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옷들만 산더미... 또 한번 우는 강원도 산불 이재민

[현장-강원도 산불 그후⑤] 마냥 반갑지 않은 도움 손길... 진짜 필요한 게 뭔지 살펴야

등록 2019.04.13 11:24수정 2019.04.1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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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계획을 세워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강원도 산불 이재민들이 정말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부족하고 당장 뭐가 필요한지' 대답 한번 못 듣고,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막상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말 한 마디 잘못하는 순간 "지금 누구 약 올려"란 꾸지람을 듣는 경우도 있다. 과거 자식의 시신도 못 찾고 장례식을 치르는 아버님께 "지금 소감이 어떠신가요"라고 묻는 기자를 본 적 있다. 당시 그 아버님은 물끄러미 기자를 바라본 뒤 아무 말씀 없이 가던 길을 가셨다. 그 현장을 목격한 다음부터 이와 같은 현장에서는 차라리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산불피해신고(고성군 토성면 주민센터) “속초시(고성군)민 산불피해신고는 금일(4월 8일)까지 각 동(면) 주민센터에서 신고받습니다. 속초(고성)재난안전대책본부” 이런 문자가 속초시를 통과할 때 메시지로 들어오더니, 고성군에 들어서자 다시 고성군에서 메시지로 들어왔다.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피해를 모두 확인해 신고하란 소린지 이해하기 어렵다. ⓒ 정덕수


지난 8일, 3시간 정도 강원도 고성 산불 이재민이 생활하는 천진초등학교 대피소(고성군 토성면)를 둘러봤다. 피해 신고를 하는 토성면 사무소도 찾아 이재민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도 생각했다.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 아니면 약품? 다양한 부분들을 천천히 살펴봤다.

그렇게 현장을 둘러본 기자는 "당장 이재민들이 무엇이 필요하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학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기념 티셔츠 등 안 입는 옷들 있으면 이쪽으로 좀 보내주세요. 이재민들은 가재와 옷들이 모두 타버렸답니다. 산불 재난 지역인 고성군에 보내주면 좋다고 그러네요. 옷 정리해서 아래 주소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 강원도는 먹을 것보다 의류가 너무 부족하답니다. 
*주소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 

그 밖에 물품(슬리퍼, 기초화장품, 어르신들 지팡이, 복대, 그릇류)가 많이 필요하시답니다. 상자에 물품 종류 적어주세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 
△△대학교 체육관 
033-XXX-XXXX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 여러 곳에 산불과 관련해 '도움의 손길을 기다립니다'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피해 초기 '뭐가 필요하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SNS에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누가 보면 이런 게 진짜 필요한 줄 안다. 그러나 왜 기념 티셔츠같은 본인도 안 입는 옷을 이재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걸까. 피해조사가 끝난 후 곧장 사용해야 하는 장갑과 삽, 괭이, 빗자루 등이 필요하다고 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이런 류의 글이 유포되면서 이재민 센터에는 전국 각지에서 보낸 헌 옷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에 고성군 자원봉사센터는 '허위문자 등에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할 것'을 당부하는 메시지까지 남겼다. 


현장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당장 시급한 건 '피해 조사'다. 그리고 아직 생각할 시간이 어느 정도 있다. 그동안 하나씩 살펴보며 꼭 필요하다 싶은 역할을 각자 하면 되리라 본다.
 

이재민이 된 친구 아버님 평생 생업으로 삼았던 벌과 팔기 위해 포장까지 마친 꿀 1000kg을 모두 이번 산불로 잃어버렸다. 조만간 손을 보려던 집 한 채와 꿀을 보관하던 창고도 모두 전소됐다. 정확한 피해물품도 파악하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어떻게든 보상을 최소로 하려는 보험회사와 금융권 때문에 부자간에 대화가 어두웠다. ⓒ 정덕수


이재민들의 표정은 이재민이 된 친구 아버님의 모습과 같다. 피해를 본 걸 정리하다가도 표정이 어두워진다. 조용히 눈을 감는 모습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아픔을 표현한다. 

