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선생님께 보내는 편지

[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 5] 사람을 존재 자체로 인정하고 주목하자

등록 2019.03.21 11:30수정 2019.03.21 11:30
0
원고료로 응원
'김승일 시인의 학교詩끌'은, 학교가 폭력으로 시끌시끌하다는 뜻, 시(詩)로 학교를 끌어당기거나 끌어준다는 뜻, 결국에는 좋은 의미에서 학교가 시끌시끌했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이 글이 학교폭력 예방 문화를 만들어 나아가려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기자말

나는 매 학기 학교에서 일하는 교육 노동자다. 선생님들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그들에게 밉보여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강의 중에도 담당 선생님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내게 압력을 가한 분은 아직까지 없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교육 방식을 믿어주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국 교단에는 내가 학창시절 겪었던 선생님들처럼 아직도 폭력적인 분들이 많다. 한국 어느 학교에나 그런 선생님들이 꼭 한 분씩은 아직 계시는가보다. 그 덕분에 나는 지금도 학생들을 만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는 어른이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저버리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회까지는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꿋꿋이 해보려 한다.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2018년 7월, 부산의 한 고등학교 벽에 붙은 대자보 사진이 SNS로 퍼지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대자보 속에는 학생들에게 폭언과 성희롱을 수시로 일삼던 교사들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었다. 세상을 충격에 빠뜨린 대자보를 붙인 건 다름 아닌 8명의 소녀들. 학교의 방관적인 태도와 선생님들의 희롱을 참아냈던 아이들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선생님 인생을 망치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계속 피해를 받고 고통을 받아왔던 우리가 겪은 것들에 대해서 조금 관심을 가져주고 해결해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MBC 스페셜' 스쿨 미투, 소녀들이 목소리 낸 이유, <MBN star>, 2018년 12월 24일, 신미래 기자.

부산 K여고의 '스쿨 미투'는 요즘 학교의 단면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선생님들은 여학생들에게 성차별적이거나 모욕적인 발언(여자는 엉덩이가 빵빵해야 한다, 여자는 애 낳는 기계다, 너희가 X녀냐, 술집에서 일하는 여자 같다, 예쁜 여학생이 내 무릎에 앉으면 수행평가 만점을 주겠다, 남자는 공부 안 하면 막노동이라도 하지만 여자는 X촌 밖에 갈 데가 없다)을 했다. 괄호 안의 내용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퍼부어온 실제 폭언들이다. 학생들은 수없이 그 만행을 참아왔었던 것.

결국 이를 참지 못한 학생들은 자신의 양심을 걸고 이 불합리한 폭력을 세상에 드러내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그간의 이야기를 서로 모으고 조직해서 한 자 한 자 감추고 싶은 사실까지 낱낱이 꺼내야 하는 고통을 다시 한 번 감내해야 했다.


대개 이런 일들은 (피해자가 알아서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더 참혹한 자기 구원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K여고의 학생들은 어떤 불합리함이 아직 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의심을 옆구리의 총처럼 차고 다닐 것이다. 이제 학교라는 곳이 교육적인 성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다.

'학교'는 피 튀기는 사각의 '링' 보다도 험악한 곳

복싱 경기 중간 중간에는 누군가가 개입한다. 심판의 존재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규칙'을 깨지 말아야 한다는 엄중한 의식이 복싱 안에는 도사리고 있다. 사각의 링은 그것을 명확하게 시각화해준다. 이를테면 링 바깥에서 가해지는 공격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링에 기대어 있는 선수에게 주먹질이 허용될지언정,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선수를 계속 때리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가령 '학교'라는 사각의 링에서는 선생님이 심판의 역할을 맡아줄까?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그것이 힘들다고 생각한다. '학교폭력! 우리 학교 경찰관에게 신고하세요!' 같은 문구가 교실 안팎에 있다. 교권의 균열을 비집고 사법 체계가 자꾸 학교 안으로 들어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교육부는 지난해 학교폭력 담당 변호사를 늘리겠다는 발상을 내놓았다. 변호사가 많아지면 학교폭력이 줄어든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어떤 사건이든 무조건 학교폭력위원회로 떠넘겨버리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사소한 다툼 끝에 한 학생이 전학을 가야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가 하면, 실질적인 피해자가 돌연 가해자가 되어 법적인 책임을 져야하는 몰지각한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보지도 않았기에 학교는 무엇이 진짜 폭력인지도 모른다. 교권을 사법권에 쉽게 넘겨버리는 선생님들이 요즘 학교에 많다는 이야기다. 학교폭력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선생님들이 많아져야 하는 판국에 변호사가 많아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학교폭력을 근본적으로 줄이려는 의도가 아니라, 학교폭력으로 인한 분쟁을 조정하는 데만 급급한 것은 아닐까.

