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문제'의 서막, 한미수호조약

민주공화정 100년,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반도 ②

등록 2019.04.08 11:08수정 2019.04.08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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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페리 제독이 함포를 동원해 일본을 강제개항하면서 동아시아 고립 시대가 막을 내렸다. 서세동점 시대가 개막했다. 한반도가 서구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의 일로 여겨졌다.

'한반도문제(Korean Question)'란 19세기 말, 동아시아와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 사이의 치열한 세력쟁탈전 속에서 발생한 말이다. 이 용어는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발칸사태를 지칭하는 '동유럽문제(Eastern Question)'에 비견될 정도로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주변의 복잡다단한 국제정치적 상황을 의미한다. 이 용어의 다른 측면은 주변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안보와 생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상황은 지금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조선은 서양국가들 가운데 미국과 가장 먼저 수교를 맺었다. 슈펠트 제독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올 때만 해도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곡절 많은 곳일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미국은 폭풍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조선과 국교를 수립할 수 있었을까? 배후에는 청나라가 있었다.

사건의 시작은 <조선책략>이었다. 이 책의 주요내용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팽창을 막기 위한 청나라와 조선의 공동 외교전략으로 '친청·결일·연미책'을 제시했다. 여기서 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글 내용보다 형식이다. 거기에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특수 관계를 암시하는 독특한 외교적 의례, 곧 사대의 프로토콜이 숨겨져 있었다.

<조선책략>은 황준헌이라는 주일 청나라 공사관 소속의 일개 외교관이 쓴 글이지만 그것의 외교문법은 황제가 제후나 속국의 왕에게 내리는 칙서 형식을 띠었다. 일례로 중국황제가 제후에게나 사용하던 주청(奏請), 배신(陪臣)과 같은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 책을 받아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은 청나라 주일공사였던 하여장과 대화를 나누면서 본명을 쓰지 못하고 김굉집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유인 즉, 청나라 황제 이름이 '홍력(弘曆)'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 이름에서 가운데 글자만 바꿔 김굉집으로 했다. 이 모든 에피소드의 핵심은 조선의 종주권이 청나라에게 있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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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이홍장. ⓒ 퍼블릭 도메인

 <조선책략>은 청나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이홍장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했다. 이홍장은 <조선책략>을 통해서 고종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국제정치 사실을 일러줬다. 하나는 세계정치의 대세는 바야흐로 서양의 만국공법, 곧 국제법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홍장이 이해한 만국공법의 내용은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제창한 레알 폴리티크, 곧 힘에 기반한 현실주의에 주로 의존했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대국의 힘을 나타내며,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이 세계평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도 만국공법이 적용되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조선과 청나라는 사대교린 및 조공체계에 입각한 특수 관계다. 조선과 같은 소국은 청나라와 같은 대국의 보호 없이는 정글과 같은 국제체계에서 생존할 수 없다. 이홍장의 권유와 주선에 따라 국교수립을 위한 미국과의 교섭에 들어갔는데, 사대교린 문법에 따라 수교 협상을 청나라가 맡게 됐다.

이홍장이 남의 나라 조약교섭을 적극 주선하고 나선 데에는 미국과 영국, 독일 등을 한반도로 끌어들여 러시아와 일본의 한반도 침투, 궁극적으로 중국으로의 침투를 막아보려는 게 주목적이었다. 한마디로, '이이제이(以夷制夷)'가 목표였다. 조선이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고, 청나라 또한 혼자 힘만으로는 조선을 지켜줄 여력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그들이 고안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곤 '이이제이' 외에 달리 뾰쪽한 수가 없었다. 이홍장은 1879년 조선 고위관리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자신의 '이이제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문을 걸어 잠그고 조용하게 있는 것이 어려운 문제를 피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 오호라, 동양이 처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일본의 팽창주의 움직임을 저지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귀국의 조정 또한 그들과 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강제에 의해 새로운 시대를 열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작금의 사태를 보건대, 하나의 독으로 다른 독을 중화시키고 하나의 힘으로 다른 힘을 대항케 함이 우리에게 최선의 방책이 아니겠습니까?" - (H. Kissinger. 2012. <중국 이야기>. 민음사, 112-113쪽).
 

조약체결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미국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사대교린 질서라는 조선과 청나라의 특수 관계에 대해 별도의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종의 위임에 의해서 교섭전권을 행사하게 된 이홍장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인정을 조약 첫 항에 넣을 것을 슈펠트에게 요구했다. 미국은 당연히 거부했다. 종속국과는 국가 대 국가의 조약을 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종주권 문제로 조약 교섭은 1년씩이나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다가 고종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별도의 각서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로써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역사적인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됐다.

한미조약 체결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권을 국제법 체계를 빌려 확보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전의 사대교린에 입각한 조공관계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선과의 주종관계를 확립하려던 시도였다. 요컨대, 국제법 체계를 빌려서 조선을 청나라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내비친 것이다.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보호국 시도가 미국과의 조약체결 과정에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영국의 경우,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대국이 소국을 보호하는 것은 작금의 국제정치 현실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래서 서울주재 주영공사관을 북경주재 주영공사관의 분소쯤으로 간주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청나라의 종주권 인정 요구를 거부했다.

