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김원봉,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 사용"

평양 주재 소련대사 <푸자노프 일지> 기록... 김광운 교수 "조선노동당 가입 안 해"

등록 2019.04.12 20:38수정 2019.04.12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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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서훈 논란이 점화된 가운데, 김원봉의 숙청 시기와 이유, 죄목 등이 나온 러시아 문서가 주목을 받고 있다. 해당 문서에는 김원봉이 체포 전 북한을 떠나 남한으로 가려고 했으며, 김달현 천도교청우당 대표가 미제 '간첩' 혐의를 받으면서 그와 함께 해임된 것으로 나와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이 발굴해 학계에 보고한 뒤 기자에게 제공한 <푸자노프 일지>(1958년 10월 24일자)에는 "김달현은 미국인들과 연결돼 있고 최근의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김원봉이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남쪽으로 가려고 온갖 시도를 했다는 진술이 인상적이다. <푸자노프 일지>는 평양 주재 소련 대사였던 알렉산드르 푸자노프가 일기 형식으로 북한 정계 동향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평양 주재 당시 당·군·정의 고위 간부들을 자주 만나 북한 내부 사정을 청취하고 이것을 본국에 보고하는 한편, 일지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위 기록에 김원봉과 함께 언급된 김달현(1884~1958)은 광복 후 북조선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을 역임하고,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무임소상(내각의 성원으로서 국가 관리의 일정한 부문을 맡지 아니한 장관을 이르는 말) 등을 지냈으나, 1958년 12월 간첩죄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김원봉은 그간 '연안파' 숙청 당시 해임·숙청됐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중국 공산당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연안파는 1956년 일어난 '8월 반당 종파' 사건 때 약 9만 명이 숙청됐다. 특히 스스로를 '김원봉의 부하'라고 말했던 조선의용대 분대장 출신 재중동포 작가 고 김학철(1916∼2001)은 연안파 숙청 당시 김원봉이 감옥 안에서 '청산가리'로 음독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창현 소장은 김원봉이 그보다 '2년 뒤'인 청우당 당수 김달현 숙청 때 함께 해임됐다고 봤다. 정 소장은 "푸자노프의 기록으로 볼 때 김원봉의 해임 및 체포가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연안파가 아니라 청우당 당수 김달현의 간첩 사건과 관련돼 있다"면서 "그가 조사를 받았다고 해서 재판에 넘겨진 것 같진 않다"고 밝혔다 .

김원봉 숙청 시기, 1956년 아닌 1958년 유력... 해임 뒤 정계 은퇴한 듯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 NARA / 박도

 
<푸자노프 일지>는 김원봉의 해임과 죄목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에 참석하였다. (...) 회의에서는 상들의 이동에 대한 정령과 옛 중앙통신사 사장 박무, 옛 강원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문태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원봉(옛 남조선인민공화당 위원장) 등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물어, 그들의 대의원 권한을 박탈한다는 정령을 비준하였다." ( 1958년 10월 1일자 <푸자노프 일지>, 괄호 안은 푸자노프의 기록)

정 소장에 따르면, 위에 언급된 최고인민회의 정기회의는 1958년 9월 중순에 열린 것이다. 그는 "함께 언급된 박무와 문태화 등이 (연안파를 숙청한) 8월 종파 사건에 직접 연계가 돼있지 않고, 그 비중으로 보아 김원봉에게 적용된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는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해임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국가 반혁명 '분자'라는 규정과 '책동'이란 규정은 북한에서 하늘과 땅 차이"라며 "전자에 비하면 후자는 형량이 가볍다,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김원봉의 최후가 숙청 뒤 정치범 수용소행 또는 자결보단 해임 뒤 평양 근교 시골 생활 정도로 추측된다"고 덧붙였다.

정 소장은 그러면서 "러시아 문서를 통해 김원봉의 숙청 시기와 사유, 적용된 죄목 등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에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이후 김원봉의 이름은 북한의 공식 매체나 문서에서 자취를 감췄다. 

북한사 전문가인 김광운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겸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도 11일 "약산은 연안계하곤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소련대사 일지는 정보 출처가 확실하다"라며 "약산이 반종파 투쟁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안 보이면서 이후 소극 분자로 낙인찍혔다"고 전했다.

난창 봉기 이후 공산주의에서 벗어나
 

김원봉.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지난 10일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국회의원회관에서 '사회주의자 서훈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를 열고 "정부가 공산주의자에게 훈장을 주려 한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한테, 우리의 적성(敵性)인 사람들한테 훈장을 준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지난 1일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독립기념관에서 김원봉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이 자리에 예고없이 참석한 지상욱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민 세금으로 이 같은 회의를 여는 데 동의할 수 없다"라면서 "이미 방향을 정해놓고 논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토론회를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김원봉을 둘러싸고 해묵은 이념 논쟁이 불거진 가운데, 김원봉이 '공산주의자'라는 주장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군)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염인호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의 <김원봉 연구>(1993, 창비)에 따르면, 1919년 중국 지린에서 의열단이 창단되고 약산이 의백(의열단의 단장)으로 추대됐을 때 의열단은 아나키즘 단체였다. 그 뒤 약산과 의열단이 공산주의에 기울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27년 8월 1일 장시성에서 일어난 난창 봉기에 참여했던 것을 계기로 약산은 공산주의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난창 봉기에서 단원들이 대부분 희생되고 자신과 윤세주만 살아남으면서 남의 나라 혁명에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희생돼선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뒤 해방 때까지 약산은 같은 시기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소련 및 중국 공산당과 전혀 연계를 갖지 않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에서 현실적인 행보를 취했다고 한다.

