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으로 가는 길목 국가비상사태 선포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62회] 박정희에게 대한민국 헌법은 한갓 장식품이었다

등록 2019.04.04 16:46수정 2019.04.04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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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박정희 ⓒ 동아일보

박정희에게 대한민국 헌법은 한갓 장식품이었다.

취임식 때에 '국헌준수'를 다짐했으나 국헌은 안중에 없었다. 국어사전은 "규모가 큰 소란(반란)이나 재해ㆍ적의 공격ㆍ민간 폭동ㆍ지진ㆍ화재 따위의 긴급을 요하는 사태"를 '비상사태'라고 풀이한다.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심각한 자연재난이 아니면 비상사태를 함부로 선포하지 않는다. 경찰력으로 어지간한 시위나 소요를 진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71년 12월 6일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면서 국가안보를 최우선시하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는 국민의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는 등 6개항의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대선 이후 계속되었던 학생시위는 대학에 대한 위수령 발동과 데모 주동학생의 가혹한 처벌로서 이미 학원사태가 수그러들었고,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정부의 강경책으로 크게 위축되고 있던 시점에서 나온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그야말로 '느닷없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와 국가안보회의의 공동제안으로 비상사태를 선언한다면서 "최근 중공(중국)의 유엔가입을 비롯한 국제정세의 급변과 이의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및 북괴의 남침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양상을 예의주시, 검토해 본 결과 현재 대한민국은 안전보장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는 것으로 단정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언하면서 밝힌 6개항의 특별조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정부의 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히 만전의 안보태세를 확립한다.
② 안보상 취약점이 될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지 않으며, 또 불안요소를 배제한다. 
③ 언론은 무책임한 안보논의를 삼가야 한다.
④ 모든 국민은 안보위주의 새 가치관을 확립하여야 한다.
⑤ 최악의 경우 우리가 가져야 할 자유의 일부도 유보해야 한다.

중국의 유엔가입은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올지언정 한국이 위협받을 소재는 아니었다. 엉뚱한 핑계를 댄 것이었다.

박정희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71년 12월 6일은, 그가 쿠데타로 집권한 지 10년 반이고,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힘겹게나마 김대중을 누르고 3선한 지 6개월 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아직 대통령 임기가 3년 이상 남은 시점이기도 했다. 

'비상'은 아니지만 '사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71년 5월 25일 실시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다. 야당인 신민당이 204의석 중 89석을 차지한 것이다. 그것도 서울을 비롯 대도시에서 의석을 석권하였다. 득표율도 공화당 52.26%이고 신민당 47.64%로 근접하여 야당은 개헌저지선 69석에서 20석을 더 확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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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의 '국가보위법 통과 안 되면 비장한 각오' 보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 법안이 만일 이번 회기 중에 통과되지 않는다면 이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서한을 국회의장에게 보냈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선포한 후 이를 합리화하고자 공화당의 구태회 의원 외 110명의 소속의원 이름으로 "국가안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사회의 안녕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한다는 명분으로 국회에 제안하여 국가보위법을 12월 27일 변칙처리했다. '국가보위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② 경제규제를 명령하고 국가동원령을 선포하며
③ 옥외집회나 시위를 규제하고
④ 언론ㆍ출판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하며
⑤ 특정한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하며
⑥ 군사상 목적을 위해 세출예산을 조정할 수 있도록 했다.

자유민주체제를 유지하는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강권전제체제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것도 국민여론의 수렴이나 여야의 토론과정도 없이 국회에서 일방적으로 처리한 내용이었다.

더욱이 중국이 유엔에 가입한 것을 국가위기로 위장하는 등 안보상의 논리비약을 비롯, 시위ㆍ집회를 규제하고, 노동3권도 제약을 받게 하였으며, 특히 언론ㆍ출판에까지 특별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그야말로 군정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했다.

70년에 들어 대통령선거와 총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사회분위기가 크게 완화되었다. 5ㆍ16군사쿠데타 이래 억눌려 있던 국민의 인권의식이 크게 신장되고 이에 따라 언론도 비교적 자율성을 찾게 되는 등 어느 때보다 사회적 분위기가 활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학생들도 공명선거감시단으로 선거에 참가하는가 하면 지식인들도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터진 것이 71년 여름의 의료파동에서 시작하여 사법파동, 광주대단지사건, 월미도사건, 한진기술자 KAL빌딩사건, 조세저항사건 등이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ㆍ사태는 사법파동과 광주대단지ㆍ월미도사건이다.

4ㆍ27대통령선거 때부터 공명선거를 요구하며 박정희 정권 비판에 앞장서 온 대학생들은 교련교육 반대라는 새로운 이슈를 내걸고, 5ㆍ25총선거를 전후하여 더욱 강력하게 부정부패 척결과 국정개혁을 요구했다. 학생들은 한일굴욕회담 반대투쟁이 절정을 이루었던 6ㆍ3사태 이후 가장 강력한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강력한 야당의 등장과 함께 각종 사태, 여기에다 집권당의 항명파동까지 겹치고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자 박대통령은 정권의 안위를 걱정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71년 10월 15일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대국민 설득이나 정책전환 등이 아닌 강경일변도였다.  

박대통령의 특별지시가 내려지자 양택식 서울특별시장은 즉각 군당국에 병력출동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군당국은 수도경비사령부와 공수특전단 및 경찰병력을 서울시내의 6개 대학에 진주시켰다.

군이 진주한 대학은 서울대의 문리대와 법대ㆍ고대ㆍ연대ㆍ성대ㆍ경희대ㆍ서강대ㆍ외대 등이었다. 잘 짜여진 각본대로였다.

대학에 위수령 발동과 동시에 서울상대ㆍ전남대 등에 무기한의 휴업령을 내리고, 중앙대ㆍ국민대ㆍ건국대ㆍ한신대ㆍ숙대ㆍ이대 등은 자체 휴강에 들어가 서울의 대학가는 거의 문을 닫게 되었다.

대학은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을 데모 주동자로 제적했다. 학생들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은 제적을 거침없이 단행하고 이미 어용화된 대학총장ㆍ교수들은 군말없이 따랐다.

초헌법상의 비상대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특별조치법을 유신으로 가는 징검다리의 역할로 삼았다. 신민당은 72년 6월 5일부터 4일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한 후 "비상사태를 철회하라", "국가보위법은 무효다" 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광화문 국회의사당에서 중앙청 정문까지 가두데모를 벌였다. 시위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14명의 의원이 연행되기도 했다. 특히 김홍일 대표위원은 국회에서 4일간 단식을 하면서 보위법의 철회를 촉구했다.

그러나 국가보위법 날치기와 비상사태 선언은 유신의 전단계 조처로써 예정된 코스대로 진행되었다. 뒷날 박정희가 암살된 궁정동 안가에서는 어용학자, 권력에 눈이 먼 검사 등이 모여 '유신'의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가보위법 #박정희_국헌문란 #국가비상사태 #유신 #위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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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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