가령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고 체구도 큰데다 폭력적이라서 다루기가 점점 힘들어져요' 같은 말이 있다. 그렇다면 '네 마음은 어떤 것이니?'하고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다가가주는 선생님은 있는가? '선생님은 돈 버는 직원이지 이제 스승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야'라는 말이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서 번져나가고 있다. 이런 의식이 사회적인 통념이 된다는 것은 실로 무서운 일이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었던 때가 있었다. 그 말에는 심층적으로 존경의 의미가 녹아 있었고,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도 그러한 의미가 어렵지 않게 인정되곤 했다. 그런데 요즘의 스승들은 자신의 그림자가 바닥에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권위를 잘못 해석한 과거의 선생님 중 한 분은 내가 자신의 그림자를 실제로 밟았다는 이유로 나의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하기도 했다. 사실 너무 아파서, 나는 내가 서 있는 그곳이 교육기관이라는 사실을 살짝 잊었었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는 일이지만, 지금도 웃을 수 없는 일 중에 하나이다).

그런 것을 신경 쓰는 선생님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사무적인 선생님. 사무적인 말투. 제어가 안 되는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며칠 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여서 '응 이제 뭐가 잘못됐는지 말해 보자. 교사 지시 불이행 하면 다시 대안학교로 갈래?'라고 훈육하는 선생님의 태도 속에서, 앞으로의 학교 사회에 더 위급한 상황이 도래할 것 같은 불안을 나는 느낀다.

이런 심각한 현실을 묵인하는 자만 다음 챕터!
 
수학의 정석에 밑줄을 쫙쫙 긋는다
소년 소녀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뭘 하기 시작한다
새카맣게 밑줄을 계속 긋고 있을 때
나는 손을 빌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배운 이 징그러운 건 도대체 뭐냐
후딱 이해가 되는 놈들만 다음 챕터

김승일, '홍성대 著' 부분, <프로메테우스>
 
현재 학교에서 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90프로가 학폭위로 직행하는 방법을 택한다. 학생, 학부모, 선생님 들은 학폭위 이외의 방법을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성희롱적인 언행을 일삼는 남자 선생과 오랫동안 수업을 해왔어도 그것을 담임선생에게 털어놔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학생들은 갈피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바랄 수 있겠는가.

"학교폭력 따위야 뭐 어쩔 수 없지" 라고 묵인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입시를 위해서 꾸역꾸역 걸어가는 것이 요즘의 학교가 아닐까. 답답함과 한숨은 늘 썩은 물처럼 교실에 고여 있다. 정작 하고 싶은 질문을 할 수 없는 학교.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의문'은 다시 학생에게로 추적추적 돌아가 젖은 '우문'이 된다.

협소한 교실 안에서 학생들과 학생들, 선생님과 학생들은 잦은 스파크를 일으킨다. 거기서 일어나는 다양한 혐오들. 각자의 스타일로 써내려간 각각의 문장들은 다시 커다란 스파크를 만들어낸다. 각자의 머리 위에서 번개라도 칠 것 같은 그런 기후로 가득한 학교. 내가 느꼈던 답답함과 우울은 지금의 학생들이 느끼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내가 당한' 폭력적인 사건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물어볼 통로조차 없다면 학교는 머지않아 지옥이 될 것이다. 학교 벽 여기저기에 시무룩하게 걸려 있는 소원 수리함, 낙엽 같은 가정통신문, 이름만 거창한 학생부장 선생님, 잘못된 수업방식과 그 안에서 생겨나는 온당치 못한 폭력들, 성적과 비행과 장난이라는 괄호 안에 묶인 모든 체벌들, 아무 것도 품어주지 못할 것 같은 교무실과 과포화상태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한 학교에 단 하나뿐인 위클래스, 오로지 담배와 술, 비행청소년이라고 낙인찍힌 학생들만을 향한 계도, 학생들 사이에서 도대체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도무지 이해 못하는 선생님과 귀 기울이고 바라봐주지 않는 선생님들. 평소에 학교폭력에는 관심도 없다가,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학폭위부터 열어야 한다고 큰소리치는 일부의 학부모들.