집이 전소된 경우엔 다시 집을 짓기까지 몇 개월이 걸릴지 모른다. '왜 장비를 불러 치우고 일을 시작하지 않느냐?' 묻는 이들도 있다. 정부는 8일까지 이재민들에게 피해 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걸로 모두 끝나지 않았다. 현장에 나가 공무원들이 조사를 마쳐야 한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이재민들은 자신의 집이라 해도 도대체 얼마만큼 손해를 입었는지 잘 모른다. 대부분이 농민이기 때문이다. 집은 물론이고 농가 모두 대출을 받아 지었다. "아직 대출도 다 못 갚았는데 이제 어디서 돈을 구해 집을 지어"라는 말처럼 헤쳐나갈 일이 막막하다. 

가까운 곳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그러나 친인척도 며칠은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길어지면 서로 불편하기 마련이다. 

학교 체육관을 대피소로 사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국회 고성연수원과 같은 곳을 이재민이 사용하게 한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으나 이마저도 '당분간'이란 전제 조건이 있다.
   

정성이 가득한 순두부 한여농괴산군연합회에서 정성껏 만들어 온 순두부는 식지 않게 단단히 포장을 해 탑차로 가져왔다. 도착과 동시 1000인분의 순두부가 각 대피소로 배달되어 나갔다. ⓒ 정덕수

   

소불고기 한 끼 식사량이 1500인분이다. 커다란 가마솥으로 소불고기를 만들어도 모자라 몇 번 같은 일을 해야 이재민들이 머무는 개별 대피소로 배달할 수 있다. ⓒ 정덕수

      

식사시간 하늘이 무너졌다고 안 먹을 수는 없다. 산불로 한순간에 이재민이 된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나선 자원봉사자들 덕에 따뜻한 밥을 나눈다 ⓒ 정덕수

 
식사는 자원봉사자들이 이재민 대피소에 모여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여러 장소로 분산된 이재민들에게 식사를 준비해 배달도 해주고 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을 위해선 자원봉사자가 직접 식사를 가져다드리거나 모시고 나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산불로 한순간에 이재민이 된 이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지원한 단체와 개인이 많아 순서를 기다려야 된다.
  

사랑실은 빨래방 이재민들을 위한 빨래방을 운영중이다. 직접 가져오는 이재민도 있으나 봉사자들이 각 대피소를 찾아가 빨래를 가져와서 세탁한 뒤 말려서 배달한다. ⓒ 정덕수

   

세탁기 빨래를 대신 해주는 차량을 보고 궁금해서 허락을 받고 직접 들어가 봤다. 대형 드럼세탁기 4대가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 정덕수

   

빨래 건조 햇살은 따뜻하지만 바람이 제법 많이 불었다. 생수병을 가져다 건조대가 넘어지지 않게 고이며 “오늘은 바람이 엄청 고마워요. 빨래가 이렇게 빨리 마르니”라며 산불이 일어났을 때의 야속한 바람도 빨래를 말릴 땐 도움이 된다고 했다. ⓒ 정덕수

 
'의류가 가장 필요하다'고 한 내용이 잘못됐다고는 보지 않는다. 다만 현지 기후와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보내는 건, 오히려 이들에게 짐만 지워주는 꼴이다. 

피해 현장엔 세탁 봉사 차량이 운영 중이다. 건강보험공단에서 이재민들의 건강을 지키는 최우선 과제로 옷과 수건 등 빨래를 해주기로 했다. 이는 정말 현명한 판단이다.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생활하다 보면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된다. 그런데 집에서 세탁한 것처럼 밖에서도 입을 수 있게 되면 그만큼 생활 환경이 쾌적해진다. 

이재민이 직접 세탁물을 가져와 세탁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원봉사자들이 대피소를 돌며 이재민들의 세탁물을 걷어 와 세탁과 건조를 마친 후 다시 배달해주고 있다.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은 밝은 표정으로 이재민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있다. 

10여 일 뒤 피해조사가 모두 끝나고 나면 많은 일손이 필요하다. 전소되고 완전히 부서진 집은 중장비로 치울 수 있지만, 반파나 연기에 그을린 집은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치우고 청소해야 한다. 이재민들이 임시 거처로 사용할 컨테이너도 그때쯤에야 들어온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강원지역 시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두가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강원도 산불 #고성산불 #이재민 #자원봉사 #식사와 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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