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 같은 셋방에 남은 아이들, 지금은 없을까

[서평] 정세훈 시인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

등록 2019.04.07 19:15수정 2019.04.0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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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 ⓒ 푸른사상사

 
세 명의 손자를 둔 정세훈(64) 시인이 동시집 <공단 마을 아이들>(푸른사상)을 펴냈습니다. 지난해 인천영선초등학교 4학년 5반이었던(담임 김명남 시인) 어린이 26명이 그린 그림은 삽화가 됐습니다. 할아버지 시인의 시와 손자뻘인 어린이 삽화 작가가 만든 소박한 동시집입니다. 정 시인은 지난 2000년 <꼬마송사리 큰눈이>라는 제목의 장편동화를 펴낸 동화작가이기도 합니다.

56편의 동시에는 공단 마을 아이들의 슬픔과 기쁨이 오롯이 담겼습니다. 집이 없어서 이사 다니는 슬픔, 직업병에 걸린 아빠의 슬픔, 월급 못 받은 슬픔을 어린이라고 해서 몰라야 할까요.

공단 마을 아이들에겐 한 달에 한 번 통닭 먹는 기쁨, 하루 일당을 포기한 엄마 아빠와 어린이대공원에 놀러가는 기쁨, 단칸방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기쁨, 집은 없지만 엄마 아빠가 있어 부자라는 아이들. 기쁨은 부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공단 마을엔 가난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는 미사여구로 치장한 시는 거짓 시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를 희롱하고 감정을 속이는 시가 난무하는 것은 거짓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꾸며낸 시가 동시인가요. 아이들의 마음까지 분칠하는 시가 동시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공단 마을 아이들의 슬픔과 기쁨을 오롯이 노래한 정 시인의 동시는 진실한 동시입니다. 도회지 땅값이 천정부지로 솟으면서 공단이 헐리고, 마을이 헐리고, 가난이 헐린 시대에 공단 마을 아이들의 노래를 누가 얼마나 들어줄까, 그건 걱정입니다. 정 시인은 동시집을 펴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곳곳에 대규모 공단이 조성됐고 그 주변에 공단 마을이 급히 조성되었습니다. 땅 주인들은 방 한 칸에 부엌 하나의 공간을 10여 세대씩 2층으로 벌집처럼 지어 올려 세를 놓았습니다. 그 벌집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이제 50대를 바라보는 중년 어른이 되었습니다.

공단 마을 어린이들 정서를 담은 동시집이 한 권도 출간되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동시 전문 시인은 아니지만 공단 마을 아이들에 대한 동시집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우리 문학사는 물론 역사적 관점에서 반드시 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입니다."


공단 마을 어린이들의 기쁨과 슬픔
 

인천 영선초 4학년 김기태 소년의 그림 ⓒ 김기태

 
달력에
빨갛게 색칠해 놓았다

이십오일 날짜에
동그랗게 칠해 놓고

"통닭 먹는 날"이라고
크게 써 놓았다

아빠 월급날은
아직도 이십 일이나 남았다
  

(정세훈 시인의 동시 '통닭 먹는 날' 전문)
 
가난한 노동자의 아이들은 '치킨'이 아닌 '통닭'을 먹고 자랐습니다. 맛있는 통닭을 날마다 먹고 싶었지만 아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아빠의 가난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먹었습니다. 주문하면 총알 오토바이를 타고 부르릉 달려와 "치킨 왔습니다!" 하고 콜라를 서비스로 주는 배달 치킨이 아니라 누런 봉투와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통닭을 먹었습니다. 아빠는 월급을 타면 시장에서 통닭을 사왔습니다. 가족들은 통닭이 맛있다며 좋아했지만 그 통닭은 아빠의 기름땀이었습니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연장 작업, 휴일 특근작업, 36시간 교대작업,
공장생활의 고단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아프지만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이 오고갔다

"아프지만"이란 소식에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정세훈 시인의 '부평 4공단 여공' 일부)
 
노동자와 노동자가 결혼했습니다. 아내는 여성이 아니라 노동자입니다. 아이들에겐 엄마가 아니라 노동자입니다. 모정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남편 외벌이로는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기에 허리가 휘도록 일했습니다. 이 고통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해주지 않으려고 맞벌이 노동을 했습니다. 흩어졌던 온 가족이 좁은 단칸방에서 함께 자는 것이 꿈만 같은 아이들, 엄마 손을 잡고, 아빠 팔베개 하며 자는 게 꿈만 같다는 아이들, 이 아이들도 한국의 아이들입니다.
 
좁디좁은 단칸방이지만
모처럼
모두 함께 자니
꿈만 같다.

엄마 손을 잡고
아빠 팔베개를 하고
잘 수 있어
꿈만 같다.

밤 근무하던 아빠가 낮 근무하는 날.

(정세훈 시인의 동시 '꿈만 같다' 전문)
 
아빠 엄마가 일하러 가면서 아이들을 벌집 같은 셋방에 두고 갑니다. 저녁 늦게 오기 때문에 단팥빵과 물병, 요강을 두고 갑니다. 문을 열어두면 아이들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 방문을 잠가 놓고 갑니다. 아이들은 고물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배고프면 단팥빵을 먹습니다.

"누나, 엄마는 언제 와?" 동생이 칭얼댑니다. 창밖이 어두워졌는데도 엄마 아빠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잔업에 묶인 것입니다. 엄마를 찾던 동생도 잠들고 어린누이도 잠들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불이 나지 않은 것입니다.
 

인천 영선초 4학년 성현아의 그림 ⓒ 성현아

 
공장으로 일 나가는 엄마 아빠
서너 살배기 우리를
단칸 셋방에 홀로 두고 가면

골목길을 하루 종일 헤매다가
고만고만하게 생긴
벌집 같은 셋방

끝내 찾아오지 못할까 봐
밖에서
방문을 잠가 놓고 가면

배고프면 먹고 마시고
심심하면 갖고 놀고
오줌똥 마려우면 누라고

단팥빵 한 개 물병 하나
장난감 몇 개 요강 하나
놓아 주고 가면

어느 날은
방바닥에다
오줌똥을 싸 놓고

어느 날은
울다가 울다가
잠들었어요

(정세훈 시인의 동시 '공단 마을 아이들' 전문)

가난이 끝났다고 말해선 안 된다 
 

1990년 3월 발생한 어린남매 화재 사망 사건 기사 ⓒ 동아일보

 
1990년 3월 어린남매 화재 사망 사건을 노래로 만든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을 나는 끝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서 미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남매의 아버지 권씨가 바로 조씨인 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연기에 질식해 숨진 다섯 살 혜영이와 네 살 영철이가 내 아이들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은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권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이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 둔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이씨가 달려와 문을 열었을 때, 다섯 살 혜영양은 방 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군은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정태춘 작사·작곡 <우리들의 죽음> 중 일부)


가난이 끝났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맞벌이의 고통도 그대로이고 지하 셋방도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식구가 흩어지고 가정이 깨진 것입니다. 혜영이와 영철이가 가난에 질식하기 싫다면서 집 밖으로 탈출하고 있지만 빈곤의 그물망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아이들 중 더러는 부천역 거리를 떠돌다 죄를 짓고 소년원에 가기도 하기도 합니다. 삥 뜯은 아이는 붙잡혔지만 가난을 착취한 자들은 뻥뻥 뚫린 그물망을 비웃습니다. '우리들의 죽음'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공단 마을은 헐렸지만 가난은 그대로입니다.

공단 마을 아이들

정세훈 지음,
푸른사상,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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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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