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얼굴 붉히더라도 트럼프에게 따져야 한다

[주장] 한미정상회담에 바란다... 우리가 '당사자'로서 요구해야 하는 것들

등록 2019.04.09 09:05수정 2019.04.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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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18년 9월 미국 뉴욕 롯데 뉴욕팰리스 호텔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4월 10~11일(현지시각)에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이 회담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의 '노딜' 이후 북미관계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고 그 여파로 남북관계에도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문재인 정부가 자임해온 중재자 역할에 대해서도 북미 양측의 불만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북한은 남북관계의 자율성이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 및 한미공조에 갇힌 현실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불만을 표하고 있다. 미국은 남북관계는 비핵화보다 앞서가서는 안 된다며, 대북 압박에 동참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위축된 자세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노이 정상회담이 결렬된 데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하면서 따질 것은 따지면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노딜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


하노이 회담이 노딜로 끝난 이유는 명백하다. 트럼프 행정부가 회담 이틀째인 2월 28일 이른바 '비핵화 정의 문서'를 들이민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 문서를 입수해 보도한 3월 30일자 로이터 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요구는 비핵화를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이 핵무기와 핵물질을 미국에 넘기고, 핵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과 생물무기 및 화학무기도 폐기해야 하며, 생화학무기 개발로 전용될 수 있는 이중 용도 시설도 폐기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에겐 일종의 '항복 문서'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회담은 결렬되었다.

미국이 제시한 비핵화, 즉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생화학무기를 모두 폐기해야 한다는 요구는 '너무 커서 잡을 수 없는 것(too big to grasp)'이다. 또한 북미협상은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과도 같은데, 여기에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을 뛰어넘는 모난 돌들을 담으면 그릇이 깨질 수도 있다.

기실 미국이 이러한 일방적인 요구 대신에 첫째 날 논의되었던 쟁점들을 이튿날 조율하는 쪽으로 집중했다면, 결렬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이 제시한 영변 핵시설 폐기 대상을 분명히 하고 대북 제재 완화 수준도 조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이 의심하는 영변 이외의 우라늄 농축 시설에 대한 현장 방문도, 비핵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핵무기와 핵물질 폐기 방안 및 이에 대한 상응조치도 논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러한 실용적 자세가 아니라 일방적 요구로 회담을 결렬시키고 말았다. 하노이 노딜의 1차적인 책임은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선택과 집중을 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비핵화에 자꾸 이것저것 끼워 넣으면서 비핵화 자체도 불가능하게 하지 말고, 북핵 해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거꾸로 문 대통령이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국이 작성한 비핵화 정의 문서에 절대로 동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미국의 일방적이고 과도한 요구에 한국마저 동의하게 되면, 중재자든 운전자든 한국의 역할은 사실상 사라지고 미국의 범위에 갇히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는 '한국식' 비핵화 정의 문서를 작성해 중재자에서 당사자로 역할 변경을 시도해야 한다. 그 모태로는 1992년에 남북한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삼을 수 있다. 이를 기본으로 삼으면서 한반도 비핵지대 조약 체결을 최종적인 목표로 제시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비핵지대 조약 체결에는 핵보유국의 의무사항도 담을 수 있고, 또한 사상 최초로 북한의 비핵화 약속에 국제법적 구속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미 양측의 요구를 포괄적으로 담을 수 있다.

압박과 유인을 넘어선 공감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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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식일정을 마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3월 2일 베트남 국경 동당역에서 전용열차에 오르기 전 환송식에 참석하고 있다. ⓒ 이희훈

 
트럼프 행정부의 낙관론은 대북 제재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3월 29일 "북한은 굉장히 고통받고 있다, 그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역시 4월 2일에 "북한 비핵화에 정해진 시간표가 없다"면서도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대북 제재가 그 시간표를 앞당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점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제재를 통해 북한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압박'도, 북한이 비핵화를 하면 제재 해제에 힘입어 경제발전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유인'도, 실패한 외교를 되풀이하게 할 뿐이다. 트럼프가 진정 전임 대통령들과 다른 접근법을 원한다면, 제재 중독에서부터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제재는 일종의 고문이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부당하다고 느낄 때 고통을 감수하면서 저항하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만든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아왔는데, 정작 유엔 제재 권한을 갖고 있는 5개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모두 핵보유국들이다. 북한이 제재를 부당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래서 제재가 효과를 보려면 제재를 완화하고 해제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비핵화가 강요된 굴욕이 아니라 명예로운 선택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이 점을 납득시키면서 김정은과의 '공감'을 통한 문제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고 설득해야 한다. 굳이 심리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언행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감에 있다. 그리고 공감을 형성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은 제재에 대해 역지사지의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다.

단언컨대, 김정은은 하노이에서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해 짙은 회의감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비핵화를 훨씬 넘어선 미국의 무리한 요구와 대북 제재에 대한 미국의 완강한 태도를 경험하고선 말이다.

기로에 선 김정은의 마음을 다잡는 길은 트럼프가 공감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밖에 없다. 트럼프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거나 "김정은과 좋은 관계에 있다"는 말의 성찬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덜고 김정은과의 신뢰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제재 문제 해결이다.

문 대통령은 얼굴이 붉어지고 목청이 높아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동시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힘과 지혜를 모아 이 기회를 함께 잡자고 설득해야 한다.
#비핵화 #한미정상회담 #대북 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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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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