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로 떠난 시아버지·남편... 따라간 "여장부" 며느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대담 ④

등록 2019.03.24 14:59수정 2019.03.24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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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을 회고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는 김자동 회장님 ⓒ 박도

  
독립운동가의 가족

보청기를 낀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과 기자의 대담을 중간에서 도와주던 이일선 사무처장이 차를 내왔다. 자연히 차담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은 탓으로 한 사람 건너면 연줄이 닿는다고 한다. 나는 김 회장 집안과 어떤 연줄이 닿을까 관련 책을 정독하던 중, 마침 김 회장 아버지 김의한 지사가 중동학교를 수학했다는 기록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나의 까마득한 선배가 아닌가.

"아버님이 중동 출신이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졸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중동학교에는 본과, 보습과, 속성과, 야간 등 여러 반이 있었다. 그래서 학력 미달이나 연령 초과 등으로 정규 중등학교에 입학치 못한 많은 학생들이 이 학교를 많이 거쳐 갔다.

그래서 황해도에서 서당을 다니던 자칭 '인간국보' 양주동도, '한국 제일의 갑부' 경상도 의령 출신 이병철도 이 학교를 수학한 뒤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이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김 회장 할아버지 얘기에서 아버지·어머니 이야기로 옮아갔다. 

"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어머니는 한 등급 낮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독립운동에 기여하셨어요. 솔직히 말해서 어머니가 한 등급 더 높지요."

왕산가에서 석주가로 시집을 와서 두 가문의 피어린 독립투쟁사를 남긴 석주 이상룡 선생 손부 허은 지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지사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그리고 동농가의 상하이 생활을 남긴 정정화 지사의 <장강일기>를 읽어보면 독립운동가 반려자들의 가난과 신고(辛苦)가 더 컸음을 엿볼 수 있다.
 

유년시절 김자동 회장과 부모님(아버지 김의한 지사, 어머니 정정화 지사) ⓒ 김자동

   
 여성들의 희생
 
항상 손님은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점심을 준비하느라 어떤 때는 중국인에게 밀을 사다가 국수를 만들곤 하였다. 마당의 땡볕 아래서 맷돌을 돌려 가루를 내고, 또 그것을 반죽해서 국수를 뽑았다. 고명거리가 없으니 간장과 파만 넣어드렸다. 삼시 세끼 준비가 녹록치 않았다. - 허은 회고록 126쪽


어느 날 오정(정오) 쯤 해서 이을규씨 형제분, 백정기씨, 정화암씨 네 분이 내 집에 오셨다. 그날부터  밥을 같이먹으며 함께 고생하는데, '짜도미'라 하는 쌀은 사람이 먹는 곡식을 모두 한데 섞어서 파는 가장 하층민들이 사다 먹는 것으로, 그것도 수가 좋아야 먹게 되는지라, 사기가 힘들며, 그도 없으면 강냉이를 사다가 죽을 멀겋게 쑤어 그걸로 연명하니, 내 식구는 오히려 걱정이 안 되나 노인과 사랑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너무도 미안하여 죽을 쑤는 때면 상을 가지고 나갈 수가 없게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때가 여러 번이더라. - 이은숙 회고록 139쪽

부엌에 드나드는 아낙네의 처지는 또 달랐다. 무엇보다 먼저 불을 지피고 물을 끓이고 명색이나마 밥상에 올릴 식량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정한 직업이 없고, 땅뙈기 한 뼘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하이에서는 겉으로 떠벌이며 푸념하지 않을 뿐이지 속으로는 애간장을 녹이는 실정이었다. 이름, 명예, 자존,  긍지보다는 우선 급한 것은 생활이었다. 포도청 같은 목구멍이었다. - 정정화  회고록 56쪽
 
당시 시대 정서상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가족부양까지 책임졌기에 이중고를 겪었다. 그리하여 최근 대한민국 보훈처는 이러한 여성들의 희생을 재조명하고, 뒤늦게나마 독립유공자로 발굴해 서훈하고 있다. 김자동 회장에게 어머님은 어떻게 상하이로 가셨는지 물었다.

"1919년 4월 11일에 상하이임시정부가 세워진 것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그해 10월 10일 아들만 데리고 가족들에게는 아무 말씀도 남기지 않은 채 상하이로 망명하셨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에야 가족들은 신문을 보고서 두 분이 상하이로 가게 된 걸 아셨지요. 그러자 제 어머니는 시어머님에게 친정을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드린 뒤 친정아버님을 찾아 뵙고 상의를 드렸답니다."


김자동 회장의 어머님은 친정아버님에게 당신이 상하이로 가서 시아버님을 모시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정정화 지사의 아버님은 "네 시아버님이 여생을 편히 지내고자 상하이로 가신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는 여기와는 천양지차 다르다"라며 "생활이 힘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너를 막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섣불리 먹은 마음이 중도에서 유야무야될까봐 그것이 근심스러워 이르는 말이다"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친정아버님(김자동 회장의 외조부)은 정정화 지사에게 "시아버지에게 전해드리라"면서 독립자금으로 거금 800원을 주셨다.
 

충칭시절의 정정화 지사 ⓒ 김자동

  
민족의식이 강했던 여인

정정화 지사는 어떤 분이었을까.

"천성으로 겁이 없는 분이었어요. 부지런하시며, 두뇌가 명석하셨고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못지않게 민족의식이 강했으며 어떤 사명감이랄까 소명의식도 강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김 회장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1920년 정초, 경성에서 출발한 의주행 열차는 스무살의 겁 없는 여인을 싣고 북쪽으로 달렸다. 그는 동농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 지사. 친정아버지의 배려로 집안 오라버니 되는 정필화의 도움을 받았다.

의주까지는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런 여행증명서나 여권도 없는 정정화 지사로서는 압록강을 건너는 일은 대단히 위험했다. 다행히 정필화씨가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증명서를 용케 마련해 왔다.
 

당시 압록강 철교 ⓒ 눈빛출판사

  
정정화는 국경도시 단둥에서부터 봉천(현재 선양)을 거쳐 산해관, 천진, 남경을 경유하여 열흘이 지난 뒤 상하이에 닿았다. 상하이 도착한 후 무턱대고 조선사람 사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간 집은 바로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손 목사는 자초지종을 들은 다음 앞장서서 시아버지와 남편이 사는 곳으로 안내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보자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네가 어떻게 여길 왔느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저라도 아버님 뒷바라지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허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잘 왔다! 오너(느)라고 고생했다. 용기 있다. 너는 필시 여장부다."

동농은 세상에 있는 갖은 찬사의 말로 며느리를 거듭거듭 칭찬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도 놀라는 눈빛이었다. 그의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고 한다.

(* 다음 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학민사 발간 정정화 지음 <장강일기>를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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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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