서열화의 주범인 자사고를 버려둬서는 안된다. 교육은 평등해야 하고 학교는 자기 성장을 맛보며 생활하는 행복한 공간이어야 한다.

오죽했으면 진보교육감이 대안교실과 희망교실 프로그램을 들고 나왔을까. 대안교실과 희망교실은 학교선택제 폐해로 무너진 인문계 고등학교 교실을 버티게 한 마지막 대안 프로그램이다. 

대안교실은 일탈 학생들을 특정 교사가 전담해 일반 교실과 분리하거나 학교 밖으로 데리고 나가 대안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제도다. 학교는 제과제빵, 요리, 음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해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끌어낸다.

반면 희망교실은 '관계 맺기'를 통해 상처받은 아이들을 돌보는 프로그램이다. 교사가 방과 후나 토요일에 시간을 내어 일탈 학생과 상처받은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관람하거나 산행 등을 해 아이들의 일탈을 막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교육 활동이다.

현재 대안교실과 희망교실은 고교 자유 학년제인 오디세이 학교처럼 성공작으로 꼽히고 있다. 올해도 서울시내 상당수 학교가 대안교실과 희망교실을 신청해 운영 중이다.

고통 속에서도 교사들은 여전히 아이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마지막 버팀목이 되고자 안간힘을 쓴다. 대안교실과 희망교실은 생활지도를 겸하고 아이들 학교적응도 돕기 때문에 일거양득의 효과를 가져온다. 실제로 오디세이 학교와 대안교실, 희망교실은 학교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막아내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자사고 폐지가 답이다
 

차별과 경쟁교육을 폐지하고 평등교육 실현을 주장하는 전교조 플래카드 자사고는 차별과 경쟁교육을 통해 고교서열화를 조장한 주범이자 공교육을 황폐화시킨 장본인이다. 하루빨리 자사고를 폐지하고 평등교육을 실현함으로써 공교육을 정상화 시켜야 한다. 고교서열화, 학벌주의라는 구조적 폭력 속에 고통 받는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서부터 교육개혁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핀란드 공교육 모델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 하성환


이렇듯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키려고 몸부림을 치는 한편에서 자사고는 성적 우수 학생을 빼가고 있다. 이런 행태는 당장 멈춰야 한다. 교실이 공동화된 현실에서 공부하는 아이가 오히려 소수자가 되는 이 기이한 현실에 자사고는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명문대 입시성적에 목을 매고 아이들 편입 숫자가 사립학교 재정에 보탬이 될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반교육적 행태다.

자사고의 성적 우수 학생 빼가기는 학벌주의의 공고한 외벽에 갇혀 슬럼화된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를 아사 상태의 극한으로 밀어 넣는 행위다. 고교서열화를 극복하고 인문계 고등학교를 근본적으로 회복시키는 지름길은 자사고 폐지다. 그 길만이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첫걸음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을 자랑하는 핀란드를 생각해 보자. 고등학교 아이들이 학교 가는 걸 행복해하는 나라, 나아가 교사들이 사회적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나라인 핀란드처럼 되고자 한다면 고교서열화의 주범인 자사고를 폐지하고 평등교육을 실현해야 한다. 같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교육자로서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볼 일이다.
#자사고 #학벌주의 #고교 서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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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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