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약 한 첩 대신 좋은 신발 한 켤레를 택했다

하정우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걷는 사람'이 된 이유

등록 2019.04.04 11:38수정 2019.04.0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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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부터 웬만해선 자동차를 세워두고 걸어 다녔다. 지난해 가을 담배를 끊으면서부터는 아예 자동차 키를 던져버리고 마냥 걷기 시작했다. 회사가 멀지만 출근길에는 보통 서너 정류장 씩, 퇴근할 땐 대여섯 정류장씩 걷다가 버스를 탄다. 점심 후엔 후딱 숟가락 놓고 30분 정도 또 걷는다. 주말이면 2km쯤 걸어 동네 야산에 올라 2시간 남짓 산등성이를 타고 넘는다.


그런 식으로 하루 평균 2만 보쯤 걷는다. 거리로는 거의 14~5km쯤 된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이젠 걷지 않으면 허전함을 넘어 화가 난다. 모르긴 해도 '걷기 중독' 초기 증상이 아닌가 싶다.

'걷는 사람'이 되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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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표지 ⓒ 문학동네

 
영화배우 하정우도 걷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러닝머신으로 걷기를 시작해 소속사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하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되도록 이용하지 않으며, 동료와의 이야기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며 한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해서 걷는 게 하루 평균 3만 보.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서 땅끝 해남까지 577km를 걸은 적도 있고, 외국 갈 때 공항까지 걸은 적도 있다고 한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걷기에 대한 에세이집 <걷는 사람, 하정우>까지 펴냈으니 참 대단하다.

평소에도 그를 좋아했고, 그 역시 걷기를 좋아한다는 소식에 더 큰 호감을 느낀 건 맞지만 하정우를 따라하려고 걷기 시작한 건 아니다. 온전히 스스로의 자각과 결심에 의한 것이다. 서두에 걷기 시작한 시기를 못 박아 놓은 것도 그걸 강조하기 위함이다.

똑바로 서서 걷는 것은 인간만의 특권이다. 땅을 딛고 서면서 두 손은 자유로워졌고, 발바닥을 통해 올라오는 자극을 받아 두뇌는 한층 더 발달했다. 심심해진 두 손과 명석해진 두뇌가 결합해 새로운 무언가를 자꾸 만들어냈다. 그런 발명품들은 인간이 문명을 창조하는 기틀이 됐다. 눈부신 문명의 발달에 힘입어 인간은 마침내 지상의 다른 종을 모두 제압하고 만물의 영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게 오직 두 발로 서서 걸을 수 있는 능력 덕이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당대의 석학들이나 예술가들은 한결같이 걷기를 좋아했다. 걷기가 뇌에 자극을 주고 발달을 촉진한다는 사실이 영 근거 없는 추측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만들어낸 모든 발명품이 다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말이나 소 이래로 등장한 수많은 탈 것들을 발명했다. 그 덕에 인간은 이동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문명사를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비만, 관절염, 디스크 같은 신종 질병을 세상에 퍼뜨렸다. 걷기를 게을리 한 결과였다. 마사이족 사람 중 그런 질병에 시달린다는 보고가 아직 없다. 그들은 최근에도 물과 식량을 얻기 위해 하루 30여km를 걷는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걷기 부족이 신종 질병을 초래했다는 주장이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뒤집어 말하면 걷기만 해도 각종 현대병 정도는 너끈히 예방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걷기가 주는 횡재

육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걷기는 매유 유용하다. 우울증 치료나 스트레스 완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는 여러 번 있었다. 뇌를 자극해 치매에 걸릴 확률도 현저히 낮출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의 의학적 원리까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적 경험에 근거해보면 걷는 일은 정말 유쾌하다.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에 즐겁고 신난다.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 머리를 스치며 낮게 나는 새들, 땀방울을 식혀주는 바람결, 소풍가는 아이들, 다정해 보이는 연인 등.

이런 풍경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감이 흐뭇해진다. 자연히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지게 마련이다. 목표만큼 걷고 나서 밀려오는 피곤함마저 참으로 달콤하다.

걷기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하곤 한다. 가령 지나는 길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나 포스터 등이 그렇다. 거기엔 공연, 전시회, 강연회, 무료강습처럼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힘든 정보들이 가득하다.

근방에서 열리는 알짜배기 이벤트에 대한 정보는 생활 향유에 도움을 준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눈물의 폐업 세일' 같은 플래카드를 보고 찾아간 행사장에서는 천 원짜리 셔츠, 5천 원짜리 운동화도 살 수 있다.

길거리 음식은 기본이고, 가끔 누군가가 흘리고 간 동전을 줍는 횡재를 할 때도 있다. 힘겹게 폐지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를 도와 드릴 기회도 생기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동창을 만나기도 한다.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절대 알 수 없는 걷기의 은밀한 즐거움이다.

물론 느닷없이 새똥을 맞는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가의 토사물을 보고 기겁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게 있는 건 세상사 당연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그래도 해롭고 나쁜 것보다 즐겁고 재미난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은 분명하고도 확고한 사실이다.

지금이 걷기 딱 좋은 계절

그래서 나는 누구에게나 걸어볼 것을 권유한다. 단 약간의 준비와 주의사항은 필요하다. 신발은 구두 말고 운동화가 적당하다. 굽이 딱딱한 구두는 오히려 관절이나 허리, 뇌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마스크도 챙겨두면 좋겠다. 미세먼지나 황사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운동 삼아 걷는데 그게 다른 병의 원인이 돼서는 안 될 노릇 아닌가.

되도록 음악감상은 쉴 때만 했으면 한다. 헤드폰이나 이어폰을 끼고 걸으면 자동차가 접근하는 따위의 위급 상황을 제때 감지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다.

자세도 중요하다. 허리는 곧추 세우고, 시선은 늘 정면을 향하고 발은 되도록 뒷꿈치부터 땅에 닿게 하는 게 좋다. 마사이족처럼 말이다. 그래야 건강에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효험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걷는 코스는 되도록 이면도로나 골목길로 잡으면 좋다. 자동차 매연이나 소음을 피해 한적하게 상념에 잠길 수도 있고, 곳곳에 숨어있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만날 수도 있다.

봄이다. 지난겨울의 지독한 건기를 견디고, 참혹했던 미세먼지마저 이겨내고 노란 개나리를 앞세워 봄은 어김없이 찾아 왔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벚꽃도 고운 얼굴 활짝 드러낼 터이고, 제비도 날렵한 자태를 뽐내며 날아들 것이다.

봄은 그렇게 잠들었던 모든 것이 깨어나고 움트는 생명의 계절이다. 오래 헤어졌던 모든 것과 재회하는 설렘의 계절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걷기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그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내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어느 신발 가게 사장님의 말마따나 좋은 보약 한 첩보다 좋은 신발 한 켤레가 낫다. 가벼운 운동화신고 거리로 한번 나서보자. 하정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자 걸을수 있는만큼 걸어보자. 벌써 지천인 봄이 온몸으로 느껴질 것이다.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문학동네, 2018


#걷기 #하정우 #봄 #건강 #은밀한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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