비록 한정된 범위에서이긴 하지만 조선 관리들의 학습능력이 대단히 빨랐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청나라가 한미조약 세부사항 논의에 들어가자, 고종은 경리사 신헌 일행을 청나라 협상단에 파견하여 조선정부가 미곡 유출을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조약에 포함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청나라의 종주권 주장에 대해서도 수교협상이 진행되면서 조선 관리들의 태도 역시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의 종주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공개적 인정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조약 타결 직전에는 종주권 문제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엔씨엔디' 전술이라 할 만한 것을 채택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그 후에 미봉책에 급급했다. 국제관계에서의 빠른 학습과정이 예나 지금이나 외세의존적인 정치적 리더십, 전략적 비전의 부재, 국가차원의 제도개선과 자강개혁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은 큰 한계로 남는다.

한미조약 체결 당시, 미국이 조선에 가졌던 이해관계는 미국이 중국, 일본 등과 조약을 체결했던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 국무부는 조약체결을 통해 조난당한 미국선원의 구조나 미국 선박에 대한 중간 연료보급기지만 확보해도 크게 성공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미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한미수호조약은 미국이 이전에 중국이나 일본과 맺었던 조약과 대등하거나 조선의 입장에서 우호적인 내용을 포함했다. 조선이 다른 나라의 외교적, 군사적 분쟁에 휘말릴 경우, 미국이 '외교적 중재'에 나선다는 '거중조정(Good office)'과 같은 중재조항이 대표적이다.

한미조약에는 조선이 일본 및 서구 열강과 맺는 조약과 비교해보았을 때, 조선에 유리한 조항이 포함됐다. 대표적으로 관세 조항이다. 일본은 1876년 체결한 한일통상조약에서 자국 수출품에 무관세를 적용했다. 강도나 다름없는 조치였다. 이에 비해서 한미수호조약은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서, 생필품은 10%, 사치품과 기호품은 30%, 그리고 토산품은 5% 관세를 적용했다. 조선의 전략품목인 쌀의 경우에도 한일조약은 무제한의 대일방출을 허용했다. 반면, 한미조약은 조선의 식량이 부족할 때에는 일시적으로 양곡수출을 금지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세이프가드 조항을 삽입했다. 한미조약을 바탕으로 조선정부는 무관세로 대표되는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 무역규칙 개정에 나설 수 있었다.

한미조약은 영국과 체결한 조약에 비해서도 조선에 우호적이었다. 한영조약은 조선에 대단히 불리했다. 영국은 1883년 11월에 개정된 한영신조약을 통해서 영국산 수입품 관세를 절반으로 대폭 인하했다. 농기구 등 10여 종은 무관세, 일반상품과 자국 상품의 대종을 이루는 면직물 세율을 각각 5%와 7%로 정했다. 이 조치는 전체 영국산 수입품의 80~90%에 해당하는 상품에다가 파격적으로 저렴한 관세율을 적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구한말에 영국이 보여준 외교적 행태는 제국주의의 전형이자 유럽열강의 외교문법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도 해도 지나치지 않다. 영국은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지 불과 1년 6개월 만에 조약개정에 나서 신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주요 개정 내용을 살펴보면 관세 및 역외조항 관련하여 조선에게 불리한 내용을 다수 포함했다.

조선의 해안선을 영국 임의대로 측정할 수 있는 조항을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국 군함이 조선의 모든 항구에 정박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는 조선의 영토주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이자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됐다. 1885년, 영국은 거문도를 강제 점령하여 '포트해밀턴'이라 이름부친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이것은 러시아 함대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해양봉쇄 조치로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그 상대만 바뀌었을 뿐 130년 후 제주 강정마을에서 그대로 재연될 예정이었다.

한미조약 체결을 전후해서 조선에는 세 종류의 국제정치문법이 병존했다. 첫 번째는 조선, 청나라 사이의 조공관계 및 사대교린에 기반한 전통적인 외교문법이다. 두 번째는 <조선책략>을 통해 들어온 유럽 열강의 현실주의 외교문법이다. 이는 다른 말로 만국공법 또는 그 당시의 국제법 체계이다. 세 번째는 중립, 불간섭, 비개입으로 상징되는 미국식 문호개방 외교문법이다.

비차별, 최혜국 대우로 상징되는 문호개방 외교문법을 채택한 것은 미국이 유럽 열강나라들에 비해 특별히 박애주의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외교문법이 미국 대외정책의 목표인 상업적 이익 실현에 가장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미국의 외교문법은 체약 상대국의 오해를 낳기 십상이었다. 조선의 경우 오해정도가 유달리 심했다. 미국 의사와는 상관없이, 오해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미국에 대한 의존은 그만큼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미수호조약 #조선책략 #슈펠트 #이홍장 #한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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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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