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넘은 종부의 마음을 닮은 '못난이 굴뚝'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30] 경북 예천 용문면마을① 대수(죽림)마을 옛집 굴뚝

등록 2019.03.31 18:30수정 2019.03.31 18:30
0
원고료로 응원
굴뚝은 독특한 우리 문화의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굴뚝은 오래된 마을의 가치와 문화, 집주인의 철학, 성품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 관계 속에 전화(轉化)되어 모양과 표정이 달라진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오래된 마을 옛집굴뚝을 찾아 모양과 표정에 함축되어 있는 철학과 이야기를 담아 연재하고자 한다... 기자 말

기억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네가 죽으면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 나도 죽어서
서른 해만 서른 해만 더 함께 살아볼거나


노회찬 의원이 고등학교 시절, 서정주의 시 <머리에 석남꽃을 꽂고>에 곡을 붙여 만들었다는 소연가 일부다. 서정주는 초간 권문해(1534-1591)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에 전해오는 석남꽃 전설이 이 시를 짓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했다. 석남꽃 설화는 애초 <수이전>에 수록되어 있었으나 유실되고 <대동운부군옥>에 유일하게 실려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비록 서정주시라는 징검돌이 있었지만 <대동운부군옥>이 없었다면 가슴 저미는 노회찬의 소연가는 우리 기억에 없었을지 모른다. 위대한 기록과 한평생 올곧게 살다간 사람이 만나, 나에게 단지 보물 몇 호로 기억되고 말았을 책이 되살아났다. 한사람의 위대한 기록이 흐려지는 나의 기억을 건드린 것이다. 소연가를 읊조리며 지금 초간 권문해를 만나러 가고 있다.

위대한 기록
  

대수마을 정경 대나무와 소나무 숲이 마을 뒤를 감싸고 앞에는 너른 들이 있다. 들을 휘돌아 내성천 지류인 금곡천이 흐른다. ⓒ 김정봉

 
<대동운부군옥>은 우리의 지리, 역사, 인물, 문학, 식물을 총망라해 기술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권문해 나이 56세(1589년)에 편찬 완료한 그의 '인생작'이다. 권문해는 예천권씨로 예천 용문면 죽림리 대수마을 출신이다. 대수는 대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권문해는 현풍곽씨와 30년 함께하다 자식 없이 사별하고 쉰이 넘어 함양박씨와 재혼하여 만득자(晩得子), 권별을 얻었다.

이 집안의 기록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대단하여 아버지와 아들, 대를 이어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과 <초간일기>를, 아들 죽소 권별은 <해동잡록>과 <죽소일기>를 저술하였다. 대소재 권현상은 대동운부군옥을 판각까지 했다. 국가정책사업으로 벌일 만한 일을 가업으로 해낸 대단한 열정이었다.
  

예천권씨초간종택 백승각(百承閣) <대동운부군옥> 목판 677매가 보관되어 있다. 이밖에 <초간일기>, <해동잡록>, <죽소일기>, 14대째 전해오는 옥피리가 이 안에 보관되어 있다. ⓒ 김정봉

 
"우리 선조(권문해와 권별)는 예, 주체적인 의식을 갖고 방언에 역사, 속명까지 우리 고유의 것을 그대로 기록했습니더. 실학의 밑거름이 됐다 카대요."


이 집안 사람이 별당 앞에서 나를 보자마자 꺼낸 첫마디였다. 이 집안의 학덕에 대한 자부심이 담긴 굵직한 말이었다.

예천권씨 종택 별당과 안채

예천권씨는 권문해의 할아버지 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권오행, 권오기, 권오복, 권오륜, 권오상 다섯 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집안을 빛냈다. 영광은 잠시뿐, 무오사화로 가문은 풍비박산 났다. 셋째 권오복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나머지 네 형제 모두 유배를 갔다. 이런 와중에 대가 끊기고 일부는 안동권씨로 성을 바꿔 생을 이어갔다.