그래서 학생들은 여기저기 뜯겨나간 상처들을 지닌 채 큰다. 그들은 몸 속 깊은 곳에 녹음되어 있는 폭력을 작디작은 방에서 혼자 반복해 들으며 성장한다. 한번 녹음되면 잘 지워지지 않는 소음들이 요즘 학생들의 신체에 내장되어 있다. 학교가 그냥 돈이나 버는 직장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절대로 아니다. K여고의 사례처럼, 깊이깊이 상처받은 흔적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게 시간이 지나간다고 지워지겠는가?

집중적으로 퍼붓는 '사랑'을 한 번은 경험해야 우리는 '인간'이 된다

학교 구성원들 간에 '정확한 공감'이 필요하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진실하게 말을 걸어주어야 한다. 성적인 농담은 삼가시라. 모멸감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여러 투박한 말들도 일찌감치 삼가시라. 그리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진심으로 하시라.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면, 진심으로 대한 날짜들을 모두 합치면 학생들의 눈동자에 희망이 되어 차오르는 녹음이 보인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일 학기 내내 엎드려만 있던 학생들이, 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며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반기고 좋아하는 것들이 자꾸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학생과 선생이 함께 알아가는 것. 냉철하게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따뜻한 것들로 가득 차려진 저녁 밥상 같은 말들이 교실에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 가운데 좋은 것들을 좋은 방법으로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님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중학교 수업 모습 수원 소재 중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인문 수업을 하는 모습이다. 나 스스로 학생들 가까이에서 소통하기를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늘 그것이 쉽지 않다. ⓒ 최면분

 
다행히 나는 그런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런 선생님이 계셨기에, 나는 따뜻한 '인간'이 된 것 같다. 아직 한 번도 그런 선생님을 만나보지 못한 어떤 학생을 위해서, 그 어떤 학생들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적어도 선생님의 가슴 안에는 있어야 한다. 폭력으로 찌그러져 있는 어긋난 문을 단번에 펼 수는 없다. 그러나 폭력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모든 선생님들의 손에는 이미 쥐어져 있다. (상처받은 치유자 wounded healer로서, 내가 분명하게 아는 한 가지 방법을 꼭 알려 드리고 싶어서) 최근에 읽었던 정혜신 치유자의 책(<당신이 옳다>) 속 문장들을 인용해본다.
 
사람을 존재 자체로 주목하고 인정하지 않는 공기는 미세먼지처럼 우리 사회 전체를 조용히 덮어버리는 중이다. ('사람'을 '학생'으로, '사회'를 '학교'로 바꾸어 읽어보세요)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그'를 '학생'으로 바꾸어 읽어보세요)

참혹함 속에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를 전부 잃은 사람도 그 '한 사람'을 만나면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세상과 사람 전체에 대한 신뢰를 회복한다. ('한 사람'을 '한 선생님'으로 바꾸어 읽어보세요)

'나' 이야기,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의 불씨가 지펴지면 희미하던 생명의 박동이 쿵쾅쿵쾅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와 '내'를 '학생'으로 바꾸어 읽어보세요)

심리적 CPR이란 결국 그의 '나'가 위치한 바로 그곳을 정확히 찾아서 그 위에 장대비처럼 '공감'을 퍼붓는 일이다. 사람을 구하는 힘의 근원은 '정확한 공감'이다. ('그'를 '학생'으로 바꾸어 읽어보세요)
      

시 치유 활동 학생들과 함께 시 치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학생들의 존재 가까이에서 진심으로 이야기를 하면 소통이 되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후 자신의 변화된 지점을 소감문으로 작성하곤 한다. ⓒ 김승일

 
'한 시인'이 이 땅의 '모든 선생님들'께 보내는 짧은 편지
 
쉬는 시간 종이 쳤지만, 여전히 바쁘시지만, 쉬는 시간에도 하실 일이 산더미지만, 그래도 거기에 좀 더 서 있어 주세요. 그리고 학생들을 좀 더 바라봐 주세요. (~하지 말라, ~해야 한다는 말보다) 선생님의 시선이 닿지 않는 어딘가, 할 말을 머금고 엎드려 있는 학생은 없는지, 한 번만 더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그 학생에게 천천히, 오래 오래, 다가가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이 땅의 모든 선생님! 늘 건강하세요.

2019년 신학기에 김승일 시인 올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월간 <세상사는 아름다운 이야기> 2019년 3월호에도 실은 글을 다듬은 것입니다.
#학교폭력 #소통공감 #학폭위 #선생님 #학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폭력이 없는 학교를 소망합니다. 제 첫 시집 『프로메테우스』를 학교에서 낭독합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피해학생들을 치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강의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