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걸쳐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하니... 집안이 기울었다

”한 집안 근현대사 복원, 역사 재정립 작업과 같아“

등록 2019.03.25 17:30수정 2019.03.2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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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평 동학농민혁명천안유족회장. 박기평 회장이 자신이 찾아 모은 자료를 보여주며 조부들의 행적이 기록된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 노준희

 
동학농민혁명운동부터 대 이은 독립운동의 후예, 박기평 동학농민혁명천안유족회장 집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잡고자 대를 이어 몸과 마음을 다한 결말은 후손에게 물려준 가난과 뼈저린 집안의 역사였다. 박 회장의 고·증조부가 활동했던 시대 전체를 훑어보면 왜 우리 근현대사가 쉽게 풀어지지 않았는지 짐작이 간다. 그만큼 우리 근현대사엔 뒤틀리고 막히고 맺히는 굴곡진 역사가 태반이었다.

역사 안의 진실과 마주할 때마다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바꿔나가야 할 점이 무엇인지도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지 박기평 회장 집안 이야기를 통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3대를 이은 나라와 민족 위한 삶, 가난과 굴욕의 유산만 남아 

"고조부가 1894년 10월 21일 세성산 전투에 참여하셨어요. 그러나 그해 11월 9일 관군에게 붙잡혀 효수당하셨지요. 당시 동학교주 최제우의 신원회복운동에도 참여하셨고 40명이 올린 복합상소의 대표로 이름을 올릴 정도로 동학운동에 깊이 관여하셨어요. 증조부는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며 일제 강점기 진천군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진천 향토사에 기록이 남아있어요. 조부는 아우내만세운동을 했던 47 열사 중 한 분으로 순국자 추모각 안에 이름이 있고요. 또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 당한 후유증으로 제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3대가 넘는 집안이 우리나라 근현대 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며 참혹한 일제 강점기를 거쳤다는 이야기다.

그들의 후손, 박기평 동학농민혁명천안유족회장은 이렇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면 규모에 이르는 방대한 땅 모두 잃어 

박기평 회장의 조상은 충북 청원군(구) 일대에 살던 춘천 박씨 일가인데 일제강점기에 토벌을 당해 고조모의 고향인 지금의 천안 동면 일대에 터를 옮겨 살았다. 당시 동면, 병천면, 목천읍, 진천군은 지금처럼 행정구역이 나뉘기 전 모두 같은 생활 구역으로 주민들이 평화롭게 살아온 곳이었다.

박 회장이 수집한 기록과 증언에 따르면 한 지역의 면 정도 넓이에 해당하는 방대한 땅이 모두 박 회장 집안의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 박 회장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신분을 속여야만 동학운동과 독립운동이 유지될 수 있었다. 특히 숨어지내야 하기 때문에 자주 이름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땅이 많아서 박 회장의 조부들은 마음 놓고 자금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숨어다니느라 미처 정리하지 못한 땅을 다른 이름이나 다른 사람 이름으로 해두었더니 난리통에, 전쟁통에, 세월이 흐르는 사이 모두 흩어져버렸다.

박기평 회장은 까마득히 몰랐다. 자신의 집안에 그런 어마어마한 땅과 역사가 있었는지. 우연한 기회에 먼 친척으로부터 '오창과학단지 일대가 집안의 땅'이라는 소리를 듣고 난 후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하며 드디어 숨은 진실과 만나게 된 것이다.

한 번 뒤틀린 역사, 다시 꿰지 않으면 계속 뒤틀려 
 

박 회장이 모은 선대의 기록이 들어있는 자료들. 조각난 역사의 퍼즐은 꿰맞추기가 정말 쉽지 않다. 부서지고 망실된 자료들 사이에서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이 귀한 자료들을 귀하기 위해 12년을 찾아다녔다. ⓒ 노준희

 
"주변에서 '집안 어른들이 동학농민혁명운동에 참여했다, 독립운동하다 망했다'는 소리를 했을 때도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정말 집안 어른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니까 엄청난 이야기가 숨어있었어요. 그렇게 자료를 찾아다닌 지 벌써 12년이 흘렀네요. 단군 영정을 벽에 붙이고 사셨던 조부, 지금 기억해보면 의미 있는 행적이셨는데 어릴 땐 몰랐던 것이…. "

박기평 회장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동학과 독립운동에 몸 바친 조부들로 집안이 영예롭기는커녕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빴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목이 메었다. 아버지까지 일찍 작고해 어머니는 때때로 일주일씩 굶어가며, 그야말로 자식들 먹여 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집안 어른들의 자랑스러운 행적은 오히려 박씨 후손을 가난과 서러움의 한가운데 앉혀놓았다. 세월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 그 시대에서 100년이 지났음을 기념하는 2019년, 여기까지 왔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매우 많아요. 지금 갖게 된 자료도 찾아내기까지 무척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근현대사를 바로 알려줄 기록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박 회장은 "일일이 지적대장을 다 조사해 찾고 지역 향토사를 구석구석 뒤졌다"며 서류철을 한 묵직한 서류뭉치들을 보여주었다. 조부들의 행적을 찾으면 형광펜으로 표시해가며 집안의 역사를 꿰맞춰 나갔다. 심적인 확신은 있지만 아직도 증명해야 할 과정들이 많기에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이유도 있고요. 우리 할아버지들의 명예도 찾아야 하지요. 고·증조부 윗대의 산소를 아직도 찾지 못했어요. 600년 선대의 역사를 어느 순간 다 잃어버리고 집안이 기울었으니까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래도 꼭 찾을 겁니다."

우리 역사를 바로잡을 이는 바로 '우리', 다른 민족이 대신할 수 없어 

조부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애쓰던 박기평 회장은 최근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지인의 소개로 천안역사문화연구회 송길룡 연구실장을 알게 됐고 자료 조사에 더 힘을 받는 중이다.

송길룡 실장은 "1894년부터 1919년까지 박기평 회장 집안 어른들이 대 이어 참여했던 의로운 행적은 아이러니하게도 박씨 집안에 큰 피해를 주게 됐다. 박기평 회장 집안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비단, 박씨 집안 역사회복만이 아니다. 천안시 병천면 진천군 옥산면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를 발굴 복원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서는 충청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업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 송 실장은 "학술적으로 대다수 망실한 증거 속에서 문서 자료 입증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렵다고 포기할 순 없다. 동학과 3.1운동 관련 인물 연구는 실증적 차원과 또 그것을 넘어서 입체적인 접근방식으로 진행해야 한다"며 "마을 주민들의 구술 증언을 폭넓게 시도해야 하고 토지 관계 서류에 나온 이름이 정확히 누구인지 확인하는 작업, 조사작업 비용을 모두 개인이 부담했던 것 등 이런 것들이 지역사회 도움이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송길룡 실장은 "근현대사 복원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숨겨진 지역사회의 한 시대를 복원하는 것은 방치되거나 외면당한 역사를 복원하는 일입니다. 한 집안의 이야기로 끝나서는 안 돼요. 한 집안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한 지역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과 같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내용을 줄여 천안아산신문에도 실립니다.
#박기평 동학농민혁명천안유족회장 #동학운동후손 #천안동학운동 #천안독립운동후손 #3대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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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과 천안 아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소식 교육 문화 생활 소식 등을 전합니다. 지금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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