권문해의 조부 권오상은 강진으로 유배 간 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대수마을에 지금의 별당을 짓고 은거, 대수의 입향조가 된다. 강진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울향나무가 대문을 대신해 서있다. 소나무, 대나무 숲이 반달모양으로 종택을 감쌌고 예천권씨초간종택 별당은 막돌로 쌓아올린 축대 위에서 집 앞 너른 들판을 향해 날개를 폈다.
  

예천권씨초간종택 별당 예천권씨 중심인물, 권문해의 조부가 지었다 한다. 집 앞 너른 들판을 향해 축대위에서 지붕 날개를 활짝 열었다. ⓒ 김정봉

   

예천권씨초간종택 안채 뒷동산 향해 기울어진 경사를 맞추느라 기단을 2층으로 쌓고 그 위에 안채를 들여 시각적으로 웅장해 뵌다. ⓒ 김정봉

 
별당의 편액은 대소재(大疎齋). 대동운부군옥을 판각한 권현상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대소재는 '매우 엉성한 집'이라는 뜻이다. 겸손의 마음이 담겼다. 눌재(訥齋)와 졸재(拙齋)와 같은 뜻이라. 가진 것 없이 허세를 떠는 사람을 꾸짖을 뿐, 연꽃 받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천장과 우아한 지붕을 보면 엉성한 집과 어울리지 않는다.

별당 남쪽에 있는 안채 벽체가 단단하다. 뒷동산 경사를 맞추느라 기단을 이층으로 쌓고 그 위에 안채를 들였다. 안채는 '풍채'가 좋아 보이지만 마당이 그리 너른 편은 아니어서 별당에 비해 소박한 편이다. 남쪽에 별당을 향해 있는 건물이 백승각이다. 대동운부군옥 목판과 초간일기, 죽소일기, 옥피리가 보관되어 있다.

예천권씨종택 안채의 '못난이' 굴뚝

가파른 안채 돌계단은 여든 넘은 종부의 발걸음을 잡는다. 돌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 오가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닐 텐데, 종부께 힘들지 않느냐, 물어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순간 괜히 물어본 거라 깨닫는다. 종부로서 지낸 세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종부의 모진 세월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렵다. 접빈과 봉제사는 기본이요, 시어머니 병수발에, 예천 3.1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시조부, 권석인(1898-1970)을 모셨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걸인에게 후하게 대접한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적선한 집안은 반드시 경사가 있다'라 했다. 마침 이 집안에 작은 경사가 있었다. 작년에 종부의 딸이 봉화 닭실마을 중재 권벌의 공식 종부가 되었다.
  

예천권씨초간종택 안채 굴뚝 덩치 큰 안채에 비하면 아주 박고 소박하게 생겼어도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 김정봉

 
작은 사랑채(안채 아랫방) 벽에 기대있는 아주 작은 굴뚝 하나가 눈에 밟혔다. 눈에 띌까 말까한 못난이 굴뚝이다. 집주인 말로, 아무래도 너무 작아 보여 굴뚝 몸에 항아리 하나 얹어 놓았다 한다. 중문채에 딸린 부엌 아궁이에서 군불을 때는지 연기가 스멀스멀 솟는다.

"굴뚝이 낮은데 연기가 잘 빠지나요?" 종부는 물음에 말대꾸 대신 눈짓으로 괜찮다고 한다. 굴뚝 연기는 천지신명께 집안의 안녕을 비는 소지(燒紙)마냥 꿈틀대며 처마를 훑고 하늘로 올라간다. 10여 년 전 셋째아들을 잃은 종부 마음을 헤아리다 보니 그리 보인 건지 모르겠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알아줄 거라 굳게 믿는 종부는 매일 치성으로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데 기특하게도 이 굴뚝은 종부의 뜻을 알아주는 듯하다. 연기를 잘도 뿜어내니 말이다.

초간정과 병암정의 되돈고래 굴뚝

입향한 지 500년이 넘다보니 예천권씨의 후손들의 흔적이 금곡천 따라 여기저기 남아 있다. 금곡천 상류에 초간정(草澗亭)이 안겼고 종택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병암정(屛巖亭)이 섰다. 금당실마을 남쪽 하금곡리 버들밭(柳田)에는 예천권씨 영사당종택이 있다. 초간 할아버지 오형제 중 맏이인 권오행의 둘째아들, 영사당 권우(1520-1593)가 지은 종택이다.
  

