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의 하수인들 '성고문' 까지 자행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81회] 이 사건은 공권력의 횡포와 부도덕성, 인권탄압의 실상을 폭로, 제5공화국의 종말을 앞당기는 '최고장'이 되었다

등록 2019.04.23 16:25수정 2019.04.2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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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성고문사건 부천 성고문사건 피해자 권인숙양과 담당변호사 조영래 변호사 ⓒ 연합뉴스

포악한 독재체제에서는 관리들도 포악해진다.

히틀러나 스탈린, 일제와 유신체제하의 수사관들의 행태를 보면 잘 알게 된다. 전두환 체제에서 일부 검ㆍ경ㆍ정보요원 등의 행위는 야만, 그것이었다. 악독한 자들이 출세하는 변칙상태여서 악행이 계속되고, 견제 기능이 차단되면서 악행은 구조화되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정치ㆍ사회적 배경이다.

"잔약한 체구의 처녀가 지난 6월 6일과 7일 부천서에서 저 무도하고도 야수적인 능욕을 당하고, 산산이 파괴된 인생의 절망과 겪어보지 않고는 누구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비통한 자기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출구를 찾을 길 없는 치떨리는 분노에 시달리면서 경찰서보호소에서 유치장으로, 다시 교도소의 감방으로 짐짝처럼 넘겨질 때에 순간순간마다 그녀의 뇌리를 무겁게 짓눌렀던 것은 오직 자기파괴와 죽음에의 충동, 그리고 한 시도 떠나지 않는 악몽 속의 가위눌림뿐, 그녀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권인숙 씨의 성고문 정황을 변호인단의 〈고발장〉은 이렇게 통렬히 적시했다. 〈고발장〉은 다시 이어진다.

"저 나치즘 하에서나 있었음직한 비인간적인 만행이 이 땅에서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경악과 공분을 느낌과 아울러 인간에 대한 믿음마저 앗아가는 듯한 암담한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다. 단순히 음욕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성이 고문의 도구로 악용되어 계획적으로 자행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86년 6월 6일 새벽 4시 30분 경부터 2시간 반 동안, 그리고 7일 밤 9시 30분 경부터 2시간 동안 경기도 부천경찰서 경장 문귀동은 권양에게 성고문을 가하며 진술을 강요했다. 문귀동은 5ㆍ3인천사태 관련 수배자의 소재를 대라면서 권양을 성고문한 것이다.

86년 인천 5ㆍ3항쟁 이후 민주화 진영은 다양한 방법으로 5공 헌법개정 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정권안보차원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인천 5ㆍ3항쟁의 배후를 색출하는데 주력하면서, 이를 위해 구속ㆍ수배ㆍ고문 등을 자행하였다.


22세의 젊은 여성의 가냘픈 몸으로 시대의 불의, 제도와 공권력의 폭력에 불굴의 투지로 맞섰던 권양은, 6월 4일 경찰에 연행돼 성고문이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치욕을 당한 후 공문서변조 및 동 행사, 사문서변조 및 동 행사, 절도, 문서파손 등의 엉뚱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1년 6월의 형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 중 당국의 7ㆍ6조치로 가석방되었다.

권양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선택된 소수에 드는 여대생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82년 서울대 가정대 의류학과에 입학한 그는 노동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대학 4학년인 85년 봄 스스로 학교를 등지고 경기도 부천시 송내동에 있는 주식회사 성신이라는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에 '허명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생산직 근로자로 위장취업을 했다.

대학출신들의 생산직 취업이 노동운동을 위한 위장취업이 규제되는 상황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남의 주민등록증을 변조해 사용했다.

그러나 권양은 이 회사에 오래 근무할 수가 없었다. 회사측으로부터 '위장취업'의 의심을 사게 되자 직장을 떠났다. 그러다가 6월 4일 밤 영장도 없이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어 성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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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보도, 당시 검찰은 성고문 대신 성적모욕행위라고 단어를 사용하도록 보도지침을 내렸고 언론을 이를 따랐다. 검찰은 권인숙씨의 주장이 공권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운동권의 공작이라고 주장했다. ⓒ 경향신문 PDF

사건발생 약 1개월 만인 7월 3일 권양은 변호사를 통해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인천지점에 고소하고, 5일에는 변호인단 9명이 문귀동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관 6명을 독직ㆍ폭행 및 가혹행위 혐의로 고발했으나, 문귀동은 사실을 은폐한 채 권양을 명예훼손 및 무고혐의로 맞고소했다.

검찰과 공안당국은 권양의 성폭행 주장을 '혁명을 위해 성까지 도구화하는' 급진 좌경세력의 상습적 전술이라며 권양을 매도했다. 또 정부당국은 각 언론기관에 보도지침을 보내 '부천서 성폭행사건'이라 쓰지 말고 그냥 '부천서사건'으로 보도할 것을 지시하는가 하면, 출입기자들에게 거액의 '촌지'를 뿌려 이 사건의 보도를 축소하고자 했다. 길들여진 언론들은 이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정부당국의 조직적인 은폐조작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 및 공정수사를 촉구하는 여론이 빗발치자 검찰은 뒤늦게 수사에 나서 진실을 거의 파헤쳤으나, 외부압력에 의해 사건을 고의적으로 은폐축소하고 8월 21일 문귀동에 대해 기소유예, 옥봉환 등 관련 경찰관 5명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9월 1일 권양의 변론과 진상규명을 위해 유례없이 변호사 166명이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검찰의 결정에 불복, 인천지검에 재정신청을 냈으나, 인천지검에 이어 서울지검에서 잇따라 기각한 데 이어 혐의사실을 대부분 인정한 서울고법에서도 끝내 재정신청을 기각당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 재항고 계류 중 사건발생 3년여 만인 89년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되었고 권양에게는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사건은 사실확인 과정에서 공권력의 횡포와 부도덕성, 인권탄압의 실상을 폭로, 제5공화국의 종말을 앞당기는 '최고장'이 되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당시의 사진들 1. 1986년 당시 재판정에 출석하는 조영래 변호사와 권인숙 2. 7월 27일 권인숙 성고문 사건 규탄대회에서 항의하는 민청련 김근태 의장 부인 인재근 여사(현 더불어민주당 의원) 3. 88년 5월 17일에 구속된 문귀동이 법정에 출두하는 모습 4.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의자 문귀동의 재판에 가위를 들고 온 시민(좌측 상단에서 시계방향) ⓒ민청련동지회|2018.02.12 ⓒ 오마이뉴스 사진(민청련동지회)

또한 재야ㆍ정치권ㆍ종교계ㆍ여성계가 연합하여 '성고문 용공조작 범국민폭로대회'를 개최하고, 부천경찰서 성고문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는 등 공동대처하는 과정에서 민주세력의 연대를 강화시킴으로써 87년 민주화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권인숙 씨는 수치를 무릅쓰고 성고문 사실을 폭로하고, '성고문'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의 극치로서 국민 특히 여성들을 충격과 분노에 떨게 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이 종래에 흔히 볼 수 있던 통상의 고문ㆍ가혹행위 수법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인간적 파괴를 노리고 반인륜적인 성고문 수법을 사용한 범행이며, 더욱이 피의사실에 관한 조사가 아니라 단순한 수배자의 검거를 위한 수단으로 이와 같이 끔직한 범행이 자행되었다는 점을 중시한다…."라는 변호인단의 고발내용처럼, 이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부도덕성과 악랄함을 극명하게 드러내준 비극이었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권인숙 #부천서_성고문사건 #문귀동 #성고문 #전두환_군사독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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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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