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 통역' 빠진 재난방송, 방송사만의 잘못인가?

[주장] 재난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정부, '수어대변인' 제도 도입 적극 검토해야

등록 2019.04.08 15:59수정 2019.04.08 16:01
0
원고료로 응원

수어 통역을 지원한 지상파 방송사는 한 곳도 없었다. 지상파 재난속보에 수어통역을 지원해달라는 거듭된 요청에 지상파 3사는 5일 오전이 되어서야 수어방송을 시작했다. ⓒ KBS


지난 4일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산불과 관련해 방송사들의 재난 보도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재난 속보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그 내용 또한 단순 상황중계 수준에 그쳐 실질적인 재난 대응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해 정정하는 일이 되풀이됐습니다. 

무엇보다 장애인 단체 등에서 줄곧 요청해온 수어 통역을 포함한 재난방송은 이번에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국가재난주관 방송국인 KBS에서조차 수어 통역 방송을 하지 않으면서 청각 장애인들은 사실상 재난 정보로부터 사각지대에 놓였습니다. 

화재가 발생한 4일, 수어 통역을 지원한 방송사는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재난속보에 수어 통역을 지원해달라는 장애인 단체의 거듭된 요청에 지상파 3사는 5일 오전이 되어서야 수어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 대부분 언론사는 '화면을 가리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방송사들이 생각하는, 이른바 '그림'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그림'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24시간 대기시켜야 할 검증된 수어 통역사를 유지할 비용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상파의 위상이 예전만 못한 현실을 고려하면 개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방송사에만 묻기는 어렵습니다. 일반 국민이나 청각장애인들로서는 재난방송 시 수어 통역을 제공하는 것이 당연한 듯 인식되지만, 현실적으로 방송사가 재난방송에서 즉시 수어 통역을 제공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정부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재난정보 수어 통역 제공을 방송사에만 기대는 것은 정부의 올바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정보 제공의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급박한 재난 정보를 제공할 때만이라도 정부 차원의 수어 통역을 제공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과 달리 재난 대응 선진국이라 불리는 일본은 재난정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정부 브리핑에서 수어 통역사가 배석하여 자체 수어 통역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한발 더 나아가 재난 관련 브리핑 시 발표자와 수어 통역사가 함께 서서 말과 수어로 관련 내용을 동시에 전달합니다. 미연방재난관리청(FEMA)은 평소에도 재난, 안전 정보를 수어 통역 콘텐츠로 생성하여 유튜브와 SNS 등을 통해 지속해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재난정보 제공시 수어통역 미국의 경우 재난정보 제공시 발표자와 수어통역사가 함께 위치하여 동시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워싱턴포스트, 폭스뉴스, FEMA


정부 발표를 정부 소속의 수어 통역사가 전달하지 않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재난 관련 정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왜 정보제공자인 정부가 아닌 정보전달자인 방송사가 수어 통역을 해야 하는가?'에 의문이 생기는 이유입니다.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국민의 기본권 보장 차원이나 한국수화언어법 등 현행법의 준수 차원에서라도 정부 차원의 수어 통역 제공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수어 통역이라는 의미나 역할을 넘어, 수어를 통해 소통하고 정보 제공을 위해 정부 부처가 적극적으로 '수어 대변인' 제도 도입을 고려한다면 더구나 의미 있을 것입니다. 

현 정부조직 체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각 부처에 '대변인'을 두어 전반적인 소통 업무를 담당케 하고 있습니다. 온라인을 통한 소통이 중요해진 이후에는 '온라인 대변인'직을 신설하였고, 조직체계 상 별도의 대변인을 두기 어려운 재난 대응 기구에는 '위기소통담당관'을 두고 있습니다. 정부 의지가 있다면 '수어 대변인' 제도 또한 충분히 실현 가능할 것입니다. 

재난 발생 시 재난 관련 정보를 청각장애인들이 일반인과 동시에 수어를 통해 전달받을 수 있는 체계가 된다면 지상파 등 기성 언론사의 기능이 축소되고, 온라인을 통한 정보전달이 활발한, 현실에 더 적합하고 효용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기존에 방송사 단위에서 수어 통역을 제공할 때와 달리 정부가 관련 정보를 제공할 때부터 수어 통역을 한다면 별도의 수어 통역을 추가하거나 편집 작업 없이 촬영화면 그대로 제공·확산할 수 있습니다. 청각장애인들에게 그만큼 정보전달을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어 대변인'이 함께 재난정보를 발표할 경우 방송사들이 '그림'이 안돼서 수어 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부처에 일시에 '수어 대변인' 제도를 도입하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중앙안전대책본부를 운영하는 행정안전부, 소방청, 경찰청 등 정부의 재난, 안전과 직접 관련된 부처들부터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이번 계기로 정부 재난, 안전관리 부처의 '수어 대변인' 제도가 도입돼 활성화되고 재난정보 제공 시 수어 통역이 제공되어 청각장애인들의 생존권 보장 수준이 한층 강화되길 바랍니다.
#재난방송 #수어통역 #수어대변인 #수화 #수어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사회와 관련된 다양한 글을 기고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