초간정원림 초간이 뜻하지 않게 낙향하게 되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대동운부군옥을 본격적으로 편찬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 김정봉

 
예천권씨의 정자(亭子) 점지 능력은 탁월하다. 초간정은 'S' 자로 크게 굽은 계류 곁 벼랑바위에 앉았다. 초간이 1582년 초가로 짓고 초간정사라 하였으나 불탔고 현재의 초간정은 1870년에 지은 것이다. 초목(草)과 계류(澗), 정자가 어우러져 영남 유일의 원림(園林)소리를 듣는다.
  

병암정 대수마을과 금당실, 버들밭(류전)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병풍바위위에 서있다. 주변 자연을 끌어들인 정자다. ⓒ 김정봉

 
병암정은 병풍바위 위에 섰다. 금당실과 대수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뵌다. 초간정은 자연 속에 푹 안긴 정자라면 병암정은 자연을 끌어들인 정자다. '학문을 하려면 초간정으로, 풍류를 즐기려면 병암정으로 갈지어다.' 얼핏 지어낸 말이지만 두 정자의 분위기는 그만큼 다르다.
  

초간정 굴뚝 아궁이와 굴뚝이 같은 곳에 있는 되돈고래 굴뚝이다. 불김을 최소화하고 협소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굴뚝이다. ⓒ 김정봉

   

병암정 굴뚝 초간정 굴뚝과 같은 되돈고래 굴뚝이다. 방이 동서로 나뉘어 굴뚝과 아궁이가 두 쌍이다. ⓒ 김정봉

 
초간정 굴뚝은 남쪽 기단에 숨었다. 아궁이와 굴뚝이 한 곳에 붙어 있어 흥미롭다. 아궁이에서 연기가 고래를 타고 간 다음 아궁이 쪽으로 다시 되돌아 나오는 되돈고래의 굴뚝이다. 병암정 굴뚝도 되돈고래 굴뚝이다.

되돈고래 굴뚝은 주로 정자에 많이 쓰이는 굴뚝으로 정자가 많은 안동문화권에 유행한 굴뚝 스타일이다. 영해 괴시마을 괴정과 원구마을 난고정, 영양 두들마을 석천서당, 봉화 황전마을 도암정 굴뚝 모두 되돈고래 굴뚝이다.

기록
  

예천권씨초간종택 안채굴뚝 연기 집안의 안녕을 비는 마음을 전하려는 듯 굴뚝연기는 안채 벽과 처마를 스멀스멀 기어올라 하늘에 닿는다. 소지를 태워 집안의 안녕을 비는 도신의 풍습이 사라지듯 재래식 굴뚝 연기는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 김정봉

 
어릴 적, 도신(禱神)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10월에 햅쌀로 시루떡을 해 놓고 소지(燒紙)를 태워 하늘 높이 올리며 집신(神)에게 집안의 안녕을 비는 풍속이다. 항아리에서 솟는 예천권씨초간종택의 굴뚝연기는 묘하게도 소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종부의 애틋함이 이입된 것도 있지만 둘 다 사라져갈 운명이라는 점 때문이다.

소지를 태우는 민속은 제주도에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도신은 육지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옛집 굴뚝에서 솟는 굴뚝연기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 소지와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원형이 훼손되고 변형되고 있다는 점에서 옛집 굴뚝도 마찬가지다.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이제라도 떨리는 마음으로 위대한 누군가가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되돈고래 굴뚝과 못난이 굴뚝에 대한 서투른 기록, 졸문(拙文) 하나 남긴다.
덧붙이는 글 예천권씨초간종택의 주요 문화재
<대동운부군옥> 보물878호/ <초간일기> 보물 879호/ 예천권씨초간종택 별당, 보물 457호
예천권씨초간종택, 국가민속문화재 201호
#대수마을 #예천권씨초간종택 #예천권씨초간종택별당 #대동운부군옥 #권문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