약산은 쑨원이 설립하고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국민당 정부의 군간부 양성학교)를 졸업했고, 장제스에게 자금을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운영했다. 자신이 1938년 조직한 조선의용대가 완연한 공산주의 단체로 변모해 1941년 황하강을 건너 화북의 공산당 지구로 북상할 때도 약산은 따라가지 않고 임시정부에 남았다.

장제스의 지원이 약산에게 집중되면서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이므로 그에게 자금을 줘선 안된다"는 투서가 국민당에 날아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국민당은 그와 같은 음해성 편지를 믿지 않았고, 장제스는 약산에 대한 지원을 끊지 않았다. 만약 한국당의 주장처럼 약산이 공산주의자였다면 이와 같은 행적과 우파 국민당 정부의 대응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김광운 편사연구관은 "김원봉의 사상은 하나로 말하기 어렵다, 김구처럼 그의 사상도 시기별로 다 다르다"라면서 "그는 중국에 있을 때 국민당의 지원을 받았던 사람이다, 젊었을 때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만들 때 관여한 적은 있지만 공산주의자로 산 적은 없다"고 밝혔다. 김 연구관은 그러면서 "약산은 민족해방과 통일·독립에 대해 포괄적으로 뜻을 뒀다"라며 "통일을 이루려면 남북협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선 왜놈(친일파)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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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자노프 일지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가 완역해 보관하고 있다. 전자자료관에서는 볼 수 없고 방문 열람만 가능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그렇다면 한국당 의원들의 주장처럼 약산이 '자진 월북'을 한 것일까? 약산은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차 북한에 갔다가 그대로 머물렀다. 같은해 9월 9일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김 연구관은 "신변 위협을 느끼고 홍명희나 김원봉 같은 이른바 '중도파'는 대개 방북했다가 잔류했다"라며 "북에서 당중앙위원회 부장과 강원도당 위원장까지 지낸 동명이인 김원봉이 있어서 사람들이 혼동한다, 약산 김원봉은 조선노동당에 가입을 안했다"고 밝혔다. 

약산은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와 이들의 사주를 받은 정치 깡패들의 테러 위협 때문에 북한행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친일 악질 경찰 노덕술에게 뺨을 맞고 사흘 밤낮을 통곡한 뒤 삭발을 하고 월북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여기선 왜놈(친일파)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그의 월북은 자진 형식을 취했으나, 실제 내용은 해방 공간의 분열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밀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당=국가'인 북한 체제에서 노동당에 가입하지 않고 '비주류'로 남았다는 것을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김원봉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김원봉 연구>에 따르면, 약산의 어머니는 해를 받아안는 태몽을 꾸고 약산을 낳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일본어 역관이었다. 김원봉에겐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전선' 형성이 일생 최대의 과제였다. 자신의 주도로 좌우가 연합해 1935년 창당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직을 비워놓고 김구를 기다리는 아량을 보였다. 그러나 김구는 끝내 민혁당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 행보를 추구했다.  

김학철은 약산이 나이 어린 부하들에게도 늘 '경어'를 쓴 사령관이었다고 기억했다. 또 약산은 1944년 일본군을 상대로 싸운 '임팔 전투'에서 광복군을 이끌고 영국군과 연합해 대승을 거뒀다. 이때의 공적을 인정받아 영국 왕 조지 6세에게 훈장을 받았다. 또 광복 뒤 귀향을 앞두고 19개밖에 안되는 비행기 좌석에 50명이 넘는 임정 요인들이 서로 타겠다고 다툴 때 약산은 다른 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제2진으로 3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복 후 소설가 박태원(봉준호 감독의 외조부)을 만난 자리에서 스스로를 "직업적인 혁명가"라고 소개했다. 박태원은 그를 여러 차례 인터뷰하고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그는 27년간의 항일기간 동안 한 번도 일제에 체포된 적이 없었다. 일제가 그를 죽이기 위해 중국인 암살자를 보내기도 하고 현상금을 걸거나 측근인 장건상을 체포해 그를 잡는 데 이용하려고 하는 등 갖은 모략을 썼음에도 번번이 실패했다. 장건상은 일제 밀정으로 활동한 친아들 장지갑의 밀고로 일제에 잡혔다. 일제는 그에게 약산을 홍콩으로 불러내라고 다그쳤다. 장건상은 협력하는 척하면서 경찰을 따돌리고 홍콩을 탈출해 국민당 정부의 피난수도였던 중경으로 가서 김원봉과 재회했다. 

장지갑은 의열단 학교로 불린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이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의 회고에 따르면, 상하이의 일본 영사관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갔다고 한다. 해방 뒤 그는 일본에 귀화했다.
#김원봉 #자유한국당 #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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